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31)

“큭...!”

찰나의 순간, 진기의 방향이 전부 뒤틀렸다. 바로잡을 수 없었다. 이화접목을 수련하면서 얻었던 깨달음도 소용이 없었다.

파파파팍-

극양의 기운이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반짝이는 불꽃으로 화했다.

내가 경악한 표정을 하자, 사부의 음성이 다시 머리에 박히듯이 들려왔다.

“이것이 네게 전수할 신교의 호교신공護敎神功인.”

몸이 수십 바퀴 회전하는 걸 느끼며, 서서히 손발의 감각이 사라져갔다.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라고 한다.”

사부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의식이 암전했다.

***

퍼버버벅-

기절한 김무공을 똑바로 눕히고, 천위강은 손가락에 진기를 실어 세심하게 추궁과혈했다.

한동안 이어진 추궁과혈에 천위강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이 많이 가는 제자군.’

무엇이든 척척 해냈던 천하연에 비해, 김무공은 보면 볼수록 위태로웠다.

심지어 시한부 판정까지 받았으니. 현경의 무인조차 김무공의 신체를 멀쩡한 상태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약간의 시간은 벌었다.’

추궁과혈을 하며 화마정의 마기를 조금이나마 안정시켰다. 반응으로 보아, 다음부터는 아마 이것도 불가능하겠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추궁과혈을 마친 천위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 수 없군.’

천하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신공에 관해 알고 있다 자부하는 천위강으로서도, 김무공이 익힌 심법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마기를 잡아먹는 심법.

김무공은 그걸 토대로 마공이라 판단했지만, 그건 마공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런 거다.

마기는 극도로 위험한 힘이었고, 그걸 다루기 위해선 세심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주화입마에 빠져 이성을 잃은 ‘마인’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하물며 전투의 한복판에서 마기를 바로 정제하여 자신의 진기로 사용한다?

천위강이 알기에, 전 세계에 그런 초월적인 심법은 오직 하나였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온전한 천마신공만이, 그런 공능을 지니고 있다 들었다.

게다가 김무공이 의념을 실어서 사용했던 보법.

그건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던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와 너무나도 유사했다.

허나, 천마군림보는 이미 유실된 지 오래다.

‘만류귀종인가, 아니면....’

냉정히 보면 무신이 무공을 보완하다 보니, 우연히 천마신공과 비슷해졌을 가능성이 더 컸다. 무신은 시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월자였으니까.

저런 초월적인 심법을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으으... 기절은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제자, 아직도 머리가 울립니다.”

슬슬 정신을 차린 김무공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툴툴거렸다.

“시끄럽다.”

김무공의 항변을 가볍게 묵살하며, 천위강은 두 번째 가능성을 뇌리에서 지웠다.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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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일으키고 신체를 점검하던 김무공은 의아함을 느꼈다.

‘가볍다.’

분명 몸이 수십 바퀴 회전하면서 땅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는데, 이전보다 훨씬 몸이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마치 고급 안마라도 받은 느낌이었다.

‘그럴 리 없지.’

내구가 올라가니 누워있으면서 회복이 된 모양이다. 김무공으로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제자, 이제 멀쩡합니다.”

천위강을 보며 김무공이 과장된 몸짓을 했다.

“경박하게 굴지 마라.”

“넵.”

“쯧, 곧바로 전수를 시작할 터이니 이리 오거라. 먼저 구결을 불러주겠다.”

천위강이 나직한 목소리로 구결을 읊조렸다. 눈을 감고 김무공은 구결에 집중했다. 한참을 이어진 전수 끝에, 천위강은 잠시 기다렸다.

건곤대나이의 난해한 구결을 한 번에 외울 거라곤 천위강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 외웠습니다.”

그러나, 김무공은 천위강의 예상을 바로 벗어나 버렸다.

“기억력이 좋군.”

“뇌가 좀 이상한지. 무공에 대한 기억력만 탁월할 정도로 좋습니다.”

