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31)

잠시 고민하던 한여름이 결국 쭈뼛쭈뼛 내 옆에 누웠다. 감시를 의식해서 그런지 거리는 어느 정도 벌렸다. 나는 손을 뻗어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다.”

“...아냐. 네가 무리할 정도면, 필요한 일이었겠지.”

풍지해와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진정 필요한 일이었나?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도망 다니면서 시간만 끌었다면, 천하연이 다 해결해버렸을 수도 있었다. 혼원단도 아끼고, 나도 다치지 않고 지금보다 나은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여름의 믿음을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모든 일은 나중 가야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니.

나는 묵묵히 한여름의 머리칼만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언젠가는 확신이 담긴 답을 건넬 수 있을 거라 믿으며.

***

배유리. 점창파 삼대제자.

아카데미 1학년.

특기. 사일검법射日劍法.

사일, 태양을 쏜다는 명칭처럼 사일검법은 극도의 쾌검을 추구했다. 점창파 대부분의 무공은 쾌속함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사일검법은 그중에서도 정점이라 볼 수 있었으니.

당연히 사일검법은 아무에게나 전수하는 게 아니었다. 점창파 역사상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재. 그것이 배유리였다.

‘그러면 뭐해.’

한때 자신감으로 넘쳐있던 배유리는 아카데미에 들어온 순간, 기가 팍 죽었다.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점창제일기재?

아무 의미 없었다. 옆에는 100년, 1000년 단위로 찾아봐야 할 천재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천하연을 처음 봤을 땐, 마치 장로님들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자신과 동갑에 명문대파의 장로라니.

그게 말이 되나 싶다. 인간 같지 않게 잘생긴 얼굴, 뛰어난 무공, 차분한 성격.

천하연에게 끌리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문제. 지금은 그 색채가 거의 희미해졌다곤 하나, 본디 도문이었던 점창파는 철저한 남녀분리를 시행했다. 당연히 또래 남자들과 대화 한 마디 제대로 나눠본 적 없었던 배유리에게, ‘남자’인 천하연은 너무 어려운 존재였다.

무인도 평가에서 이변이 발생했을 때, 배유리는 필사적으로 타마토마와 싸웠다.

사일검법 특성상 요혈을 노리는 일점 위주의 공격이 강점인데, 요리조리 빠르게 움직이는 타마토마 마석을 단숨에 파괴하기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신경 마디를 끊기도 쉽지 않았다. 서서히 힘이 빠져 쓰러지기 직전,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후광과 함께 하늘에서 천하연이 강림했다.

그렇게, 배유리는 사랑에 빠졌다.

병원선에 사이좋게 탑승한 이후, 배유리는 천하연을 먼발치에서 졸졸 따라다녔다.

기감이 발달한 천하연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신교의 소천마였으니. 점창이라는, 명백한 정파 인물의 관심은 다소 부담스러웠다.

결국 김무공의 병실에 들어가기 전.

그 근처까지 따라온 배유리에게 찰나에 접근해 말을 걸었다.

“...나를 왜 미행하는 거지?”

“미, 미행이라뇨.”

인지하지도 못할 새에 코앞까지 다가온 천하연을 보며 배유리가 화들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대의 행적을 일일이 말해줘야 하나?”

“그런 거 아닌데....”

“그런 게 아니면 대체 뭐지? 나로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고밖에 볼 수 없겠구나.”

차가운 천하연의 말투에 배유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좋아해요.”

“뭐?”

“천하연님을 사모해요.”

“....”

이번엔 천하연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가능성이 불현듯 닥쳐오니 말문이 막혔다.

“응? 여기서 뭐해?”

소란을 감지하고 나온 김무공이 둘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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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흡...!”

째릿. 천하연이 싸늘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웃으면 안 되는 건 알고 있는데, 여성에게 고백받았다는 걸 들으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걸 참기 힘들었다.

천하연이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하자 배유리가 눈물을 질질 짜면서 도망갔을 때는 나도 눈만 뻐끔뻐끔 떴다.

어쩐지, 저 천하연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더라.

쉬이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기에 뭔가 했다.

“이참에 그냥 남장 풀어버리는 게 어때? 예쁜 얼굴 가리는 거 아깝지 않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아쉽네.”

역시 아버지인 천마의 명령이었나. 내 안의 천마 이미지는 위대한 절대자에서 극성 아비로 변하고 있었다.

