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31)

[김무공 생도는 따로 일정이 있어요. 이따 찾아가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네요.]

[일정 말입니까? 누워있을 때 조사관들이 와서 증언은 다 끝낸 걸로 기억합니다만.]

[혈교 관련이 아니에요. 금지에 존재했던 구슬의 위험성은 아카데미에서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김무공 생도의 몸에 무슨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니까, 추가로 검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되도록 받아주셨으면 해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이 병원선은 국내 최고의 대학병원과 비교해도 시설이 전혀 밀리지 않아서 어지간한 검사는 다 가능했다.

하지만 혈도나 진기 관련된 부분은, 현대 의학과 다소 다른 영역이라 봐야 했다. 실제로 내 심장 언저리에 단단하게 뭉쳐있는 것의 정체는 CT를 찍든 뭘 하든 파악하지 못했다.

상념을 마치고 전음을 보냈다.

[받도록 하지요.]

[예. 천수신의天手神醫께서 무거운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손해 볼 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어요. 원래 김무공 생도의 몸도... 그렇고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무공 생도가 아니었으면 대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으니... 감사드려요. 그리고 무능한 교수라 죄송해요.]

침중한 안색으로 청하 교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피해자가 없었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아무튼, 일정 확정되면 다시 알려드릴게요. 편히 쉬세요.]

청하 교수가 뼛조각이 잔뜩 쌓인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드세요. 전 먼저 일어나 볼게요.”

그리고 머리를 까딱이고 떠나갔다.

대화를 나누다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어 나는 바로 상태창을 열었다. 왜 지금껏 확인해볼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스탯이 적힌 부분을 쳐다보자, 이전에 없던 특성이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화마정火魔精(-).

아마도 이것이 내가 흡수한 무언가의 이름인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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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정火魔精(-).

등급도 없고, 설명도 없었다. 오직 특성에 딱 저렇게 박혀있는 게 전부였다.

마魔가 붙은 거로 보아 그리 좋은 것 같진 않은데, 애초에 천마신공부터 내 몸 상태까지 정상인 구석이 없으니 이것도 나중에 어떻게 작용할지 예상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냥 마정도 아니고 불이 붙었으면, 또 양기란 얘긴데. 내면을 관조해 보니 심장 언저리에 별처럼 자리 잡은 그것은 여전히 고고하게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있었다.

‘위험하네.’

만일 이게 극양의 기운을 품고 있다면, 안 그래도 양기가 넘치는 내 몸 특성상 까딱했다간 뻥 하고 터져버릴 수도 있었다. 당연히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즉사다.

‘천수신의라 했나.’

얼핏 배경으로 들어본 것 같긴 했다. 천수신의 본인도 꽤 고강한 무인으로 유명했다. 그자가 어느 정도 해결책을 주길 바라는 수밖에.

“무슨 고민 있엉?”

어느새 치킨을 다 먹은 한여름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몸이 찌뿌둥해서.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웅냐.”

물티슈를 하나 건네고 일어나서 한여름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몸 안에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기분은 빈말로라도 유쾌하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지금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다.

***

항해는 순조롭게 끝나 마침내 오키나와에 다시 도착했다. 아카데미에서 미리 빌려놓은 호텔로 들어가니, 무인도 평가를 하러 떠나기 전에 맡겨놨던 짐들도 고스란히 있었다.

“어디 보자. 천하연, 김무공?”

한여름이 배정된 숙소의 명단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문제 있냐?”

“아니. 너랑 천하연 같은 방인데.”

“그게 왜?”

“...너 딴짓하면 혼난다.”

한여름이 팔짱을 끼고 눈을 흘겨댔다. 아하, 질투하시는 거고만. 짐짓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딴짓?”

“요즘 둘이 너무 친해 보여.”

“친구니까 친하지.”

“아니, 단순 그런 느낌이 아니라.”

“천하연 쟤가 나를 남자로 보겠냐?”

물론 남성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똑같았을 거다. 남체에 대한 궁금증이야 젊은 처녀라면 흔히 있으니까.

“보는 거 같은데.”

잠시 생각하던 한여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근거도 없이 남 음해하는 거 아니다.”

“아니. 근거 있는데.”

“떽. 여자의 감 이런 말 하면 혼난다.”

