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31)

“하아... 참으로 지독한 힘이로구나.”

“내가 건드렸을 땐 반응도 없던데.”

“신의에게 꼭 말하는 게 낫겠어. 그건, 지금의 내 경지로도 도저히 제어가 불가능한 수준이야.”

“그 정도야?”

“그래.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그대로 두기엔 너무 위험해.”

천하연이 깊은 침음을 흘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똑똑.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무공! 안에 있어?”

한여름의 목소리였다.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나가려다가, 방안의 모습을 보고 등줄기에 한기가 내달렸다.

가운만 입은 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헐떡이면서 땀에 젖어있는 천하연.

상의를 탈의한 내 모습.

...이거 누가 봐도 오해할만하지 않나?

다음화 보기

“잠시 씻는 척 좀 해줄 수 있냐?”

상의를 입으며 천하연에게 슬쩍 물었다. 자신의 몸 아래를 힐긋 쳐다본 천하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좀 닦긴 해야겠구나.”

“샤워 막 한 거 같은데 미안해.”

“괜찮다.”

천하연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욕실에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는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수상한데.”

잠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한여름이 꿍얼거렸다.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냄새가 나, 냄새가. 뭐 하고 있었어?”

“운기조식 중이었다. 확인해볼 게 있어서.”

“엥, 그래? 천하연은 어딨어?”

방 안으로 들어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한여름이 말했다.

“화장실에 있는 거 같은데. 눈 떠보니까 없더라.”

위기 상황을 감지하니 청산유수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괜히 오해받는 것보단 낫지.

쏴아아-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씻나 보네. 씻고 뭐 할 생각 아니었지?”

“넌 그놈의 음란마귀 좀 어떻게 좀 해라. 하긴 뭘 해.”

“이건 농담이었거든.”

농담은 무슨.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게, 전혀 농담 같지가 않았다.

“암튼, 뭔 일로 왔냐?”

“아 맞다. 청하 교수님이 부르시던데. 방금 마주쳤거든. 아래로 내려오래.”

“너도 같이?”

“응. 나도 같이.”

“잠시만. 옷 좀 갈아입고.”

“웅냐.”

빠르게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천하연에게 말을 한 뒤,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 신의 관련된 일 때문이겠지. 한여름까지 같이 부른 건 조금 의외였지만, 이것도 일종의 배려 아닐까 싶다.

“어서 오세요.”

근처로 다가가자 머리에 매화 모양 장식을 하고, 하늘거리는 궁장을 입은 청하 교수가 나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이긴 하다.

“신의께 가는 겁니까?”

“예. 조금 갑작스러운데 괜찮겠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사건 수습 때문인지 아카데미에서도 생도들에게 자유시간을 꽤 많이 부여해줬다.

**

천수의원.

천수신의가 수장으로 있는 다국적 의료기관이었다.

전문 분야는 무인 치료 관련.

현대의학의 강력한 신봉자인 내 입장에서 이런 동양의학은 현실이었다면 불신 대상이었지만.

이미 동양의 신비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기에 이곳에서는 정반대였다.

불신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상징이라는 말이지.

천수의원은 다국적 의료기관답게 곳곳에 분원을 두었는데, 오키나와도 그중 하나에 해당했다.

고전적인 동양풍의 장원을 생각했던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온갖 현대적인 건물로 가득한 장소였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앰뷸런스까지 있는 걸 보니 뭔가 환상이 와장창 깨진 느낌이다.

하긴, 현대에서도 한방병원은 요즘 이런 느낌이니까.

우리는 따로 마련된 별관 같은 곳으로 향했다.

“그냥 병원 같네.”

한여름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실제로 3차 병원 역할도 겸하고 있지요. 무인들만 봐서는 운영이 안 되니까요.”

청하 교수가 나직하게 설명했다. 지식이 늘었다.

의원의 이름을 단 3차 병원이라니.

역시 동양의 신비. 벌써 일반적이지 않았다.

내부에서 대기하자, 안쪽으로 홀로 들어갔었던 청하 교수가 나왔다.

