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묵묵히 천위강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소교주,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천산신녀공이 대체 무어길래 그러십니까?”
딱딱. 책상을 두드리던 천위강의 시선이 우리 둘 쪽으로 다시 향했다.
“사문이 없다 하였나?”
“예.”
나는 순순히 답했다. 없는 건 맞았으니까.
“활로를 열어주지. 입교해라.”
다음으로 이어진 말은, 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다짜고짜 입교라니. 일순 머릿속에 온갖 계산이 오갔다.
활로. ‘살길’이라는 걸로 보아, 입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도 섞여 있었다.
“교주님! 이들은 제 친우입니다.”
천하연도 말뜻을 인지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가 사사로운 정 따위를 신경 써야 하나?”
“아버지...!”
“시끄럽다.”
차가운 말투로 천위강이 천하연의 말을 묵살했다.
“연유를 듣고 싶습니다.”
“입교하면 알려주도록 하겠다.”
쯧. 이건 내가 아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설마 나도 아니고, 한여름이 익힌 무공만 듣고 천위강의 발작 버튼이 눌려버릴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는가.
“입교하면, 강해질 수 있나요?”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한여름이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천위강의 압박감이 사방을 짓누르고 있음에도, 놀랍도록 차분한 태도였다. 얘가 이 정도로 담대했나 싶다.
천위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강함이라는 게 단순한 무력을 얘기하는 거라면. 너는 능히 천하제일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옆에 천고의 기재인 천하연이 있음에도, 천위강의 말은 단호했다. 한여름이 천하제일을 노릴 수 있다? 대체 뭘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나름 고인물이라 자부하는 나조차 이해가 힘들었다. 실제로 천하연도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입교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한여름이 다짜고짜 내뱉었다.
[얌마, 상의도 하지 않고 왜 급발진이야.]
내 말은 가볍게 무시당했다. 대체 뭐에 꽂힌 건진 모르겠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말해보도록.”
당돌한 한여름의 태도에, 천위강은 오히려 짐짓 유쾌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제자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천하연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이런 미친.
다짜고짜 내뱉은 한여름의 말에 나도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무래도 얘가 무림에서의 ‘제자’가 가지는 의미를 잘 모르는듯했다.
“제자? 본좌의 제자 말이냐?”
“예.”
“재밌구나. 허나 불가하다.”
역시나, 단호한 거절이 이어졌다. 그럼 그렇지. 천마의 제자라는 건 사실상 소교주와 거의 동등한 위치라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계승권을 따로 주진 않겠지만.
“어째서입니까?”
한여름이 바로 반문했다. 저놈의 돌진 성향. 내가 언제 사고 한 번 크게 칠 줄 알았다.
“천산신녀공을 익힌 자는, 본좌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가요. 그럼 여기 김무공 생도는 어떻습니까?”
“나?”
갑자기 빡대가리가 된 느낌이다. 한여름의 페이스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이건 트럭으로 급발진하는 수준이잖아.
“재밌구나. 애초에 목적이 그것이었더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한여름이 당찬 목소리로 내뱉었다.
...얘 왜 이리 똑똑해졌지? 진짜 나 몰래 천수신의한테 백회혈에 침이라도 맞았나 싶다. 아니면 동물적인 본능의 발현이라 봐야 할지.
성사만 된다면 나로서도 엄청난 이득이니 일단은 말리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대신, 천산신녀공은 신교에 반납하여라. 익힌 걸 폐할 필요는 없다. 서책으로 적어서 남기도록.”
“얼마든지요.”
한여름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천마를 상대로 딜을 성공시킬 줄이야.
“좋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둘 다, 입교를 허한다.”
심지어 입교는 세트로 확정시켜버린 모양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가볍게 산책 나왔다가 거대한 금덩이를 주운 느낌이다.
천마의 제자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영광입니다.”
나는 멍하니 포권을 했다. 천마신교 입교라는 게, 원래 이리 쉽게 되는 거였나? 혼란스러움이 가중됐다.
[나 잘했지?]
한여름이 곧장 채팅을 보내왔다. 나는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오냐. 초대박 쳤네.]
