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었다.”
“응? 뭘 들어?”
“그대가 시한부라는 얘기 말이다. 짧으면 1년이라지?”
무거운 음색으로 천하연이 읊조렸다. 마의에게 갔던 날 이후, 천하연은 김무공을 피해 다니며 홀로 수많은 고민을 했다.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 없으니, 굳은 결심을 하고 온 게 하필 오늘이었던 거였다.
“마의 이 양반이. 비밀이 없고만. 사부한테도 말하더니.”
“...아버지도 알고 계시나?”
“그래. 제자 몸 상태를 알아야겠다고 열심히 윽박질렀나 보더라.”
부전여전도 아니고 원. 김무공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버지께서도 방법을 찾지 못하셨나?”
“당장은 없다고 하시던데.”
팔짱을 끼고 김무공이 태평한 말투로 말했다.
“그대는 무섭지 않나?”
“존나 무섭지. 그걸 말이라고.”
“...그런 것치곤 너무 평안해 보인다만.”
“뚜렷한 답이 없는 문제를 당장 걱정해봐야 나만 힘들어. 이럴 땐 그냥 잊고 사는 게 답이야.”
“역시 그대는....”
천하연이 입술을 꾹 다물고 김무공을 응시했다. 천하연의 눈동자 너머로 기이한 열망이 아른거렸다.
“근데 그건 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그대만 각오한다면 우리 둘 다 경지를 빠르게 올릴 수단은 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천하연이 ‘둘 다’를 강조하며 말했다.
사부인 천마조차 찾지 못했던 방법을, 천하연이 알고 있다? 심지어 같이. 의아한 기분에 김무공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영약은 안 된다던데.”
“...영약 같은 게 아니라, 각오만 하면 되는 일이다.”
“무슨 각오?”
“쓰레기가 될 각오.”
김무공이 미간을 찡그렸다. 쓰레기가 될 각오. 대체 뭘 뜻하는 건지, 천하연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저히 예상이 가질 않았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봐.”
“...나와.”
“너랑?”
“합궁... 하면 된다.”
민망한 느낌에 천하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천하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김무공이 입을 떡 하니 벌렸다.
합궁. 섹스하자는 얘기였다.
천마신공의 공능을, 천하연이 알고 있었나?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김무공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진심이야? 내가 문제가 아니잖아. 너는 괜찮아?”
“그대라면 상관없다.”
“...안 돼.”
일순 김무공의 눈동자에 거센 파랑이 몰아쳤다. 약간의 침묵 끝에, 김무공이 욕실 쪽을 힐긋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라고 몰라서 안 한 게 아니다.
굳이 천하연이 아니더라도, 천마신공 자체에 처녀와 섹스를 통해 경지를 올리는.
그야말로 마도魔道에 걸맞은 길이 있긴 했었다.
알고도 안 한 것이다.
처음에는 색마로 오인당할까 봐, 지금은 한여름 때문에.
“역시 그런가. 너무 신경 쓰진 말거라. 어디까지나 해결 방법의 하나일 뿐이니.”
천하연이 빠르게 말을 끝마쳤다. 얼버무리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김무공이 입안을 깨물었다. 너무 단호하게 거절했나 싶다.
여성으로서 저런 말을 꺼내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한동안 마주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천하연으로서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게 분명했다.
천하연은 자신을 살리고 싶어서 한 말일 텐데.
깨닫고 보니,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들어 김무공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네가 싫다는 건 아냐.”
“그런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잖냐.”
“...그거면 충분하구나.”
희미한 미소와 함께 천하연이 화답했다. 지금까지 소리를 막으려고 쳐놨던 기막도 거뒀다.
말을 곱씹을수록 민망한 기분에 서로 시선을 피하면서, 어색한 침묵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응? 둘이 왜 그래?”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비척비척 다가온 한여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처로 다가옴에 따라 강렬한 샴푸 향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별일 아니다.”
“별일 아냐.”
김무공과 천하연이 동시에 대답했다. 한여름이 눈을 게슴츠레하고 둘을 번갈아 봤다.
“이상한데. 이 기류 뭔데.”
“무력대 관련해서 의견 차이가 좀 있었어.”
황급히 김무공이 변명했다. 막 씻고 나온 탓에 살짝 상기된 볼로, 김무공을 새침하게 흘겨보던 한여름이 소파에 앉았다.
“싸운 건 아니지?”
“딱히 그런 건 아냐. 그치?”
“오해다. 우리가 싸울 리 있겠느냐.”
“음. 알았어. 우리 김무공 씨는 가끔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거든. 혹시나 했지.”
한여름이 김무공 쪽으로 딱 붙었다. 그리고는 팔꿈치로 김무공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너한테만 그러잖냐.”
“왜 나한테만? 그거 차별이야.”
“차별은 무슨.”
“그대들은 역시 사이가 좋구나.”
어딘가 씁쓸한 어조로 천하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오래 봐서 그래.”
“그런가. 일단 내 얘기는 끝났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겠다.”
천하연이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
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하연을 올려다봤다.
“그대들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것도 미안하니 말이다.”
“...이러면 내가 미안한데.”
