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 상태는 한여름 생도에게 비밀로 해줬으면 합니다.”
지그시 나를 쳐다보던 천수신의가 입을 열었다.
“노부는 의사니라.”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진료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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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어.”
잠시 대기하고 있으니, 나 다음으로 들어가 진료를 끝낸 한여름이 다가왔다.
“뭐라고 하셨어?”
“큰 문제는 없대. 지금처럼 잘 해소해주면 된다나... 넌 뭐라 하셨어?”
머리끝을 빙빙 돌리며 한여름이 말했다. 다행히 나처럼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은 듯했다.
“나도 몸 관리만 잘 하라고 하시던데.”
당분간 내 몸 상태는 한여름에겐 비밀이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알려서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다행이당.”
배시시 웃으며 한여름이 내 옆에 앉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두 분은 이제 자유 시간 보내시면 되어요. 전 신의께 가봐야 해서. 그럼 이만.”
청하 교수가 등을 돌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냐? 바다나 갈래? 수영하러 간 애들 있던데.”
“바다 그만 보고 싶은데. 더운 건 이제 싫어.”
한여름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배죽였다. 하긴, 무인도에서 바다라면 지겹게 봐서 그런가. 이제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바다를 봐도 별 감흥이 없어졌다.
애초에 풍경 자체는 적도 근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무인도가 압도적이었다.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종종 노을이 내려앉은 바닷가 전경이 떠오르곤 했다.
여기 뻘쭘하게 앉아있는 것도 좀 그러니, 병원 안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이거 봐봐.”
한여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곳에는 ‘영웅들께 감사합니다. 무운을.’이라는 말이 한국어로 적혀있었다. 손수 그린 귀여운 그림도 함께였다.
“아카데미 생도인 거 너무 티 냈나.”
원칙상 외부 활동을 할 땐 교복을 입게 되어있어 입은 거긴 한데, 아무래도 직원 중에서 우리가 아카데미 생도인 걸 알아본 사람이 있는듯했다.
“그래도 기분 좋잖아. 이러니까 교복 입고 다니라 한 거 아냐? 사람들의 반응에서 막중한 책임감과 뽕을 느끼라고.”
“뽕은 무슨. 일본까지 와서.”
“말에 낭만이 없네.”
“낭만이 밥 먹여주냐.”
“근데 말야. 그거 알아?”
한여름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상당히 묘한 눈빛이었다.
“뭘?”
“너 말이랑 행동 진짜 따로 노는 거.”
“내가?”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척은 다 하면서, 막상 목숨 걸고 남의 일에 뛰어들잖아.”
“나름 철저하게 계산한 것이다만.”
한숨을 푹 내쉬면서, 한여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쭈욱 들이켰다.
“그 계산에 네 목숨을 넣은 적 있어?”
“....”
대뜸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한여름이 눈매를 치켜세우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봐. 자각이 없다니까. 저울추에 자신의 목숨을 올리는 순간, 그게 어느 쪽으로 기울겠어? 애초에 목숨을 내던지는 순간, 계산이라는 게 성립이 안 되는 문제야.”
“딱히 목숨을 걸진 않았다만.”
“거짓말.”
“조금은 걸었지.”
정정했다. 아예 안 걸었다면 거짓말이지. 애써 무시했을 뿐.
“나는 네가 협객 같은 거 안 됐으면 좋겠어.”
“그런 거창한 거 될 생각 없으니 걱정 말어.”
내게 협이란 강해지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따로 협객 같은 걸 추구하지도 않았다.
잠시 빨대를 잘근잘근 씹던 한여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너무 주제넘은 말이었네.”
“근데 너 왜 이리 똑똑해졌냐? 백회혈에 침이라도 맞았어?”
“시끄러.”
한여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다소 강하게 헝클어트렸다.
“미안하다.”
“아냐, 괜히 분위기 초 쳐서 미안.”
“어디 갈 데나 찾읍시다. 카페에만 있긴 아깝잖어.”
“웅.”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언제 무거운 대화를 나눴냐는 듯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면서 갈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 세계 오키나와도 크게 뭐 다를 건 없었다.
“대부분 바닷가 관광지네.”
“나름 휴양지니까 그렇지.”
“어, 나 여기 가보고 싶어.”
한여름이 스마트폰 화면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추라우미 수족관.
한때 세계 최고를 다툰 적 있었던, 일본 최대 규모의 수족관이었다.
***
수족관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안전한 지역이라 그런지, 이곳만 보면 게이트 사태가 발생한 세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부모님의 손을 꼭 붙잡은 어린아이들이 많아 보였다.
“중원무공아카데미 생도분들은 그냥 들어가시면 됩니다.”
티켓을 끊기 위해 긴 줄에 서려고 하자, 분주하게 주변을 안내하던 일본인 직원이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아카데미 학생증을 확인받고, 우리는 줄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품는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카데미는 한국에 있는데도 일본까지 영향력이 있나 봐.”