“너 아무한테나 예쁘다 하고 다녀?”

한여름이 눈을 게슴츠레하고 날 쳐다봤다. 아무한테나라니. 난 당당하다.

“아니. 너랑 천하연 말고는 한 적 없는데. 내가 좀 솔직해서.”

“나?”

“어. 너.”

“헤헤... 그럼 됐어.”

갑자기 볼을 긁적이면서 헤실헤실 웃는 거 보면 참.

이럴 때 보면 단순한 성격 그 자체란 말이지.

“나갈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몸을 일으켰다.

병실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신다. 미 해군의 협조로 나는 호텔 같은 1인실에서 묵고 있지만, 그래 봐야 병실은 병실이다.

“괜찮아?”

“오냐. 이제 좀 걸어 다녀도 될 거 같아.”

아직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건 무리였지만, 이정도면 일상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무리하진 말구.”

“진짜 멀쩡해.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한여름의 머리를 헝클면서 말했다. 잠시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던 한여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연 너도 갈 거지?”

“나는 괜찮구나. 둘이 잘 다녀오거라.”

결국, 천하연은 병실에 남아있기로 했다.

유조선을 통째로 개조해서 만든 이 병원선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고, 내부에 거대한 식당까지 있었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병원 밥조차 무인도에서 먹던 것보단 나았지만.

그래도 이젠 다른 요리도 좀 먹고 싶어졌다.

둘이서 선내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니 다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무인인 우리를 신기해하는 듯했다.

미국에선 무인들을 일컬어 슈퍼 히어로라 부른다던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니 저런 눈빛들도 이해가 갔다.

실제로 가진 힘만 봐도 영화에서나 나오는 슈퍼 히어로 못지않았으니까.

한동안 두리번거리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코를 찌르는 고소하고도 강렬한 향이 느껴졌다.

우리는 홀린 듯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기본적으로는 뷔페식이었지만, 따로 즉석에서 요리를 해주는 코너가 있었다.

“치킨이다.”

맹한 목소리로 한여름이 읊조렸다.

그것도 막 튀긴. 아까 우리가 식당 밖에서 맡았던 강렬한 냄새의 정체가 이거였다.

“...응?”

한여름이 어딘가를 빤히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시선을 따라 옮기자 한여름을 닮은 여성이 고고한 자세로 치킨을 야무지게 뜯고 있었다. 청하 교수가 우리가 다가온 걸 인지하고 손과 입을 닦았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덕분에 괜찮습니다.”

내가 힐긋 치킨과 콜라를 보자, 청하 교수가 시선을 피하면서 머리카락 끝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 맛있거든요. 드셔보실래요? 요샌 도사라고 풀만 먹고 살진 않거든요.”

청하 교수가 쭈뼛쭈뼛하면서 닭다리 하나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변명까지.

이렇게 보니 묘하게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빙의 전 기준으로 따져도 연상 여성을 상대로 귀엽다는 표현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만.

근데 나는 나름 환자인데 이런 걸 권하는 것이, 청하 교수도 실은 조금 맹한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하여간,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 아니, 어쩌면 외모와 비슷하다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외형만 청순한 게 아니라 뇌도 청순하신 거지.

“그럼 사양 않고.”

지금도 열심히 튀기고 있는 치킨을 받아와서 청하 교수 근처에 나란히 앉았다. 나름 ‘병원’인데 이런 걸 줘도 되나 싶지만.

의료진과 승무원들 입장에선 병원 밥만 먹고 살긴 힘들어 보이긴 했다. 망망대해 한복판을 항해하는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 하니까.

바삭. 한 입 베어 물었다. 육즙과 함께 눅진한 기름이 흘러나왔다. 염지된 고기에서 나는 짭짤함, 바삭바삭거리는 식감과 탄수화물과 지방이 완벽하게 배합된 이 맛이 참으로 그리웠다.

역시, 현대 문명이 최고다.

콜라까지 한 모금 먹으니, 천국이 따로 있나 싶다. 이게 천국이지.

“이게 야쓰지.”

한여름이 행복한 표정으로 치킨을 베어 물었다.

“야쓰? 그게 뭐죠...?”