어찌 됐든 이리됐으니.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하연과 룸메이트가 된 것부터 여기까지.
단순히 운이 좋다는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결과다.
“아버지, 천산신녀공이 대체 뭐기에 그러십니까. 소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녀?”
천위강이 차가운 눈빛으로 천하연을 응시했다. 어차피 다 아는 사이인데 그렇게 깐깐하게 굴 필요가 있나 싶다.
“소자는....”
그제야 천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극성 아비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한여름의 급발진 돌격을 순순히 용납해준 것도 그렇고, 성격을 종잡기 힘들었다.
“천산신녀공이라. 소교주도 슬슬 알 때가 되었군.”
“경청하겠습니다.”
천하연이 무릎을 꿇고 즉시 앉았다.
[우리도 무릎 꿇어야 해?]
[어... 그럴까?]
이놈의 천마신교는 일관성이란 게 없다. 태상호법이라는 어르신이 마하 11짜리 실험기를 양산해버리질 않나.
그러면서도 정작 구조만 보면 왕국과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어찌 됐든, 천하연을 따라 우리도 무릎을 꿇었다.
“천마신교가 본래 신강의 천산에서 탄생했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한때 중원으로 진출했었지만, 다시 천산으로 돌아갔던 이유도 그 때문이지.”
잠시 말을 고르던 천위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사지만, 시천마께는 연인이 있으셨다. 인세에 다시 없을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난 시천마에 비하면, 평범한 여인이었다고 하지.”
천위강의 시선이 다시 한여름 쪽으로 향했다.
“그래, 마치 그대와 같구나. 하지만 자질이라는 것도 결국 하늘이 내리는 것. 시천마께서는 하늘이 정한 한계를 타파하고자 하셨다. 천산신녀공은 그렇게 탄생했다.”
...애초에 천산신녀공 자체가 천마신교의 무공이었나.
한여름과 어느 정도 상태창을 공유하면서, 천산신녀공이 왜 EX라는 초월적인 등급을 부여받았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내 유니콘 신공만 봐도 효과만 떼어놓고 보면 미친 수준의 사기 무공이었는데, 천산신녀공은 아무리 둘러 봐도 그렇진 않았다.
시천마가 직접 연인을 위해 창안한 무공이라면 모든 게 이해가 갔다.
고금제일 하면 무조건 가장 앞줄에 서는 자가 초대 천마였으니까.
“설마 신녀도 존재하지 않는데 신녀궁이 아직 신교에 있는 이유가....”
천하연이 무언가 깨달은 듯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천위강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통탄할 일이지만, 천산신녀공은 어느 순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랜 과거의 일이었다고 하지. 신교의 역사서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무신이 그걸 발견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군.”
“...이름만 같을 가능성도 아직은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강제로 입교 당해서 곧 제자까지 될 예정이라곤 하나, 여전히 천마는 내게 너무 어려운 존재였다.
“아니. 신교의 교주에게는 천산신녀공을 익힌, 신녀를 알아보는 방법이 존재한다. 이름까지 들은 이상,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다.”
“이제 한여름 생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도 궁금한 걸 참긴 힘들었다. 곧바로 이어서 질문했다.
“천마가 신교의 무력을 상징하고, 교주가 신교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신녀는 신교의 기적을 상징하는 존재다. 원칙적으로 셋은 동등하다.”
괜히 현대까지 와서 ‘교’가 붙은 게 아니었다. 이런 부분에선 여전히 보수적인 교리를 따르는듯했다.
“따라서, 신녀는 교주와 상하관계가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교주의 제자가 될 수는 없다. 제자라 함은 상하관계가 명확한 법이다. 제자는 될 수 없지만, 차후 신녀궁의 주인이 될 수는 있겠지. 물론 궁주가 되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니라. 어쩌면 자격을 영원히 갖출 수 없을지도 모르고.”
갑자기 신분이 미친 듯이 상승했다.
게임이었다면 일종의 히든 트리거를 발견한 거겠지.
천마의 제자에 신녀궁의 차기 주인.
마도라는 게 걸리지만, 어차피 내가 익힌 무공이 마공이라는 게 거의 확실해진 이상 굳이 백도 정파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건 기연이다.