“괜찮다.”
천하연은 뒤돌아서서, 쓰게 웃었다.
‘미안한 일은 내가 저질렀으니. 어쩌면, 앞으로 더 미안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둘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나선 천하연은 복도 근처 벽에 몸을 기댔다.
김무공의 표정에서 천하연은 일말의 망설임을 보았다. 한여름 몰래 이런 말을 꺼낸 게 세간의 지탄받을 만한 짓임은 알고 있었다. 설사 그게 김무공을 살리는 길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김무공의 시한부를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결국, 뭐라 해도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얘기는 피할 수 없었다.
물론 한여름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하고 양해를 구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시한부인 걸 김무공은 한여름에게 말하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천하연 자신이 먼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의도로 김무공이 숨겼는지는 짐작이 가니까.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선택은 김무공의 몫으로 넘어갔다.
***
우리는 침대에 드러누워 사이좋게 적룡대 후보를 검토했다. 천마신교는 첨단적인 걸 좋아하면서 이상하게 이런 부분에서는 종이 서류를 고집했다.
“왜 죄다 여자인 건데...!”
한동안 서류를 뒤적거리던 한여름이 눈매를 치켜세우며 불만을 표출했다.
“글게. 왜 다 여자지?”
다시 봐도 남녀 비율이 아예 박살 나 있었다. 남자를 찾아보기도 힘들뿐더러 스펙도 영 비실비실했다.
“마음에 안 드네. 심지어 다 예쁘잖아.”
“글게. 왜 다 예쁘지?”
나는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사진으로 사기 쳤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보이는 바로는 다들 한 미모를 자랑했다. 나이도 20대를 넘지 않았다.
“좋냐? 좋냐고...!”
팡팡팡. 한여름이 엎드린 내 위에 올라타서 주먹으로 등을 귀엽게 내리쳤다.
“어, 거기 좀 두드려 봐라. 시원하다.”
퍽!
윽. 두드리는 수준이 아니라 강렬한 주먹이 등판에 꽂혔다. 순간 숨이 턱 막힐뻔했다.
“얌마,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왜 화풀이야.”
“나도 남자로 구성된 무력대 하나 만들까.”
“응, 신녀는 그런 거 불가능함.”
“이씨... 어차피 진짜 할 생각도 없었거든....”
“여자 뽑지 마?”
조금은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원한다면 스펙은 모자라도 그냥 남자로 채워도 그만이긴 했다.
“...능력 보고 뽑아. 성별 말고.”
“명대로 합죠. 이래서 내가 한여름 씨를 좋아해.”
“읏...!”
슬슬 후보군은 어느 정도 좁혀졌다. 처음부터 적룡대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었다. 내겐 손발이 되어줄 소수의 인원만 있으면 족했다.
대략 열 명.
당장은 그 정도만 뽑을 생각이다.
“얘 이력 특이하다.”
등 위에서 내려온 한여름이 서류 하나를 뚫어지게 보다 내 쪽으로 건넸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의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갑인데? 나이 스물에, 이름은 적하....”
멸문한 청성의 진신 절기,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의 유일 계승자.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청운과 적하를 합일한 천재.
절정 고수.
이 정도면 중원무공아카데미에 당장 집어넣어도 상위권의 인재였다.
“청성이면 정파 출신이지?”
“그렇지. 구파잖냐. 지금이야 구파 중 멀쩡한 곳이 거의 없다만.”
“구파 출신이 왜 신교까지 흘러들어왔을까?”
“글쎄다. 워낙 개판인 세상이니 사정 하나쯤은 있는 모양이지. 사문이 멀쩡한 것도 아니고.”
“하긴, 그건 그래.”
얘는 무조건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지도 경지였지만, 저 나이에 청운과 적하를 합일했으면....
천하제일도 바라볼 수 있는 자질을 지녔다고 볼 수 있었다. 무공 역시, 구파의 진신 절기면 아무리 떨어지는 것이라도 게임 내에선 최소 S급이었다.
청운과 적하를 합일하는 데 성공한 청운적하검이면 추정컨대 SSS급. 플레이어가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무공이다.
왜 저런 애가 굳이 내 수하로 들어오겠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실력이 아닌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
일단은 내가 가장 원하는 인재상에 완벽히 부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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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가볼게.”
한여름이 현관문 앞에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함께 보냈던 시간은 찰나와도 같이 흘러갔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나도, 얘도 그렇게 여유가 많진 않았다.
“그래. 몸조심하고, 힘들면 연락해.”
“응. 사랑해.”
쪽.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한여름이 까치발을 딛고 가볍게 키스했다. 짙디짙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나도.”
입술을 떼고, 나는 나직하게 화답했다.
“...어?”
한여름이 어깨를 움찔 떨면서, 멍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뭘 그렇게 보냐?”
“방금 뭐라 했어?”
두근두근. 한여름의 빨라진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뭐라 하긴. 나도 그....”
“그...?”
부담스러울 정도로 동글동글한 눈망울을 마주치니, 막상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너 좋다고.”
“그냥 좋기만 한 거야?”
“얌마, 뭘 듣고 싶은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