엄격하고도 근엄하게 내뱉었다.

“아니, 진짜...!”

한여름이 답답한 듯이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쳐댔다.

“뭠마. 근거 없쥬?”

내가 열심히 놀리자 한여름이 고개를 홱 돌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네 낯짝. 봐줄 만하니까.”

“딱히 모르겠는데. 그냥 내가 네 취향인 거 아닐까?”

“우와... 스스로 그런 소리 하면 안 부끄러워?”

질린 표정으로 한여름이 탄성을 내뱉었다.

“전혀. 내 취향도 너긴 한데. 아, 물론 외형만.”

사실 성격도 나름 귀여워서 싫진 않은데, 너무 사실대로 말하면 기고만장해질 수 있었다. 적당히 뭉개는 것도 필요한 법이지.

“시, 시끄럿. 암튼, 예린이도...!”

“예린이가 여기서 왜 나오냐.”

퍽-

“윽. 말로 하자 얌마.”

한여름의 주먹이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아직도 남아있는 부상으로 인해 몸의 감각이 둔해져서 가드에 실패했다. 게다가 얘도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공격이 정교해졌다. 역시 재능은 재능인가.

무武는 몰라도 싸움에 대한 오성만 놓고 보면 확실히 쟤가 더 낫다.

“몰라. 암튼, 천하연이 유혹한다고 넘어가면 안 된다? 호텔 방 안 분위기. 위험하잖아. 자연스럽게 실수할 수도 있어.”

“걔가 유혹을? 상상이 안 가는데.”

천하연이 유혹이라. 솔직히 위험하긴 했다. 과연 대놓고 유혹하는데 안 넘어갈 남자가 있을까? 물론 천하연이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걘 그냥 남장만 풀어도 유혹이야. 그 얼굴, 몸매. 전부 위험해.”

내 소매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며 한여름이 눈매를 치켜세웠다.

“그러지 말고 친하게 좀 지내라.”

한여름의 머리를 마구 헝클면서 타박했다. 남장만 풀어도 유혹이라는 말에는, 차마 반박이 힘들었다.

“으으읏...!”

한여름이 머리를 마구 흔들면서 내 손을 떨쳐냈다.

“친한데? 이건 친한 거랑 별개야. 친해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어.”

“별 희한한 전쟁도 다 있네.”

“암튼. 사고 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을 비슷하게 돌려받았다.

“나? 천하연이랑 생사결이 아니라?”

“천하연이 무슨 죄야. 네가 잘못한 거니까. 같이 죽자.”

“살벌한 얘기 하지 말고. 얼른 가봐라. 예린이 기다린다.”

저 멀리서 우리를 멀뚱멀뚱 응시하고 있는 서문예린이 시야에 들어왔다. 쟨 또 언제 여기왔담.

“어, 그러네. 이따 보자.”

“오냐.”

한여름과 헤어진 뒤 나도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왔나.”

“어. 왔다.”

천하연이 하얀 가운만 입고 침대 위에 앉아 머릿결을 정돈하고 있었다. 이미 샤워까지 마친듯했다. 당연히, 남장은 푼 상태였다.

‘...진짜 위험하긴 하네.’

무인도에서도 천하연은 뽀송뽀송 품위를 유지했지만, 반쯤 밀폐된 장소에서 풍기는 진한 목단향과 함께하니 파괴력이 훨씬 강해졌다.

자리에 저렇게 가만히 있어도 유혹하는 것과 비슷했다.

본능적으로 꽃에 꼬이는 벌이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가운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팔다리가 자꾸 시선을 자극했다. 나는 슬쩍 눈길을 피하면서 짐을 풀었다.

“몸은 이제 좀 괜찮나?”

“거의 괜찮아졌어. 아직 수련할 정도는 아니긴 한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큰 부상은 빨리 회복됐지만, 자잘한 부분이 남아있었다. 정타로 맞은 갈비뼈 인근이 아직도 종종 욱신거렸다.

이건 평범한 사람이라면 최소 한 달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할 부상이었다. 당연히 며칠 만에 편하게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비상식적인 회복력이 있어도, 완벽히 치유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다행이구나.”

“여기 천수신의 와있다고 하더라. 그분한테 검진받으면 확실해지겠지.”

