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31)

잠시 새초롬하게 날 흘겨보던 한여름이 입꼬리를 살살 올렸다. 묘하게 얄미운 표정이었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야?”

“아니거든.”

“맞네. 우리 무공이, 부끄러웠쪄요? 귀엽긴.”

“...됐다.”

묘한 열패감에 입을 꾹 다물자.

쪽. 다시 한번, 한여름이 입술을 가볍게 부딪쳤다 뗐다.

“부끄러우면 말 안 해도 돼. 누나는 다 이해한단다.”

“어딜.”

의기양양하게 이죽거리는 한여름의 허리를 양팔로 감싸 와락 내 품으로 안아버렸다. 그리곤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한여름의 몸이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천천히 안았던 팔을 떼자, 거기엔 홍당무가 되어버린 한여름이 있었다.

“으읏....”

생각보다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터질 것 같이 달아오른 귓불과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귀엽다.

얘는 역시 이럴 때가 가장 귀엽다.

나는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헝클었다. 한여름이 소심하게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 나가야 하는데. 머리....”

“어, 미안.”

우리가 있는 장소는 현관이었다. 그리고 한여름은 이제 신녀궁으로 복귀할 때였다. 나는 조심스레 한여름의 머리를 다시 정돈했다.

“됐다.”

“응. 너도 몸조심하고, 무리하지 마.”

“오냐. 가자.”

준비를 마치고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이미 신녀궁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나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한여름은 그사이를 지나 차에 탑승했다.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며 한여름이 떠나갔다.

어차피 금방 볼 텐데, 어딘가 아련한 느낌이었다. 나도 입매를 올리고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신녀궁 사람들까지 전부 떠나간 뒤.

가만히 한여름이 떠나간 곳을 응시하고 있자, 류은채가 조용히 내 뒤로 다가왔다.

“공자님.”

“어. 왔어?”

“적룡대 면접 일정은 그대로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응. 그대로 진행해줘.”

“알겠습니다.”

류은채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한여름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반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 역시 강해졌다.

‘쓰레기가 될 각오.’

그냥 기약 없는 수련을 계속해 나갈 것이냐.

모든 걸 털어놓고 양해를 구해야 하나.

아니면 숨기고....

어느 쪽이 나와 한여름을 위한 길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제는 아마 내가 죽는다 해서 한여름도 죽는 건 아니기에 더 그랬다. 신교의 신녀 후보가 된 이상, 어떻게든 신교에서 살릴 테니까.

인간의 일상이란 파문의 연속이라 했던가. 천하연이 내 마음속에 던진 작은 조약돌에서 일어난 파문은, 그저 끝없이 퍼져만 갔다.

***

“안녕하세요, 공자님!”

면접실 문이 열리고, 작은 체구의 여성이 허리를 꾸뻑 숙이면서 인사했다.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업되게 만드는 발랄한 목소리. 다람쥐를 연상케 하는 귀여운 외모. 그러면서도 신비로운 하늘색의 머리칼과 주홍빛 눈동자.

구름이 그려진 단아한 무복.

청운적하검 유일 계승자, 적하였다.

청운. 푸른 구름.

적하. 붉은 노을이라는 말처럼, 외형부터 딱 그에 걸맞은 탓에 나는 속으로 말없이 웃었다.

“말 편하게 하겠습니다.”

“옙!”

일단. 나는 사무적인 태도로 기본적인 사항을 물었다.

적하는 내 건조한 물음에도 당차게 대답했다.

특별한 건 없었다. 대부분은 서류에 나온 내용들이었으니까.

의례적인 검증이 끝나고, 이제 내 개인적으로 핵심적인 질문들이 남았다.

“나와 함께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데, 괜찮나?”

“괜찮아요.”

“보상도 없이 게이트와 침식지대를 전전해야 할 수도 있다.”

“무인이라면 다들 그럴 각오 정도는 하는 것 아닌가요?”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이 적하가 되물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사람을 수없이 죽이게 될 것이다.”

“탕마멸사蕩魔滅邪. 그자가 악인이라면 제 검이 망설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걸 당돌하다 해야 하나, 겁이 없다 해야 하나. 천‘마’신교의 한복판에서 탕마멸사를 부르짖는 아이라니. 왜 저런 실력에도 겉도는 건지 짐작이 갔다.

나는 메모하던 내용과 서류를 아예 책상 구석으로 슥 밀어놓고, 적하의 정면에 얼굴을 좀 더 가져다 댔다.

“저, 공자님?”

“명문 구파 출신의 무공을 익혔으면서, 신교엔 왜 들어왔지?”

“음. 확실히, 많이들 궁금해하긴 하죠.”

적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답은?”

“출세하려고요!”

맹랑한 음성으로 적하가 답했다. 도문 출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속적인 대답이었다.

“...출세?”

“네. 무림맹은 꽉 막힌 집단이라 제가 파고들 틈이 잘 안 보이더라고요. 다 망해버린 청성은 제 뒷배가 되어줄 수 없으니까요. 스승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래서 신교로 왔습니다!”

“신교는 다르다?”

“다르죠. 여긴 철저한 실력주의거든요. 게다가 저 일단은 도문 출신이잖아요? 스승님께 배운 대로 점을 쳐 보니까 신교로 가라 나오더라고요. 귀인을 만날 거라든가.”

얘기하면 할수록, 상당히 엉뚱한 성격이었다. 출세를 위해 냉철하게 분석한 결과인가 싶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점을 쳐서 판단했다니.

