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31)

또각또각.

무거운 발소리가 넓은 지하 벽면을 타고 울려 퍼졌다. 어느새 주변에 흐릿한 운무가 잔뜩 끼면서, 시야가 극도로 제한됐다.

‘진법.’

그것도 대규모의 절진이었다. 까딱했다간 천위강조차 놓칠 것 같기에 나는 집중을 최대로 끌어올려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운무가 옅어지고 동양풍의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잘 꾸며진 정원과 함께 연못까지 있었다.

말했지만, 이곳은 ‘지하’였다.

천장에서는 그리 강하지 않은, 은은한 빛만 내리쬐면서 공간 내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그 무엇보다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천마신교에서, 마치 이곳만 과거를 그대로 옮겨온 듯했다.

“이곳은 조사전이다. 의관을 정제하고 들어와라.”

천위강의 말대로 옷매무새를 한번 다잡았다.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짙은 향냄새와 편안한 나무 향. 꼭 절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천마신교의 조사인 시천마의 위패를 중심으로, 역대 천마들의 위패가 모셔진 제단이 보였다. 먼지 한 톨 없는 제단에서는 향이 아른거리며 피어올랐다.

“구배지례에 대해 아느냐?”

“알고는 있습니다.”

원조 구배지례는 사실 잘 모른다. 본디 구배지례는 아홉 가지 예를 올리는 방법이니까.

무림전기에서는 조사야, 사야, 사부에게 각각 세 번씩 절하는 방식이었으니 훨씬 쉽긴 했다.

“앉거라.”

천위강이 장포를 펄럭이며 제단 앞에 앉았다. 나도 그 옆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세인들이 우리를 일컬어 어떻게 얘기하는지도 알고 있느냐?”

“예. 천하마도절기天下魔道絶技의 종주. 아닙니까?”

“옳다. 천하마도절기의 종주. 정확히 말하면 그건 오로지 한 가지 무공을 뜻함이다.”

“천마신공을 얘기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세상에서 오직 천마신공만이 그렇게 불릴 수 있다.”

지극히 오만한 선언이지만, 천마신교의 주인은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따라서 천마신공은 한 세대에 둘이 익히는 게 허락되지 않는 지고의 무공이다. 네게 전수하고 싶어도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후반부 일부 구결이 실전됐지.

오만함의 발로라 해야 할지. 이런 부분에선 꽉 막힌 집단이라 해야 할지.

예비를 두지 않으면 당연히 유실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다.

천산신녀공도 아마 비슷한 이유에서 실전된 거겠지. 지금까지 천마신공의 명맥이 이어진 것만 해도 신기하다.

잠시 역대 천마들의 신위를 올려다보던 천위강이 말을 이었다.

“제자와 스승은 본디 부모자식 간의 관계와 같다. 사제지연은 한번 맺어지면 부모와 자식처럼 쉬이 뗄 수 없느니라. 너는 그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

“그럼 지금부터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시작하겠다. 먼저 역대 천마들의 위패를 향해 아홉 번 절을 하거라.”

“계수배稽首拜 아홉 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천위강의 말대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위패를 향해 서서, 천천히 큰절을 시작했다.

“절을 하면서 듣거라. 우리 천마신교는 일반적인 무림 집단과 태생부터 달랐다. 시천마께서 천마신공을 창안하신 이후,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던 문파가 천산까지 도망온 약자들을 포용하면서 만들어진 게 우리 천마신교였다. 애초부터 무지렁뱅이 약자들의 모임이었다는 말이다”

다섯 회, 여섯 회... 나는 계속해서 절을 했다. 천위강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역대 천마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유자儒者들의 예법 같은 건 모를 수밖에. 우리의 구배지례가 남들과 다른 이유도 그 때문이다. 허나. 비록 배우진 못했지만 듣는 귀는 있었고, 세간에서 구배지례라 하니 마냥 아홉 번 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지. 아는 절이라고는 흔히 보는 계수배 밖에 없으니 계수배 아홉 회. 그것이 우리의 구배지례니라.”