“김무공 생도부터 들어가시면 되어요.”

“저쪽으로 말입니까?”

“예.”

일자로 된 복도를 따라 쭉 가자 엄청나게 넓은 검진실이 나왔다. 그리고 검진실 안쪽에서 매서운 눈매를 가진 노인이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마치 내 모든 걸 파악하겠다는 듯이.

‘고수다.’

최소 초절정. 아마도 정확한 경지는 화경.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은 새하얀 백의 노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십니까. 중원무공아카데미 1학년 생도, 김무공입니다.”

나는 예의를 차려서 포권했다. 보조 하나 없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천수신의가 확실했다.

“네가 누군진 알고 있으니 인사는 됐다. 와서 누워라. 상의는 탈의하고.”

천수신의가 진찰대를 턱짓했다. 나는 순순히 가서 상의를 벗고 누웠다.

“태양지체라고?”

“예.”

“진맥을 할 터이니 거부하지 마라.”

내 손목을 잡고 천수신의가 진기를 흘려보냈다. 천하연이 했던 방식과 비슷하지만, 이쪽은 좀 더 편안한 느낌이었다. 애초에 무공 자체가 그런 건지.

게다가 신체 내부를 훑는 속도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천마신공이 날뛰려고 했지만, 단전에 진기를 갈무리해 아예 강제로 가둬버렸다.

눈을 감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천수신의가 들이밀었던 진기를 다시 거둬갔다.

“....”

그러곤 한동안 빤히 나를 쳐다보던 천수신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해주랴?”

“예.”

“네 녀석, 오래 살긴 힘들겠다. 이번에 입은 부상은 거의 회복됐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태양지체 때문입니까?”

다짜고짜 시한부 수준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생각보다는 마음이 차분했다. 어차피 이미 각오하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양심출타 특성 때문인가.

“단순히 태양지체 때문이라면 괜찮다. 보아하니 월음지체도 붙어 다니던데. 음양합일이더냐?”

“...예.”

조금 민망한 얘기였지만, 어차피 상대는 세계 최고의 의사 중 한 명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겠지.

“인간의 몸에 상중하단전이 있는 건 알고 있을 거다.”

“알고 있습니다.”

상단전은 뇌, 중단전은 심장, 하단전은 배꼽 언저리라 보면 된다.

“그것들은 그릇이라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병에 가깝다. 용량이 넘치는데도 꾸역꾸역 무언가를 집어넣으면, 당연히 금이 가고 깨질 수밖에 없지.”

“양기는 최대한 해소하고 있습니다만.”

“양기 얘기가 아니다. 네 녀석이 대체 뭘 익힌 건지 모르겠다만. 하단전은 이미 태양지체의 막대한 양기를 버티느라 한계에 가깝고, 백회 인근에도 뭔가 들어있더군. 게다가 중단전도. 네 녀석처럼 한 몸에 이것저것 많이 담고 있는 놈은 처음 봤다.”

백회 인근이라면. 몇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무혼이 가장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특성 중 하나든가. 무혼이든 뭐든, 특성의 영역조차 감지할 줄은 몰랐다. 중단전은 당연히 화마정이고.

“오히려 태양지체를 타고난 게 네 녀석으로선 천운이었다. 막대한 양기를 버티려면 필연적으로 혈도를 비롯한 신체가 강인해야 하니까. 평범한 몸이었다면 진즉 위험했을 거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분명 내부를 관조했을 때 별문제는 없었습니다만.”

“당장은 안 보이겠지. 밀어내려 하지 마라.”

천수신의가 뒤쪽에서 침통을 꺼내왔다. 가볍게 손짓하자, 누워있는 내 몸 위로 황금빛 침이 날아와 빼곡히 박히기 시작했다. 허공섭물을 이용한 기예였다.

보기 무서울 정도로, 상당히 깊게 박힌 침도 있는데 고통은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경로를 따라 진기를 인도해라. 집중하거라. 입은 열지 말고 대답은 하지 않아도 된다. 기해, 회음, 미려, 명문, 협척....”