“무림전기가 국뽕 게임이라 한국이 무인 양성의 메카 같은 느낌이라 그래. 중원무공아카데미는 그중에서도 최고고.”
“하긴, 게임 할 때도 그런 것 같더라.”
시작은 열대 바다의 산호가 다양하게 자라고 있는 전시관이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아쿠아리움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직접 만질 수 있는 불가사리 등이 있는 장소 앞에 꼬마애들이 몰려있었다.
애들 사이를 지나서 아름다운 산호초가 있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예쁘다. 나 사진.”
마치 그림을 보는듯한, 정교한 산호 사이로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지나다녔다. 한여름이 그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찍는다.”
“웅냐.”
연타로 무작정 찍은 다음 한여름에게 폰을 건넸다.
“나쁘지 않네.”
고개를 한번 끄덕인 한여름이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좋냐?”
“웅. 나 예전부터 수족관 가보고 싶었거든.”
“다음에 또 오자.”
“그럼 좋지.”
갑각류부터 시작해서 신비한 빛을 내뿜는 해파리, 온갖 기괴한 생물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드넓은 장소에 도착했다. 어둑어둑한 조명 너머로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조 내부로 빛이 은은하게 내리쬐면서 신비로움을 더했다.
설명을 보니, 쿠로시오의 바다라는 초대형 수조였다.
“우와....”
한여름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아크릴 수조 너머를 응시했다. 특히 커다란 고래상어가 지나갈 때는, 주변의 사람들조차 탄성을 내질렀다.
“저게 상어야?”
“그렇다던데.”
“고랜줄 알았네.”
심지어 한 마리도 아니고 고래상어 세 마리가 온갖 물고기 떼와 거대 가오리 사이를 지나다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어지간한 고래보다 클걸?”
“그런 듯. 잠깐 구경하다 가자.”
우리는 가장 뒤쪽에 있는 의자로 가 앉았다. 앞쪽에서 사진을 찍기엔 사람들이 너무 몰려있었다.
“야야, 저기.”
한여름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가니, 스쿠버 장비를 착용한 직원이 수족관 내부에서 고래상어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딱히 의도하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먹이 주는 시간에 맞춰서 우리가 도착한 모양이다. 한여름이 내 옆에 딱 붙어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근데 말이다.”
수조에서 나오는 은은한 청광이 우리를 비췄다.
그래서 그런가, 새삼스레 감상적이 되는 느낌이다.
“응?”
“혹시 내가 죽어도 넌 살아라.”
“왜 그런 얘기를 해?”
한여름이 머리로 내 어깨를 톡 쳤다.
“그냥. 사람 일 모르는 거잖냐.”
“싫어. 네가 없는데 어떻게 살아?”
“...그거 꼭 고백 같은데.”
고개를 살짝 돌려서 한여름이 말없이 날 쳐다봤다.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리곤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모르는 척이다.
이전까진 모호했던 감정 역시, 어느 정도는 정리됐다.
한여름은 나를 좋아한다. 그리고 아마 나 역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들이 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한여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유가 대체 뭐야? 굳이 확답을 주지 않는 이유.”
탓하기보단,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말투였다. 이번 역시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결국, 한여름이 먼저 원망 섞인 말을 꺼냈다.
“넌 진짜 못된 놈이야.”
한여름의 우려와 다르게, 나는 협객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앞으로 목숨을 걸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궁창 같은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둘 중 누군가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한여름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싫다.
쟤가 비교적 안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선 누군가는 앞장서서 장애물을 치워야 했다.
그러니까 결국,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내가 거는 수밖에 없다.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는 법이니.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확답을 주지 않는 이유.
간단했다. 두려우니까.
여기서 더 나아갔다가 내가 죽기라도 하면.
그냥, 그게 두려웠다.
죽어서까지 쟤한테 너무 큰 짐이 될까 봐.
한여름 쪽으로 몸을 틀어서 정면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어스레한 조명 아래서, 한여름이 울 듯 말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하다.”
“가끔 너 이러는 거, 진짜 싫어.”
차갑게 내뱉은 한여름의 말에,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러자 톡.
기습적으로, 입술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살포시 닿았다.
우리는 가벼운 키스를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사이에서, 우리 주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고작 십여 초도 되지 않는 짧은 키스.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래도.”
감았던 눈을 뜨자, 한여름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것 이상으로, 네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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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멍청이.’
한여름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번 이런 식이다.
김무공과 부대끼며 산 지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무슨 생각으로 김무공이 저런 말을 하는지, 한여름은 알고 있었다.
매번 구박받지만, 한여름은 바보가 아니다.
사람을 통찰하는 데 있어선 오히려 꽤 예리한 편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말려봐야, 김무공은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자기 파멸적인 행위를 멈추지 않을 거다.
한여름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목숨을 걸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고결한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