마지막으로 아홉 회.

절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음으로는 나를 보며 아홉 회를 절하거라.”

위패를 보고 했던 것처럼 이번엔 천위강을 보며 절을 시작했다.

“신교에 도착하고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엉망진창이다. 일관성이란 없는 집단이다. 옳은 얘기다. 행복한 자들은 다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자들은 다들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한 법이다. 우리는 항상 불행한 자들을 대변하고자 했으니, 어쩌면 엉망진창인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힐긋 시야에 들어온 천위강의 입꼬리가 잔잔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냥 냉정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싶다.

“신교라 하여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랬으면 우리로부터 혈교라는 어둠이 탄생했을 리도 없겠지. 애당초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집단이 어디 있겠느냐. 중요한 건 잘못하여 만신창이가 되어도, 설사 백공천창百孔千瘡하여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면서 바로잡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신교의 정신이고, 근본이라 할 수 있다.”

탁. 마지막으로 아홉 번 절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제자야,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거라. 우리의 구배지례처럼, 신교는 조금 다를 뿐이니라.”

“딱히 이상하다 여기진 않았습니다.”

“그러면 되었다. 이것으로 배사지례를 마무리하겠다. 지금부터는 나를 사부라 부르거라.”

“예, 사부님.”

사부. 막상 입으로 내뱉으려니까 무진장 어색했다. 살짝 손발이 저릿한 거 같기도 하고.

“쯧, 번잡하다. 백도의 아해를 제자로 받으려니 말이 너무 길어졌군.”

...방금까지 분명 어느 정도 따스함이 깃든 목소리였는데, 순식간에 이전의 차가운 말투로 변했다.

심지어 아까 입꼬리에 걸려있던 미려한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이,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은 표정으로 돌변했다.

어느 쪽이 천위강의 본모습인지, 벌써 헷갈릴 지경이다.

“딱히 백도 출신은 아닙니다만.”

천위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승의 말에 토를 달지 마라.”

“옙.”

천하연의 아버지이자 나의 스승.

상당히 꼬인 관계가 되어버렸다.

나는 문득 생각나는 의문점을 물었다.

“사부님,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라.”

“이로써 사부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천하연 소교주가 제 사저가 되는 겁니까?”

“사저?”

“예. 여성이니 사저 아닙니까?”

천위강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거의 잡아먹을 듯한 기세다.

“호칭은 네 마음대로 하거라. 단.”

“네.”

“너무 가까이 지내진 말아라.”

“...?”

나는 멍하니 고개를 갸웃했다. 천위강이 눈썹을 추켜세우고,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대답.”

“이미 가까운 사이입니다만. 제자, 말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말했듯이 스승과 제자는 부모자식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다른 사형제 간도 비슷하다 볼 수 있느니라.”

“이해했습니다.”

“사형제 간에 선을 넘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아니 될 일이다. 알겠느냐?”

...이런 미친.

그러니까, 남녀 간의 관계는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근친과 다를 바 없으므로.

언제는 사사로운 정을 신경 쓰지 않는다 말해놓고.

이건 아무리 봐도 사사로운 정을 ‘엄청나게’ 신경 쓰는 모양새 아닌가 싶다.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눈을 내리깔고 아주 정중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부님.”

어차피 천하연이 나를 상대로 허튼 생각을 할 리도 없으니까, 말하는 데 있어 크게 부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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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천위강의 제자가 되었지만, 당장은 크게 달라지는 게 없었다.

천마궁 근처에 있는 흑룡각이라는 빌딩을 부여받은 정도?

천마의 제자를 위해 마련된 장소답게, 내부는 엄청난 화려함을 자랑했다.

너무 넓어서 솔직히 혼자 쓰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니 이것만으로도 크게 달라진 거 같기도.

어찌 됐든.

공표는 며칠 뒤라 들었으니, 그때까지는 짧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는 순간, 난리가 나겠지.

‘이거 아카데미는 괜찮나?’

