소설리스트

65화 (65/131)

한여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치 이런 사태를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김무공은 자신에게 미리 혼원단을 넘겼던 거였다.

순간 온갖 상념이 오갔지만, 한여름은 애써 몰아내고 혼원단을 자신의 입안에 넣었다.

혼원단을 씹어서 잘게 부순 후, 김무공의 입을 열어 그대로 키스했다. 잘게 부서진 혼원단이 김무공의 입안에 전부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내기를 불어넣어 식도로 혼원단을 넘겼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제발.’

이젠 한여름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최상급의 요상단이라 했으니, 효과가 있길 기도하는 수밖에. 김무공의 손을 꼭 붙잡고 한여름은 계속해서 빌었다.

그렇게.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김무공의 안색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불안했던 심장 소리도 안정을 되찾았다. 혼원문 비전의 영약이란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나쁜 놈.”

눈물로 잔뜩 얼룩진 얼굴을 소매로 닦으면서 한여름은 툭 내뱉었다. 사람 걱정하는 것도 모르고. 왜 그리 무리하는지. 한여름의 고운 아미가 잔뜩 찡그려졌다. 안도와 원망, 설움이 뒤섞여 또다시 눈물이 펑펑 나오려는 걸 꾸역꾸역 참았다.

투두두두두두-

한동안 김무공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한여름의 귓가로, 헬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공간격리가 풀린 걸 인지하고 아카데미에서 다급히 보낸 구조대였다. 한여름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윽고, 다사다난했던 무인도 평가의 끝을 알리는.

아카데미 문양이 박힌 헬기가 한여름의 눈동자에 비치기 시작했다.

***

몽롱한 의식 속을 나는 부유했다.

죽었는가. 살았는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생각을 한다는 건 뇌가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니, 나는 살아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추정만 할 뿐이다.

실제로 몸의 감각은 전혀 없었지만, 서서히 진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살아남긴 한 모양이다.

마지막에 봤던 한여름의 얼굴. 입술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각과 함께, 무언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었다.

‘혼원단.’

내상이 급격하게 완화되어 도도하게 흐르는 진기를 토대로 판단해 보면, 한여름이 내게 먹인 건 혼원단이 거의 확실했다. 나보다 쟤가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몰래 넣어뒀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풍지해와 전투 중에 혼원단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으니까. 아마 내가 갖고 있었으면 진즉 가루가 되어버렸지 않을까. 아까운 혼원단 반쪽을 허무하게 잃을뻔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찔해졌다.

근데 좀 아깝긴 하다.

나보다 한여름 쟤한테 먹이는 편이 나았을 거 같은데. 난 경지가 딸리는 거지 내공이 부족하진 않았다. 물론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게 어디야’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거든.

어찌 됐든, 내 식도를 타고내렸던 혼원단의 기운은 전신 세맥까지 구석구석 퍼져 내가 이승을 하직하는 걸 강제로 막아준 듯했다.

마지막에 내 몸을 관조해본 바로는, 혼원단이 아니었다면 살아났어도 내상 때문에 제구실 못 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지아에게도 감사해야겠네.

할 수 있는 게 생각밖에 없다 보니,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들 잘 살아남았으려나. 천하연이 있으니 별걱정은 안 된다만.

그러고 보니 한여름 그 기지배는 어떻게 구조대보다 빨리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한 거지? 섬 한 바퀴 돌았으면 시간이 안 맞는데. 모르겠다.

신체의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는 한참 걸릴듯했다. 진기로 흐름은 어느 정도 느껴지지만, 내면을 관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떻게 이겼지.’

완숙한 초절정은 확실히 벅찬 상대였다. 혈귀들처럼 무식한 놈들이 아닌, 멀쩡한 인간은 사고라는 걸 하는 법이니까. 패배하기 직전까지 몰렸다는 건 기억난다.

사실 마지막쯤 가서는 무아지경으로 공방을 주고받아서 제대로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특히 풍지해의 절초를 받아넘긴 건, 나로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됐다.

이상하긴 해도, 딱 이 표현이 알맞았다. 한 번 했으니 다음은 더 쉽겠지. 연습하다 보면 분명 빠르게 숙달될 거다. 그냥,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상념을 이어나가다 보니 슬슬 신체 내부를 관조할 수 있게 됐다. 몸 상태는 빈말로라도 좋다곤 못하겠지만, 요양만 잘 하면 후유증 없이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어디 하나 불구 되는 건 무인으로서도 치명적인 요소거든.

