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31)

옷을 입고 정중하게 포권했다.

“쯧, 제대로 치료도 못 해줬으니 감사할 거 없소. 신의 놈 보고 웃을 게 아니었군.”

“아닙니다. 이제 확실히 감을 잡았습니다.”

“...응원하겠소이다. 혹 이상 있으면 오시오. 적어도 그때그때 증상 보고 조치는 해볼 터이니.”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나는 마의각을 나섰다.

역시, 요행이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만 뼈저리게 들었다.

***

떠나가는 김무공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마의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무력하군.’

무리한다면 화마정을 강제로 폭주시켜 녹여내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운에 맡기는 도박과도 다를 게 없었다.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수단인 이상, 최후까지 아껴두는 게 맞았다.

의학의 발전이란 수많은 시행착오와 통계적 보완을 통해 이뤄지는 법인데, 저런 ‘전설’에 속하는 것들은 사례 자체가 없다 보니 아무리 마의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마의각에 있는 오래된 책을 잔뜩 찾아와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저벅.

한동안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마의의 근처로 누군가 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아름다운 금발에 투명한 녹안.

소교주 천하연이었다.

“소교주께서 여긴 어인 일이시오?”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책장을 넘기며 마의가 물었다.

“김무공 사제... 가 마의각에는 왜 다녀간 겁니까?”

지금껏 제자라곤 혼자였던 천하연에게 있어, 사제라는 말은 너무 어색했다.

괜한 민망함이 들어 피해 다니다 우연히 먼발치에서 김무공이 마의각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보고야 말았다.

이전에 자신의 아비에게 진찰을 부탁한 것도 그렇고,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흐음... 그건 아무리 소교주라 해도 알려줄 수 없소이다.”

마의가 말을 피한다. 이로써 더 확실해졌다.

무언가 숨겨진 게 있다.

“김무공 사제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천하연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마의가 대경실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어...! 소교주께서 이러시면 안 되오.”

“저 혼자만의 비밀로 하겠습니다.”

여전히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천하연을 보며, 결국 마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얘기해드릴 터이니, 여기 앉으시지요.”

천하연이 마의의 말대로 앞에 앉았다.

“내 소교주의 고집은 알고 있었지만. 진정 들어야겠소?”

끄덕.

대답 없이 천하연이 머리만 까딱였다.

“김무공 공자의 몸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소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천하연이 눈을 부릅떴다.

“시한폭탄이라면...?”

“짧으면 1년. 길면 5년 안에 몸 안의 폭탄이 터져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외다.”

“그런.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겉이 문제가 아니오. 내부가 만신창이나 다름없소. 그나마 태생적으로 몸이 강하기에 버티고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소이다.”

천하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마 그 정도로 심각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무인도 평가 때 위중한 상처를 입은 건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겉보기에 내외상 모두 없어 보였으니까.

“...김무공 사제를 살릴 방법이 있습니까?”

“그건 김무공 공자 자신에게 달렸소.”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결국 그릇의 크기는 작은데 힘이 넘쳐서 발생하는 문제이니, 그릇의 크기를 키우면 그만이오. 단, 화경까지 올라 환골탈태는 겪어야 안전하다 볼 수 있을 것이오.”

화경. 아직 천하연조차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그것을 김무공이 1년 안에 도달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웠다.

1년은커녕, 5년이 주어져도 쉽지 않으리라.

고심을 거듭하던 천하연의 뇌리에 불현 듯 한 가지 해결법이 스쳤다.

‘음양합일.’

본디 방중술 자체가 도인들의 수련을 위해 탄생했으니까.

무인도에서 봤던 광경을 토대로 판단해 보면.

올바르게 활용만 한다면 분명 자신에게 있어서도, 김무공에게 있어서도 가장 빠르게 경지를 상승시킬 수 있는 수단임은 확실했다.

‘...안돼.’

문제는, 그건 천하연이 택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달뜬 숨결이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면서, 천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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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연못의 한 가운데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조사전 근처의 연못에 있던 물은 천중수天重水라는 특별한 액체였다.

영약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선 어지간한 영약보다 귀하다고 여겨졌다. 그것이 연못을 이룰 정도로 담겨있으니, 이것만 봐도 신교의 위상을 짐작게 했다.

효능은 간단했다. 운기조식의 효율증가.

몸 안의 탁기와 노폐물을 자연스럽게 배출하는 공능도 있었지만, 어차피 태양지체는 선천적으로 탁기가 거의 쌓이지 않는 체질이었다.

덕분에 내가 볼 수 있는 효과는 심법 수련에 도움을 받는 정도에 그쳤지만, 지금 내 상태에선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화경의 벽을 넘기 위해선 심법 경지를 올려야 했으니까.

일반적인 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천중수는 내 옷에 스며들지 않고 몸을 타고 그대로 연못으로 빠져나갔다.

“사부님, 질문이 있습니다.”

근처에서 내가 운기조식하는 걸 천위강이 지그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연못에서 빠져나오며 곧장 말을 꺼냈다.

“말해라.”

“화경에 도달하는 빠른 길이 있습니까?”

“1년 안에 정석적인 방법으론 힘들다.”

단호한 말투로 천위강이 말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자의 몸 상태는 당연히 알아야 할 부분이니라. 마의는 내켜 하지 않았으니, 왜 동네방네 퍼트리냐고 가서 따지진 말아라.”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만....”

“쯧, 기껏 받은 제자가 시한부라니.”

“정석적인 방법이 아니면 뭐가 있겠습니까?”

분명 ‘힘들다’라고 하였지, 불가능하다 하진 않았다.

