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31)

말은 좋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단한 의인이지만,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람에겐 저주와 다를 게 없다.

그게 설사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해도.

어떻게 마냥 기뻐만 할 수 있을까.

“나....”

“쉿.”

무거운 낯빛으로 입을 열려던 김무공의 입술에 검지를 대서 막았다. 어떤 대답이든, 지금은 억지로 짜내서 하는 말이 나올 거다.

“나중에, 정리되면.”

살짝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한여름은 나직하게 내뱉었다. 김무공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자.”

먼저 자리를 털고 한여름이 일어섰다. 아까보다는 훨씬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세상엔 말로 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다.

그리고 굳이 말로 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비록 당장의 대답은 거부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니 훨씬 편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김무공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면, 결론은 정해져 있다.

‘무력이 필요해.’

압도적인 무력이.

설사 김무공이 대책 없이 폭주하더라도 옆에서 강제로 틀어막을 수 있는 무력 말이다.

김무공의 손을 꼭 붙잡고, 한여름은 홀로 조용히 각오를 마쳤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오키나와에서 복귀한 뒤.

여느 때처럼 수련과 공부를 하고.

마침내 필기 평가까지 끝마쳤다.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수련에 치중하느라 필기는 벼락치기로 공부했더니 확실히 최상위권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무인도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만족할만한 수준은 거뒀다.

정확한 성적이야 여백으로 남겨두기로 하자.

그렇게, 우리는 여름 방학을 맞이했다.

“천마신교라니.”

한여름이 손거울을 보며 립밤을 발랐다. 긴장한 탓에 입술이 건조해진 모양이다.

“뭘 그리 긴장하고 그러냐.”

“이 세계에선 처음이잖아.”

“어차피 우리 뒷배가 천하연인데 뭐.”

“글킨 한데, 신교가 보통 장소는 아니잖아?”

“그건 글치.”

침식대응 특별자치도 제주.

이 세계 대한민국에서 지정한 제주의 공식 명칭이었다.

왜 앞에 침식대응이 붙었냐 하면, 간단했다.

천마신교의 총본산이 제주에 있었으니까.

그게 뭐? 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천마신교는 절대 일반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비록 10년 전이지만, 이 시점에서도 제주는 이미 천마신교의 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섬 하나 가지고 무슨 제국이야 할 수 있겠지만, 천마신교는 아예 ‘해외 영토’를 공식적으로 보유 중이다.

그것도 한반도보다 훨씬 넓은.

용도는 당연히 군사기지.

세계의 수많은 국가는 천마신교에 영토를 할양하고, 대신 안보를 지원받았다.

작금의 천마신교는 게이트 사태와 세계침식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국가보다 강한 집단. 단일세력 최강이란 명칭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준비는 됐나?”

천하연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리야 끝났지.”

짐이 잔뜩 담긴 캐리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마도 이번에 가면 여름 방학 내내 제주도에 머물 가능성이 컸다.

천마신교에 갈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닌데, 볼일만 보고 후다닥 다녀오기엔 너무 아쉬웠다. 머물 수 있을 때까진 머물러야지.

“그럼 가자꾸나.”

천하연의 뒤쪽으로 기척도 없이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그중에 일부가 나를 보며 머리를 살짝 까딱였다. 흡혈귀 사건 때 봤던 무흔마영이었다. 나도 똑같이 고개를 숙여 응대했다.

[아는 사람들이야?]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소교주 직속 수신위, 마영수라대 무흔마영.]

[아, 저 사람들이?]

[오냐.]

[어쩐지 강해 보이드라.]

우리는 천마신교에서 보낸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성남 제25특수임무비행단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이 아니라 여기야?]

[그런가 본데.]

일정은 전적으로 천하연에게 맡겨놨기에, 정확한 건 나도 몰랐다.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면서 우리는 활주로 안까지 쭉 들어갔다.

[신교가 대한민국 정부랑도 관련이 있었어? 마교 아냐?]

[마교는 정파에서 부르는 멸칭이고.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선 그냥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같은 조폭 깡패들로 보이지. 현대 와서 신교가 민간인 건들면서 깽판 치고 다니진 않으니까.]

압도적인 무력 때문에 통제도 불가능한 조폭들.

그렇다고 또 없어선 안 될 존재들이었다.

게이트 사태를 막고, 통제를 벗어난 무인들을 잡아들이려면 다른 무인의 협조가 필수였으니까.

[그렇겠네. 어차피 정파랑 신교도 불가침 맺었으니까.]

[오냐. 그래도 군 공항까지 마음대로 이용할 줄은 몰랐다만.]

우리는 전에도 봤던 활주로 근처에 내려섰다.

북한을 향할 때 탄 ZV-22가 주기 되어있던 활주로에는, 신교를 상징하는 검은색으로 일부가 칠해진 거대한 비행기가 있었다.

무흔마영의 안내를 받아 자연스럽게 비행기에 탑승했다.

“우와....”

한여름이 내부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카데미 전용기도 화려하긴 화려했지만, 이건 아예 차원이 달랐다.

“이거 진짜 금이야?”

내부에 존재하는 황금빛 장식물을 보며, 한여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연히 진짜 금입니다.”

대답은 바로 뒤쪽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파인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검은색 정장이 인상적인 노신사였다.