다만, 불안한 점은 있었다. 심장 언저리에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아마 마지막에 구슬에서 흡수한 검붉은 덩어리 같은데, 단단히 뭉친 그것은 진기로 툭툭 건드려 봐도 효과가 없었다.

일단 좋은 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마물의 악의나 흡수하는 구슬에서 나온 게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풍지해가 마지막에 전음으로 경고했던 내용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위험하다 했던가?

모르겠다.

일단 몸부터 회복하는 게 먼저다.

꿈틀.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노력하니, 손가락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옆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말이 귓전을 때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 고작 이거 하는데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 했다. 차라리 풍지해랑 한 번 더 싸우는 게 쉽겠군.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든다.

어찌어찌 눈을 뜨니 새하얀 병동 안이었다.

그리고 코앞에서 나를 쳐다보는, ‘한여름’이 있었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한여름의 얼굴을 마주하니까 괜히 장난치고 싶어진다.

내기까지 강제로 끌어올려 팔을 든 뒤, 한여름의 볼을 잡아당겼다. 마시멜로와 같은 볼살이 주욱 늘어났다.

“...김므겅 생도?”

?

목소리가 묘하게 달랐다.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옆을 보니, ‘진짜’ 한여름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한여름이 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볼을 잡아당긴 사람은 한여름이 아니라 청하 교수였다.

“....”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팔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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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 교수가 지그시 나를 보더니,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다행이네.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나 보네요?”

내공을 돌려 상반신을 강제로 일으킬까 하다가, 포기했다. 굳이 안락함에서 벗어나고 싶진 않았다.

“다행이다....”

한여름이 진한 숨을 내쉬는 소리도 들려왔다.

흐린 시야로 보니까 진짜 헷갈리긴 하다.

왜 저리 닮은 거야.

나 몰래 무림전기 게임 모델이라도 하고 왔나?

자매도 저것만큼 닮진 않았겠다.

그러니까, 실수한 건 내 탓이 아니다.

[토끼눈.]

전음으로 보낼까 하다가, 그것조차 힘이 달려 그냥 채팅을 툭 던졌다. 역시 편한 게 최고지. 한여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붉게 충혈된 눈 주변이 퉁퉁 부어있는 게,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너 진짜....]

[뭐.]

[...다행이야.]

또 눈가가 촉촉해진다.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가 이렇게 눈물이 많았나 싶다.

[너 우니까 못생겼더라. 울지 마라.]

[...나쁜 놈.]

눈을 연신 깜빡이던 한여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행히 울 생각은 조금 가신 모양이었다.

[아, 죽겠다.]

[진짜 죽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안 죽었잖냐. 그럼 됐지.]

쾅. 한여름이 가볍게 병상을 내리쳤다.

“한여름 생도...?”

한여름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청하 교수가 옆을 홱 돌아봤다.

“죄송해요. 저기 김무공 생도가 눈빛으로 도발하네요.”

“사이가 가까우면 고작 눈빛으로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보군요.”

“...아마도요.”

“어찌 됐든, 도발까지 할 정도면 김무공 생도는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제 볼을 꼬집었던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청하 교수가 새침하게 나를 한번 흘겼다.

[설마 나랑 착각했어?]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한여름이 채팅을 보냈다.

[눈이 침침해서 그래. 너도 한번 죽었다 살아나 봐라. 제대로 보이나.]

[미안.]

[아니, 내가 미안하지. 나 좀 일으켜주라. 힘들다.]

[잠시.]

으으 하는 소리를 내자 한여름이 내 상반신을 일으켰다.

“...음.”

성대를 점검해 보니 말할 정도까진 돌아왔다.

“말할 수 있겠어요?”

청하 교수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여간, 이 교수도 여린 거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아. 괜찮네요. 얼마나 지났죠?”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꽤 첨단적인 병실이었다. 오키나와인가? 벽에 걸린 독수리 로고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루밖에 안 지났어요. 여긴 미 해군 소속 메르시(Mercy)급 병원선이에요. 다행히 근처를 항해 중이라 이쪽으로 후송했어요. 운이 좋았죠. 발견 당시 김무공 생도는 반쯤 시체 상태였거든요. 피도 너무 많이 흘렸고.”