무신의 보물을 발견한 것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최상급의 기연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겠다. 소교주, 그녀를 신녀궁까지 안내하도록. 천마령天魔令에 따라 현 시간부로 교인 한여름을 신녀 후보로 임명하겠다.”
천위강의 품 안에서 아수라 상이 그려진 금패 하나가 천하연에게 날아갔다. 천하연이 양손으로 금패를 받들었다.
“소교주 천하연이 교주님의 천마령을 받듭니다.”
“둘은 이만 가보도록.”
“그대는 나와 함께 이동하면 된다.”
천하연이 금패를 손에 쥐고 한여름에게 말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가볼게.]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야쓰.]
둘의 뒷모습을 지그시 지켜보던 천위강이 이윽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 제자라.”
곁눈질로 천위강을 슬쩍 보니, 그가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흥미진진한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뭔가, 갑자기 실험실의 생쥐가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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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천위강.
이 사내에 대해선 나도 아는 게 없다.
그저 천하연 이전, 전대 천마라는 것 외에는.
애초에 게임 내에서도 정보가 그리 많이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모호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 제자가 된다 해서 신교를 물려받을 수는 없다. 이미 소교주 자리는 확정이다. 또한, 천마신공을 전수하지도 않을 것이니라. 익힌 심법이 있으니 어차피 불가능한 얘기겠지만.”
“알고 있습니다.”
천하연이 있는데 이런 복잡한 조직은 물려받고 싶지도 않았다. 굳이 천마신공이 없어도 유니콘 신공이면 충분했다.
“아니, 넌 모르고 있다.”
“...경청하겠습니다.”
“교주가 천마령까지 발동하면서 신녀 후보를 지정했다. 심지어 근본도 없는 약관의 제자를 새로 받았다고 하더라. 어쩌면 교주가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니겠나. 앞으로 퍼질 소문들이다. 이 뜻을 알고 있느냐?”
“내부에서 딴생각을 품는 자들이 나올 거란 말입니까?”
천위강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확고한 기반을 가진 나의 딸, 천하연에 비해 어디선가 굴러온 새로운 제자. 누가 봐도 쥐고 흔들기 좋아 보이지 않겠느냐? 수많은 거마巨魔들이 너를 보고 눈독을 들이겠지.”
“그렇다면 공식적인 제자로 삼으시지 않으셔도....”
“본좌는 천마다. 고작 그런 게 무서워서 쥐새끼처럼 숨기란 말이냐? 그럴 수는 없다.”
단호하게 천위강이 내뱉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위강의 말대로였다. 천마의 제자가 되는 순간, 나의 의사와 별개로 험난한 신교 정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득이 너무 컸다.
어차피 뭘 하든 일정 수준의 위험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처신만 잘 하면 될 터이다.
“저는 그저 교주님의 뜻을 받들 뿐입니다.”
“빤히 보이는 입에 발린 소리는 됐다. 따라와라.”
빌딩 최상층에서 가장 아래층의 지하까지. 교주만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숨에 이동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천위강의 넓은 등을 쳐다보며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말해라.”
“제가 혈교의 간자라든가, 정파 등의 세작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다짜고짜 제자로 받는 걸 허용한 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습니다.”
“천산신녀공을 걸고 하는 부탁이다. 신교 수백 년의 염원이 이뤄진 것이니, 나의 제자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니라. 네가 혈교나 정파의 간자라면 어차피 꼬리를 드러낼 터. 그때 가서 처단하면 그만이다.”
담담한 말투로 천위강이 말했다. 역시,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제자든 뭐든 가차 없는 성격인듯했다.
“또한, 네가 그럴 자로 보이진 않는군.”
게다가 의외의 칭찬까지 덧붙였다.
지하로 내려가서 한참을 걷자, 거대한 공동이 나왔다. 자연동굴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하 시설이 융합된 형태였다.
“헛짓하지 말고 등만 보고 따라오도록. 놓치면 위험하니.”
경고성과 함께 거침없이 앞으로 향했다. 나는 조심히 그 뒤만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