“오랜만입니다. 노야.”

천하연이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나와 한여름 역시 자연스럽게 노인을 보며 포권했다. 천하연이 ‘노야’라고 부를 정도면 절대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에, 고수다.

그것도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수준의.

화경은 무조건 확정이고, 현경일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런 고수가 직접 마중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허허, 노야라니요. 이젠 소교주께서도 약관이신데, 말 편하게 하시지요.”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쪽은 미리 말했듯이 김무공, 한여름 생도입니다.”

“소교주께서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반갑습니다. 단천상입니다.”

단천상. 이름만 들어선 잘 기억나지 않았다.

“노야께서 신교의 태상호법이시다.”

천하연이 부연설명 했다. 왜 기억이 안 나나 했더니, 그럴 만도 했다. 태상호법이면 전대의 인물이었다.

10년 이후 시점에서는 심지어 ‘현 교주’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꽤 됐었으니.

당연히 태상호법의 이름은 듣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이름일 뿐입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앉으시지요.”

단천상이 가운데 있는 넓은 테이블을 향해 손짓했다.

자리에 앉자 비행기가 곧바로 이륙했다.

탑승한 사람이 전부 무인들이라 그런지 이륙 과정에서도 안전벨트를 강요한다든지 하는 절차는 따로 없었다.

아니면 신교가 그냥 터프한 것일지도.

“못 본 사이에 헌앙해지셨군요.”

단천상이 흡족한 얼굴로 천하연을 쳐다봤다. 장성한 손주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했다.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설마 노야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지... 교주님의 부탁이셨습니까?”

“허허, 소교주께서 오신다기에 직접 요청했습니다. 장로원에서 늙은이들만 보다 보니 좀이 쑤셔서 말입니다. 다들 어디가 아프다, 어디가 아프다. 늙으면 죽어야지, 몇십 년은 거뜬할 양반들이 이런 우는소리 하는 거 들어주기도 지겹고 말입니다.”

“다들 건강하신가 보군요. 다행입니다.”

천하연이 입가를 가리고 후훗 웃었다. 남자의 모습이긴 한데, 쟤가 저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싶다.

“소교주님을 뵌 지 1년 좀 넘었었지요? 그 사이에 별일이야 있었겠습니까.”

“예. 폐관이 끝난 직후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니까요. 어르신들은 뵙고 갔어야 했는데, 교주님의 명이라....”

“괜찮습니다. 어차피 늙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마련입니다. 장로원 늙은이들에겐 1년이 하루 같았을 겁니다.”

“그랬으면 다행입니다만.”

“그나저나.”

단천상의 시선이 한여름과 내 쪽으로 향했다. 순간이지만 날카로운 빛이 단천상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흐음... 실례지만 두 분은 사문이 어떻게 되십니까?”

“따로 없습니다. 무공은 독학으로 익혀서.”

“허어... 독학이라니...! 소교주께서 괜히 관심을 가진 게 아니었군요.”

“혹, 교주께 들은 얘기 있으십니까?”

천하연이 무거운 음색으로 넌지시 여쭈었다. 단천상이 팔짱을 끼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딱히 없습니다만. 무슨 일 있으십니까?”

“교주께서 두 생도에 관심을 가지는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흐음....”

갑자기 단천상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상당히 미묘한 시선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허허허,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천상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최소 화경, 최대 현경의 어르신에게 똑바로 말하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속으로 의문을 삼킬 수밖에.

승무원이 내준 음료를 홀짝이고 있으니, 아래쪽으로 제주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위에서 보면 이렇게 생겼구나.]

한여름이 입을 반쯤 벌리고 창밖에 펼쳐진 제주의 전경을 살펴봤다. 이건 나도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단일세력으로는 세계 최강의 무력집단 천마신교.

그 말인즉슨.

내가 살던 현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PMC(민간 군사 기업)라는 말도 됐다.

서울이 현대보다 고층 건물이 흔히 보일 정도로 발전했다면.

제주는 섬 자체가 아예 달라졌다.

평화로운 휴양지.

아름다운 섬.

그런 모습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구에서 가장 철저하게 요새화된 장소가 이 세계에서의 제주였다.

아마 10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의 숫자로만 따지면 서울보다도 훨씬 많지 않을까.

그만큼 아래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이질감이 심했다.

“슬슬 도착이군요.”

단천상이 뒷짐을 지고 일어섰다. 비행기가 하강하는 와중인데도, 단천상의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윽고 온갖 건물로 뒤덮인 한라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며.

마침내, 우리는 천마신교天魔神敎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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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나가시지요.”

단천상의 말과 함께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계단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붉은 카펫이 길게 깔린 좌우로는, 백 명 정도의 흑의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쿵. 천하연이 내리는 것에 맞춰서, 흑의인들이 절도있게 검을 한번 땅에 내려찍었다. 그리고 동시에 외치기 시작했다.

“천마현세天魔現世, 만마앙복萬魔仰伏! 마영수라대 전원, 소교주를 뵙습니다!”

절정 고수 백여 명이 내공까지 써서 외치는 소리에 비행장 전체가 울리는듯했다.

우리는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레드 카펫의 끝에서 마영수라대주가 직접 운전하는 리무진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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