반쯤 시체라니. 그런 것치곤 지금 내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묘하게 익숙하다 했더니, 저거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였다. 어쩐지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지던데, 바다 위였구나.

“그렇군요.”

“예, 근데 정말 괴물 같은 회복력이네요. 아무리 근처에 메르시급 병원선이 있었고, 영약을 복용했다지만. 하루 만에 일어날 부상은 절대 아니었거든요.”

확실히, 내 몸은 태양지체 때문인지 회복력이 상당히 좋긴 했다. 물론 과할 정도로 좋아서 임계치 넘으면 바로 폭발해버리는 부작용이 있지만.

“아직은 회복이 좀 더 필요하긴 합니다.”

감각이 돌아올수록 통증도 강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폐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느낌이다. 양심출타 특성이 아니었다면 마약성 진통제 놔달라고 데굴데굴 구르지 않았을까.

“그러겠지요. 미 해군에서 배려해준 덕에, 이 배로 오키나와까지 생도들을 이동시키기로 했어요. 어차피 생도들 몸을 정밀검진할 필요도 있으니까요. 김무공 생도도 편히 쉬시면 되어요.”

역시 미국은 대한민국 최고의 우방이다. 오히려 이 세계에서는 더 끈끈하게 협조하는듯했다. 편안한 병상을 제공해준 천조국에 감사를. 독수리 로고에 감사의 눈빛을 한 번 보내주고, 청하 교수와 시선을 마주쳤다.

“생도들은 다 무사합니까?”

“예. 전부 무사해요. 천하연, 한여름, 서문예린 생도 말에 따르면 김무공 생도의 기책 덕이라는데. 맞나요?”

먼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뭐빠지게 돌아다녔던 것이 의미가 없진 않았구나. 이로써 비틀릴뻔했던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기책이라 할 건 없고, 미리 대비했을 뿐입니다.”

“그런가요. 과례는 비례라 하였으니. 김무공 생도는 좀 더 자신을 내세워도 될 텐데 말이지요.”

청하 교수가 입술을 샐쭉거렸다. 내 말이 마음에 안 드시나?

“거기 있던 건 대체 뭡니까?”

“근처 섬에 사는 원주민의 말에 따르면 신의 유해. 라고 하더군요. 진실은 모르지만요. 섬이 무인도가 된 이유도 그 때문이어요. 다들 그걸 두려워했거든요. 아카데미에서 진법으로 봉인해놨는데, 교수는 당연히 출입이 가능해서....”

확실히, 풍지해 교수가 마냥 헛소리를 지껄인 건 아니었다. 일단 아카데미에서도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진 못한듯했다.

“그보다. 질문드릴 게 있어요, 김무공 생도.”

“예.”

“풍지해 교수와 생사결을 벌인 게 김무공 생도가 맞나요?”

생사결이라. 돌려 말했지만 뭘 묻고자 하는지는 뻔했다.

“맞습니다. 제가 그를 죽였습니다. 또한, 구슬도 제가 파괴했습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청하 교수가 침음을 흘렸다.

“흐음... 역시 그런가요.”

“풍지해 교수는 혈교의 주구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조사해보면 나오겠죠. 다만, 제가 믿기 힘든 부분은... 김무공 생도가 그를 이겼다는 쪽이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김무공 생도의 몸 상태를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지요. 나중에 뵈어요. 고생하셨어요.”

청하 교수가 옆에 있던 파일철을 집어 들고, 한여름과 시선을 한 번 교환했다. 그리곤 뒤돌아서서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근데 이러면 평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든 의문을 혼잣말처럼 말했다.

“넌 이 상황에서도 평가 생각이 나?”

한여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어야지.”

“제발 무리하지 좀 마. 너 죽으면 확, 나도 죽어버릴 거야.”

입술을 비죽 내밀고 한여름이 엎드렸다. 목소리에서부터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그건 안 됨. 너라도 살아야지.”

“싫어. 혼자 살아서 뭐해.”

“다음에는 조심할 테니까 너무 그러진 마.”

엎드린 한여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아... 알았어.”

“잠 안 잤냐?”

“너 같으면 잠이 오겠어?”

하긴, 내가 같은 상황이어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거 같긴 했다.

“이리로 들어올래?”

이불을 살짝 들치며 말했다.

“여기 CCTV 있어.”

“뭐 어때. 그냥 건전하게 잠만 자는 건데. 병상 넓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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