청하 교수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열심히 궁리하는 듯한데, 이걸 말해줘도 되나?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은 한여름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한 입 베어 문 치킨 다리를 들고 꽁꽁 얼어붙은 채, 식은땀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행복하다는 뜻이에요.”

치킨 다리를 내려놓고,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깔면서 머리칼을 양손으로 꼭 잡은 채 한여름이 작게 내뱉었다.

“아하. 확실히, 이건 야쓰네요.”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고, 천진난만하게 청하 교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여름의 얼굴이 붉어졌다.

돌겠군.

쟤 내가 언제 한 번 크게 실수할 것 같았다. 그러게 입 좀 조심하라니까.

[어, 어쩌지?]

[뭘 어째.]

[청하 교수님 막 딴 데 가서도 야쓰네요 이러면 안 되잖아. 어떡해.]

[네가 저지른 실수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아니, 농담하지 말고. 나 진지해. 혹시라도 청하 교수님 이미지 망치면 내 탓이잖아.]

[사실... 대로 말해야 하나?]

솔직히 나도 고민이었다. 야쓰네요라며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치킨을 집어 드는 걸 보니, 저러다 교수 회의 같은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말할까 봐 우려됐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음음, 청하 교수님?”

“예. 말하세요. 김므겅 생도.”

볼을 우물거리면서 말하는 걸 보니, 역시 귀엽다. 한여름 닮아서 그런가, 청하 교수와는 내적 친밀감이 이미 형성된 느낌이다.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솟구쳤지만, 애써 자제했다. 나는 교수고 너는 생도야 소리 듣고 싶진 않거든.

물론 최근 비슷한 소리를 했던 분을 이승하직 시켜드리는 겸에, 깔끔하게 화장까지 해드리긴 했다만.

“야쓰라는 말은 비속어니 쓰시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얘가 입이 좀 험해요.”

한여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톡 치면서 말했다.

“그런가요. 확실히, 편한 사이에서는 비속어를 많이 쓰긴 하지요. 이해했어요. 그런데 정확히 무슨 뜻이길래 그러지요?”

“...성적인 의미입니다. 입으로 내뱉긴 좀 그렇지요.”

“성적인...?”

이쯤 되면 좀 알아먹는 게 낫지 않을까? 알고 놀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청하 교수의 눈동자를 바라봤더니, 순수함 그 자체였다. 의심한 게 미안해질 정도다.

“예. 남녀 간의 그....”

그제야 내 말뜻을 확실히 깨달은 청하 교수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야쓰만 한 5번은 중얼거렸으니, 저런 반응도 이해가 갔다. 유니콘 신공의 판별에 의하면 청하 교수는 여전히 처녀였거든.

“그,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다시는 쓰지 않도록 하지요.”

“예. 되도록 그러는 게 나을 겁니다.”

암튼, 다소 뻘쭘한 기분이 되어 우리는 말 없이 계속해서 치킨만 입에 집어넣었다.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청하 교수를 향해 말했다.

“청하 교수님. 궁금한 게 있슴다.”

“예. 얼마든지요.”

“이대로 오키나와로 갔다 곧장 아카데미로 복귀합니까?”

“음, 그건 아니에요.”

청하 교수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조사 때문에?”

“그것보다는... 원래 일정에 가깝겠네요. 오히려 조사 때문에 어그러질 수도 있지만, 아마 어느 정도는 예정 따라갈 거에요.”

“원래 일정이라 함은?”

“무인도 평가 이후 고생한 생도들을 위해 휴식 시간을 주기로 되어있거든요. 깜짝 휴가 비슷한 느낌으로요. 오키나와까지 왔는데 그냥 가긴 아쉽잖아요?”

하긴, 21일간 신나게 굴리고 곧바로 아카데미로 복귀해서 필기 준비하라는 건 너무 가혹하긴 했다.

인간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기계도 그렇게 굴려 먹다간 고장 난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이 세계에서도 유명한 휴양지였다. 과거와 달리 이젠 안전이 엄청나게 중요해졌고, 미군이 개떼처럼 몰려있는 오키나와는 안전 면에선 나름 최상위권에 속했다.

당연히 휴양지 랭킹에서도 당당히 순위권에 들어있었다.

청하 교수가 잠시 한여름 방향을 슬쩍 곁눈질로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이었다. 한여름은 여전히 치킨을 볼에 잔뜩 넣고 우물거리느라 정신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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