천하연은 어차피 신교 내부에서도 신비로운 후계자 위치라 남장시켜 들여보냈지만, 나는 아니었다.

‘모르겠다.’

당장은 고민한다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으니.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푹신푹신한 침대로 가서 누웠다.

[야, 넌 뭐함?]

아까부터 소식이 없는 한여름에게 톡을 하나 보냈다. 나와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뭔가 하는 모양이다.

[살려줘... 입교 취소하면 안 될까?]

[나가는 건 상관없는데, 목은 여기 두고 가야 할걸?]

심지어 난 이미 제자 확정이다. 아직 무공을 배우진 않았지만, 무림 세력은 ‘체면’을 중시하거든. 내가 다짜고짜 나간다고 선언한다? 최소 단전이랑 근골 병신은 확정이다. 재수 없으면 목숨까지 잃을 테고. 나로서도 낙장불입이라는 얘기였고, 그건 한여름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죽는다는 얘기잖아.]

[어. 정확함.]

[하아....]

[대체 뭘 하길래 그러는데?]

[신녀궁? 사람들이 막 몰려와서 오늘부터 교육 일정 알려줬는데, 너 볼 시간도 제대로 없을 거 같아.]

아무래도 천하제일을 노릴 수 있게 만든다는 건,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내일부턴 바쁠 거 같은데.]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완전 날벼락이네.]

[그러게나 말이다.]

[에잇, 어떻게든 되겠지. 너도 힘내!]

[오냐. 악깡버 해라.]

[야쓰.]

하소연하는 거에 비해, 지금까지 먼저 톡 안 보낸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는 잘 버티고 있는듯했다.

똑똑.

멍하니 고풍스러운 낯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멀리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묵고 있는 장소는 흑룡각에서도 가장 꼭대기, 펜트하우스 비슷한 장소였다.

문이 열자 그곳에는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은 미녀가 서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갈색 단발. 눈 색도 머리와 비슷하게 옅은 갈색에 가까웠다. 나이는 스물일곱에서 여덟쯤. 삼십은 넘지 않아 보였으나, 연상임은 확실했다.

여성이 나를 보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공자님을 보좌하게 된 천마궁 홍화각紅花閣 소속 류은채라고 합니다.”

듣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공자님이라뇨. 말 편하게 하시죠. 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시는데.”

본인을 류은채라 소개한 여성의 미간이 순간 꿈틀거렸다.

“괜찮습니다. 공자님.”

한 마디 한 마디 딱 끊어서 말하는 말투에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보아하니 한 고집 하는 모양이다.

“보좌라면 정확히 어떤...?”

“신교에 머무실 때 전반적인 생활을 도울 겁니다. 백도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신교에 관해선 잘 모르실 테니, 기본적인 교육도 겸하게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딱히 백도 출신은 아니다만. 정정하기도 귀찮아졌다.

“그럼 잠시 실례를.”

그녀가 성큼성큼 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부엌 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과를 준비해서 테이블 쪽으로 내려놓았다.

“홍화각은 본디 천마궁에 기거하시는 분들을 지원하기 위한 집단입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홍화각의 누구에게든 요청하시면 됩니다.”

“홍화각 소속인 건 어떻게 알아보면 됩니까?”

“천마궁 내에서 이 비녀를 꽂고 있으면 홍화각 소속이라 보시면 됩니다.”

류은채가 머리를 살짝 틀어 내게 비녀를 보여줬다. 그냥 머리 장식인 줄 알았더니, 나름의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이해했습니다.”

“일단 신교에 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말은 편하게 하시지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도 연상이신데.”

다시 한번 류은채의 눈썹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제가, 더 불편합니다. 말 편하게 하시지요.”

“....”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이 꽤 살벌하다. 결국, 내가 먼저 시선을 살짝 피했다.

“어... 이러면 되나?”

“예, 아주 좋습니다. 공자님은 교주님의 제자이십니다. 교주님의 얼굴에 먹칠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딜 가든 오연하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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