“영약과 현경에 이른 무인의 격체전력을 통해 강제로 환골탈태를 이루면 반쪽짜리라도 화경을 만드는 게 가능은 하다. 허나, 현경의 무인도 선천지기를 써야 하지.”

“...효율이 최악이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그렇다. 하물며 네게는 불가한 얘기다. 균형이 어긋날 대로 어긋난 상태에서 강제로 환골탈태를 이루려고 했다간, 네 몸이 버티질 못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답이 없다는 얘기였다. 어째 방안을 찾을수록 고구마만 백만 개 먹는 느낌이었다.

“다만, 네가 익힌 심법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모르는 이상 속단할 수는 없다.”

“마공임은 확실합니다. 마기를 잡아먹으며 진기를 불렸습니다.”

내 말을 들은 천위강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상념에 잠겼다.

“마기를 잡아먹는 마공... 마공이라 하여 마기를 잡아먹는 게 아니다. 하물며 단숨에 정제한다. 그것도 무신의 비보인가?”

“예.”

“구결을 말해 보거라.”

“예. 당장 말하겠... 어?”

분명 ‘머릿속’에는 있는데 입 밖으로 구결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 강제로 내 행동을 틀어막은 느낌이었다.

입만 우물거리고 있자, 천위강이 내 백회혈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반개했다.

“다시.”

“....”

“금제로군.”

“금제 같은 건 걸린 적 없습니다만....”

“무공 자체에 유출을 막는 어떠한 장치가 되어있을 수 있다. 나조차 뚫을 수 없는 금제라니. 네가 익힌 게 지고의 무공은 맞나 보군.”

“그건 확실합니다.”

그냥 직관적으로 봐도 EX급이다.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개사기였다.

“...당장은 나도 방법이 없다. 그저 꾸준히 단련하고 수련하는 수밖에.”

“그렇군요.”

나는 입매를 살짝 올리며 얘기했다.

문득 신교의 정신이라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설사 백공천창하여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일어나라 했던가.

비록 우연과 기적이 겹친 결과물이었지만, 어쩌면 신교에 들어오게 된 것 자체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내게 딱 필요한 말 아니겠는가.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최대한 도울 터이니 너무 상심하지는 마라.”

무표정으로 천위강, 아니.

사부가 내뱉었다.

말투는 차가웠지만, 내용에는 배려심이 가득했다.

“예, 사부.”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사내다. 이제야 사부의 본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웃지 마라.”

“옙.”

곧바로 조금은 과장된 무표정을 지었다. 사부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초리로 쏘아봤지만, 본인이 한 말이 있어서 차마 태클은 걸지 못하는듯했다.

“안 되겠군.”

“사부님?”

“네가 정확히 뭘 익혔는지, 어느 정도 수준인지부터 봐야겠다. 덤비거라.”

다짜고짜 거리를 벌린 사부가 뒷짐을 지고 선언했다.

“지하인데 괜찮습니까?”

지하에서 힘을 잘못 썼다간 붕괴의 위험이 있다.

“이 천마동은 전략핵 공격의 직격도 막을 수 있게 강고히 보강된 장소다. 신교에서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절진까지 설치해놨으니 화경의 무인 둘이 대련을 벌여도 안전하다.”

전략핵이라니. 이런 부분에선 또 묘하게 현대적이다. 하여간, 보면 볼수록 신기한 집단이다.

아무튼, 조사전과 거리를 벌리고 나도 몸을 풀었다.

사제지간에 첫 대련인데, 대충 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

내가 기세를 가다듬는 걸 사부는 예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전력으로 갑니까?”

“당연히.”

위력만 놓고 보면 ‘화룡’의 이름이 붙은 혈수마공의 후반부 초식이 가장 강했지만, 문제는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능숙한 절기를 시전할 것이냐, 아니면 어설프더라도 후반부 초식을 시도할 것이냐의 기로.

찰나의 고민 후 답을 내렸다.

사부라면 내가 무슨 공격을 하든 충분히 받아줄 수 있다.

마음 편히 모든 걸 쏟아부어도 된다는 말이었다.

유니콘 신공도 이미 발동 중이다.

내면을 자세히 관조해 보니 협인지로와 동시에 버프가 걸리는 게 문제지, 하나쯤이야 버틸만했다.

“그럼. 혈수마공 화룡교격火龍交擊으로 가겠습니다.”

말을 하며 묵묵히 양손에 혈수마공의 기운을 잔뜩 압축했다. 유형화된 붉은 기운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손은 물론이고, 팔까지 뒤덮었다.

사부는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나의 모습을 주시했다.

‘됐다.’

실전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준비시간이었지만, 사부가 충분히 기다려준 덕에 극한까지 기운을 압축하는 데 성공했다.

천하연조차 이 공격은 쉽게 막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상대는 그런 천하연보다 몇 단계는 위의 고수였으니 마음 놓고 공격하는 거지만.

쿵-

진격과 동시에 끌어올렸던 의념을 발걸음에 실어 그대로 찍어눌렀다.

내딛는 용천혈을 중심으로 원형의 경파가 뻗어 나가며 사부에게 닿았다.

화룡교격火龍交擊. 이름만 화려하지 실상은 매우 직관적인 공격이었다.

극한까지 압축한 양손의 진기를 근거리에서 번갈아 발출하는 공격이었으니까. 상대방의 방어째로 뚫어버리는 게 목적인 초식이었다.

꽝-!

천마군림보의 기세가 사부의 발치에 닿는 것에 맞춰, 그대로 장을 뻗어냈다.

“기이하군.”

두 마리의 화룡이 물어뜯는 것과 같은 화룡교격이 사부의 몸에 닿기 직전.

혜광심어慧光心語처럼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부의 손이 부드러운 원형을 그렸다.

얼핏 보기엔 마치 태극권과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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