“천수신의라... 그럼 굳이 신교로 갈 필요는 없겠구나.”

“응? 신교?”

갑작스레 나온 신교라는 말에 나는 천하연 쪽을 쳐다봤다.

“신교에는 생사마의生死魔醫라는 분이 계신다. 명성은 천수신의보다야 못하지만, 실력은 결코 모자라지 않는 분이지.”

“아하.”

“그대가 싸웠던 분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마기의 흔적으로 가득하더구나. 혹여 몸에 이상이 생겼을 수 있으니, 마의께 검진을 권유하려 했었다. 마기라면 우리 전문이니.”

...마의한테 검진받으면 마공 익혔다는 것도 들키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싹텄다. 독고패조차 내가 익힌 무공에 관해선 제대로 파악을 못 했지만, 천하연의 말대로 마기 전문이라면 또 다르지 않을까 싶다.

“천수신의 정도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아마도. 정종 무공을 익힌 그대에게는 천수신의 쪽이 더 맞을 가능성이 높구나.”

내가 익힌 건 정종 무공이 아닌데 말이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천하연에겐 딱히 말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혹시, 화마정이라고 알고 있어?”

일단은 보류하고, 대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화마정이라... 들어본 적 없구나. 비슷한 건 알고 있지만.”

“비슷한 거?”

“빙정氷精. 극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절세의 보물이지.”

“그거 실제로 있는 거였어?”

빙정에 관해선 게임 내에서 들어본 적은 있었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북해빙궁의 보물이라든지. 비록 소문만 무성했고,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설마 천하연의 입에서 빙정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대에게라면 말해도 상관없겠구나. 빙정은 실존하며, 현재 신교에서 엄중히 보관 중이다. 직접 본 적도 있어. 말도 안 되는 물건이었지.”

“....”

신교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슨 까도 까도 끝이 없다. 신교 지하에 이족보행 거대술법병기가 있다 해도 이젠 믿을 것 같아.

“다만, 화‘마’정이라면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니겠구나. 빙정만 해도 그 위험성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자가 극히 제한되었으니. 화마정은 왜 묻는 거지?”

“...내 몸속에 틀어박힌 거 같거든.”

“화마정이 말인가?”

천하연이 빗을 내려놓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 언저리에 느껴져.”

“...잠시 봐도 되겠나?”

“응.”

“이리로.”

자신의 침대 앞을 팡팡 치며 천하연이 말했다. 순순히 천하연의 정면에 가서 앉았다.

“상의를 벗어보겠나?”

가운만 입은 천하연의 앞에서 상의를 벗으려니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일말의 도움이라도 지금 내겐 필요했다.

상의를 벗고 다시 천하연과 정면에서 마주 봤다. 천하연이 눈을 살짝 피했다.

“...날 그렇게 보지 말고, 반대로.”

나는 천하연의 지시대로 등을 돌렸다.

“진기를 가라앉히고, 거부하지 마라.”

가부좌를 하고 차분하게 내면을 관조하고 있으니, 천하연의 두 손바닥이 내 등 뒤에 닿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내 혈도를 타고 천하연의 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마신공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천하연의 진기를 잡아먹으려 시도했지만, 강제로 차단했다. 마치 길을 안내하듯, 천하연의 진기를 심장 언저리까지 인도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만일 천하연이 나를 죽이려 마음먹었으면 당장이라도 가능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고, 천하연은 별처럼 은은하게 회전하는 화마정 근처로 진기를 계속해서 보냈다.

탐색하듯 조심스럽게 천하연의 진기가 화마정을 감쌌다. 내가 시도했던 것처럼 처음에는 화마정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천하연이 진기로 툭 건드리는 순간, 포악한 기세가 화마정에서 일어났다. 지독한 마기가 천하연의 진기와 씨름하면서 날뛰었다.

“크윽...!”

이런 사태는 천하연조차 예상 못 했는지, 등 뒤에서 신음성이 들려왔다.

결국, 천하연이 먼저 진기를 거두기 시작했다. 천하연의 진기가 물러나자 살기등등한 마기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나는 내면을 관조했던 걸 멈추고, 감았던 눈을 떴다.

“괜찮아?”

뒤를 돌아보니 천하연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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