“그런 것치곤 그간 별 활동을 하지 않았던데? 그 실력이면 외당이든 내당이든 십마전이든. 대주급은 가볍게 꿰찼을 텐데 말이지.”

고개를 갸웃하며 적하가 되물었다.

“아무 곳이나 소속될 수는 없죠. 뭐든 처음이 중요한 거잖아요?”

“미리 말하지만, 난 형식뿐인 제자다. 실권은 없어. 출세하고 싶다면 차라리 다른 곳이 나을 거다.”

“공자님은 의외로 둔한 면이 있으시네요.”

“내가?”

“네. 출세하는 가장 빠른 길이 뭘까요?”

“강해지는 것이지.”

“원론적으론 옳은 얘긴데, 무공 경지가 하루아침에 팍팍 늘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고갯짓으로 묵묵히 동의를 표하자, 적하가 말을 이었다.

“오면서 보니까 면접장에 죄다 여자던데, 공자님은 그 이유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의문이긴 했다만.”

“역시.”

적하가 내 귀에 입술을 대고 달싹거렸다.

“공자님, 그 이유는 말이지요. 다들 노리고 있는 것이지요, 공자님을요.”

순간 머리가 띵했다. 생각해 보니 당연했다. 장로들이 무얼 약속했든, 후계자도 아닌 천마 제자의 부하로 들어올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신청자들을 보면 어릴 적부터 나름 기재 소리 듣고 살았을 텐데, 적룡대의 일개 대원으로 만족할 리는 없었다.

적하처럼 애매한 입장도 있었지만, 명문 세가의 여성들도 분명 있었는데 왜 신청했는지 궁금했건만.

이제야 수수께끼가 조금은 풀린 느낌이었다.

“나는 함께 싸울 수하를 원하는 거지, 결혼할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다.”

“예, 그러시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서로 지내다 보면 뭐, 으쌰으쌰 할 수도 있는 거고. 주공主公이 상공相公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처녀가 못하는 말이 없군.”

“제가 처녀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머리색 특이한 애들 특징인가.

말투만 다르지 방금은 제갈혜를 연상케 하는 발언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됐다. 너도 그런 걸 꿈꾸고 있다면 포기해라. 절대 그럴 일은 없으니.”

“사실 전 별로 기대 안 했답니다.”

“그럼 왜?”

“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매일 하는 일이 점을 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공자님이 제가 찾던 귀인이라고 나오더라고요.”

“...미신이다.”

“적중률이 아주아주 높은 미신이죠.”

얘를 뽑아야 하나 강렬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런 인재를 놓치기엔 너무 아쉬웠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결정을 내렸다.

“신교의 법도에 따르면 한 번 이쪽으로 오면 내 허락 없이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요. 전 공자님께 올인하는 거랍니다.”

“합격이다. 네가 첫 번째군.”

“감사합니다. 실력도 첫 번째가 되도록 소녀, 분골쇄신하겠사옵니다!”

“오냐, 나가봐라.”

“옙!”

적하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면접실을 나갔다.

구파 출신이라기에, 진중한 모습을 상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지만.

대화하면서 슬쩍슬쩍 기도를 살펴보니 확실히 실력은 빼어났다.

어차피 실력이 우선인 세상이었다. 무인 중에서 성격 독특한 사람이야 워낙 많아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괜히 별호에 괴怪가 붙는 자들이 많은 게 아니거든.

“다음.”

대기 중인 다음 면접자를 불렀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때로는 말로.

때로는 대련까지 섞어 가며 온종일 면접을 진행했다.

그렇게, 내 면접 태블릿에는 이내 열 명의 여성만 남게 됐다.

남성들은 실력이 확연히 떨어지는 탓에, 뽑고 싶어도 힘들었다.

현재의 실력이 아닌 잠재력 위주로 뽑았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태블릿을 쳐다보며 다시 한번 명단을 확인했다.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 적하

뇌정마공雷霆魔功 예서나

멸절마검滅絶魔劍 노서진

초마신공焦魔神功 홍은주

낙성십이검落星十二劍 단목여진

구유마장九幽魔掌 이선하

팔황난검八荒亂劍 위지연

무영검無影劍 사공란

광풍십팔도狂風十八刀 상관설

공손검법 公孫劍法 공손린』

각자 익힌 대표 무공과 이름들이었다.

신교에서 유명한 세가의 자제들도 꽤 있는 등.

명단을 정리하고 보니 내 예상을 뛰어넘는 무력대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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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 은빛 실선의 궤도가 기이하게 꺾이면서 표적을 꿰뚫었다. 사부가 쏘아낸 지풍을 나는 건곤대나이로 계속해서 비틀었다.

이건 단순히 궤도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해서 정확히 다른 방향에 꽂아 넣는 게 목표인 수련이었다.

파파팍- 연속해서 이어진 지풍도 거뜬히 막아냈다. S++라는 등급답게, 건곤대나이는 방어에 한정하면 탁월한 효능을 자랑했다.

플러스 등급이 하나 붙을 때마다 특정 부분에선 한 단계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S+급은 특정 분야에서 SS급보단 낫지만 SSS급에는 조금 모자람이 있었다.

따라서 S++의 건곤대나이라면, 방어에 한정했을 시 SSS급을 뛰어넘는 성능이라는 얘기였다.

나도 개념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이 정도 상위 절기에서 플러스 등급을 본 건 처음이라 꽤 신기했다.

“사부님, 질문 있습니다.”

파파파파팍-

말을 꺼내자 내가 여유가 있다 판단했는지,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말해라.”

말하라면서 어째 점점 빡세지는 탓에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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