소주천을 하듯 나는 천수신의의 말대로 진기를 순환시켰다. 무아지경에 가깝게 한동안 계속해서 진기를 돌리다 보니, 어느 순간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나는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잘 하고 있다. 겉을 관조한다는 느낌으로, 진기가 순환하는 혈도를 주시해라.”

파직- 순간 번갯불 튀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

나는 즉시 진기를 인도하는 걸 멈췄다. 금침이 다시 허공을 날아 통으로 들어갔다. 통증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봤느냐?”

“...예. 봤습니다.”

마지막에 본 건, 실금이 가득한 내 몸이었다.

“방금 썼던 잠령금침대법潛靈金針大法에 부작용은 없으니 걱정하진 말고. 네 몸 상태를 조금 쉽게 보여준 것뿐이다.”

“예.”

“직접 봤으니 알겠지만, 네 몸은 잠력을 몇 번씩 격발시킨 이후의 상태와 비슷하다.”

잠력 격발.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경지보다 높은 힘을 자주 다룬 적 있습니다. 영향이 있겠습니까?”

“흡성대법은 아닌 거 같고. 뭔지는 묻지 않으마. 당연히 영향이 있다.”

협인지로와 유니콘 신공.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었다. 쓰면서도 의문이 들긴 했다. 내공을 제외하면 이류에 불과한 몸을 화경에 근접할 정도로 강화시켜버리는데, 이런 막대한 힘을 다루면서 아무런 부작용이 없을까. 진정 대가 없는 힘인가.

그 대답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화마정 해결하러 왔다가 이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저것들은 내 ‘의지’대로 발동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저게 필요한 상황에선 어차피 쓰지 않으면 내가 죽었다.

원망할 처지도 못 된다는 얘기였다.

“한동안은 계속 비슷한 행위를 한다 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다. 아까도 말했듯이 태양지체의 강인한 신체 능력 덕이지. 다만, 이건 시한폭탄이다. 언제든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대체 몸에 시한폭탄을 몇 개나 달고 사는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해결 방법이 있습니까?”

“경지보다 높은 힘을 자주 다뤘다 했나? 이런 부작용이 발생할 정도면 그냥 높은 힘이 아니었겠지. 네 경지에서 ‘절대’ 다루지 못해야 할 힘을 다뤘을 것이다. 맞더냐?”

“예. 정확하십니다.”

괜히 신의가 아니었다. 협인지로든 유니콘 신공이든 하나도 말하지 않았는데 정확히 짚어냈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문제는 간극이니, 간극을 줄이면 그만이지. 경지를 높이거라. 화경에 도달한다면 환골탈태를 겪게 될 것이고, 네 몸은 강대한 힘에 적응하게 바뀔 것이다. 아마 일반적인 화경보다도 훨씬 강대한 육체를 얻게 되겠지. 태양지체에 관해선 나도 잘 모르겠다만, 거의 확실하다.”

말이 쉽지. 화경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천하연조차 아직 화경의 벽을 넘지 못했다.

화경이란 하늘이 내리는 경지였고, 시스템에 무혼에 온갖 보정을 떡칠한 나로서도 아직 요원했다.

“...중단전에 있는 건 화마정이라 합니다. 마기와 화기를 둘 다 품고 있는 물건인데, 이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건 일단 됐고, 여기 찾아온 본론을 물었다.

“모른다.”

“예?”

“그건 내 전문이 아니다. 마가 놈한테 가거라.”

“마가라면... 설마 생사마의를 얘기하시는 겁니까?”

“그래. 얘기는 해 놓으마. 신교에 들어가는 건 알아서 하고.”

“그건... 문제없을 거 같습니다.”

천하연의 초대도 받았겠다, 여름 방학 때 신교에 들를 예정이긴 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이유가 하나 추가될 줄이야.

“이만 나가 보아라. 큰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래. 무운을 비마.”

포권을 하고 나가기 전,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어서 중간에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