실제로 김무공 본인조차 이건 예상 못 한 부분이었다. 천위강이 끊임없이 구결을 불러줄 때 당장은 외우는 걸 포기하려 했으나, 이상하게 머릿속에 쏙쏙 박히듯이 들어왔다. 구결에 관해 떠올릴 때마다 마치 어디선가 저장된 정보를 끌어오는 것처럼, 바로바로 떠올랐다.

“읊어 보거라.”

김무공의 입에서 이내 건곤대나이의 구결이 흘러나왔다. 구결을 들을 때마다 천위강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천재로군.’

단순히 보기엔 그 정도로 똑똑해 보이진 않았으나, 김무공은 무공에 관해선 ‘천재’였다. 천하연과 비교해도 결코 모자라지 않는 천재. 천위강은 그 사실에 기꺼움을 느꼈다.

‘이름값 하나는 하는구나. 무공이라더니.’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의외로 제자 복이 있었다. 어느새 구결 외는 걸 끝마친 김무공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부님?”

“완벽하다. 바로 건곤대나이의 모든 걸 전수해도 되겠군.”

“칭찬 감사합니다.”

“오만함을 가져선 안 될 것이다. 무의 길이란 끝이 없는 법이니.”

“예. 알고 있습니다. 천하연 사... 저를 보면 있던 오만도 사라집니다.”

딱히 천하연에 비해 모자라진 않다만.

문득 든 생각을 천위강은 속으로만 삼켰다.

때로는 진실을 숨길 필요도 있는 법이었다.

“본능적으로 이화접목을 사용하더군.”

“혈교의 무인을 때려잡다가 익혔습니다.”

실전에서 극한의 집중력이 발휘되어 무공 경지를 순식간에 뛰어넘는 부류들이 있다. 보통은 단기 상승에 그칠 때가 많지만, 그걸 지금까지 몸으로 체현할 정도면.

‘실전으로 강해지는 타입이군.’

김무공의 성향이 어렴풋이 손에 잡힐듯했다. 천위강은 조금씩 수련 방향을 조정했다.

“간단하게 줄이자면, 건곤대나이는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과 이화접목의 묘리를 전부 다루는 무공이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특화된 무공이라 할 수 있다.”

“이해했습니다.”

김무공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제압하는 사량발천근.

힘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이화접목.

태극권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고절한 수법이었다.

“좋다. 시전에는 막대한 내공과 신체 잠재력이 필요하나, 너는 모두 해당하는 것 같으니. 지금부터 잘 보고 따라 하거라. 속으로는 끊임없이 구결을 되뇌면 된다.”

천위강이 건곤대나이를 시전하는 것에 맞춰, 김무공도 찬찬히 움직임을 모방했다.

‘...이건.’

티를 내진 않았지만, 김무공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천위강은 경악했다.

건곤대나이는 신교의 무공 중에서도 상당히 고난도에 속한다.

그러나, 김무공은 지금 어설프게나마 건곤대나이를 구현하고 있었다. 손짓에 담긴 묘리가 점점 정교해졌다.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빠르게 익숙해졌다.

천산신녀공 때문에 받은 제자였지만, 이건 기대를 뛰어넘어도 한참 뛰어넘은 결과였다.

‘어쩌면.’

현경의 무인은 종종 미래 예지에 가까운 ‘감’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때였다.

김무공이 시한부를 벗어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런 직감이 불현듯 천위강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아지경으로 건곤대나이를 수련하는 김무공을 지그시 응시하던 천위강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

옆에 자신이 있는 것도 방해가 될까 하여.

그렇게.

천위강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김무공은 한동안 건곤대나이 수련을 계속했다.

이윽고 반개했던 눈이 점점 커지면서 김무공의 의식이 현실로 부상했다.

“사부님?”

얼마나 수련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천마동에는 자신 혼자 남아있었다.

신체와 내공을 극한까지 쥐어짰음에도 오히려 몸의 균형은 더 좋아진 느낌이다.

‘이래서 건곤대나이를 전수하신 건가.’

태극권이 양생법으로 유명하듯이, 건곤대나이도 비슷한 효용이 있는듯했다. 시한부인 자신에게 적절한 무공이었다.

주변 풍광을 느긋하게 둘러보던 김무공이 조사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대 천마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었지만, 발에 닿는 차가운 나무마루의 감촉이나 편안한 향냄새 등.

수련으로 지친 심신을 안정시키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시천마부터 시작해서 역대 천마들의 위패를 하나하나 관찰하던 김무공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설마.’

위패 중 하나.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천마신교天魔神敎 십이대 교주 위位 수라마제修羅魔帝 천우진.

그것은, 천마신공天馬神功을 창안한 자의 이름이었다.

***

천화전天火殿.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천화전은 대다수의 다른 전각과 다른 외형을 자랑했다.

잘 꾸며진 넓은 정원 안쪽으로는 으리으리한 저택이 자리 잡았다.

옛 유럽 귀족의 저택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신교 소교주의 거처로 마련된 장소였다.

소교주가 묵는 메인 저택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사용인들이 묵는 건물이나 창고 등. 대여섯 개의 보조 건물들이 부지 내에 있었다.

게다가 부지 외곽에는, 소교주 직속 호위대인 마영수라대가 생활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무림 집단을 연상케 했다.

그야말로 신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저택 내부.

시끄러운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천하연 성격을 배려해서인지 평소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그것뿐만 아니라, 여자로서 생활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자 하는 천마의 의지이기도 했다.

또각또각.

저택 중앙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복도에 새하얀 가운만 입은 천하연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용 두 마리가 음각된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한 천하연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물리거라.”

암중에서 천화전을 관리하던 홍화각 소속 여인들의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천하연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상아색과 옥빛으로 가득한 장소가 천하연의 시야를 점령했다. 쓸데없이 넓고 화려한 욕탕 내부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가볍게 몸을 씻어내리고, 천하연은 중앙의 욕조에 발끝부터 시작해서 몸을 천천히 담갔다.

찰박-

뜨끈한 수온에 몸이 자연스럽게 이완됐다.

수십 명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욕조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하아....”

노곤한 기분에 천하연은 열기 섞인 숨을 내쉬었다.

욕조 안에 둥둥 떠 있는 붉은 꽃잎 사이로 금빛 물결이 일렁였다.

멍하니 수면 위를 떠다니는 자신의 머리칼을 쳐다보며, 천하연은 마의에게 들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시한부라니.’

그것도 김무공이.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천하연은 자꾸 좋지 않은 생각이 드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멈추려고 할수록, 무인도에서 생생하게 봤던 광경만이 뇌리를 자꾸 지배했다.

천하연이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봤다.

일렁이는 물결 사이로 탄탄한 나신이 비쳤다.

‘....’

천하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다리 사이로 향했다. 음모 하나 없는 매끈한 그곳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었다.

김무공이 한여름을 애무할 때 했던 것처럼.

연분홍색의 겉 부분부터 시작해서 부드럽게 손을 놀렸다. 물속이라 그런지, 아니면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능숙하게 되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핑크빛 유두를 살살 문질렀다. 둘의 정사를 떠올리며 흥분한 천하연의 유두는 평소보다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읏...!”

너무 강렬하게 쥔 것 때문인지, 출렁거리는 가슴 쪽에서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밀려 들어왔다.

“하아....”

입술 사이로 자신도 모르게 달뜬 신음이 연신 새어 나왔다. 다급히 기막을 쳐서 주변 소리를 틀어막았다.

이러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천하연은 머릿속으로 김무공의 손길을 상상하며 대음순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잔뜩 흥분한 탓에, 물속인데도 애액이 흘러나오는 걸 천하연은 알 수 있었다.

조금씩 클리를 비비면서 안쪽으로 손가락을 향하던 천하연의 감각에, 좁디좁은 틈새가 느껴졌다.

손가락 하나조차 안 들어갈 것 같은 작은 구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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