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31)

“적룡대, 다 뽑았습니다!”

“사소한 것까지 내게 보고할 필요는 없다.”

“보고가 아니라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퍽- 순간 건곤대나이의 미세한 틈새를 뚫고 내 명치에 지풍이 박혔다.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지자 그제야 공격이 멎었다.

“부탁?”

차가운 목소리로 사부가 내뱉었다.

“딱 열 명 뽑았습니다. 합격진 괜찮은 거 없습니까?”

“합격진이라.”

사부가 팔짱을 끼고 상념에 잠겼다. 지금까지 사부를 본 바로, 저러면 성공이었다. 거절할 거면 진짜 가차 없이 거절하는 사람이거든.

게다가 수련은 험악하게 하면서도, 가르침에 관한 부분에서는 엄청나게 관대한 게 사부의 성격이었다.

“소수정예로 갈 생각이더냐?”

“예. 당분간은 그럴 생각입니다.”

“열 명이면 마침 적절한 게 있군.”

이윽고 사부가 입을 열었다. 오오. 역시 사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름이 어떻게 되옵니까?”

“십마광무진十魔狂舞陣. 정확히 열 명이 펼치는 합격진이다.”

누가 마교 아니랄까 봐, 합격진부터 꽤 살벌한 이름이었다.

“혹, 마공을 익힌 자만 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 무공 종류는 상관없다. 대신 합격진을 이루는 구성원 전부 뛰어난 재능이 필요하다.”

“그건 문제없습니다.”

까놓고 무혼이 아니었다면 나는 발치조차 따라가기 힘든 기재들이거든.

“흑풍단주.”

사부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기척도 없이 어둠 속에서 검은 피풍의를 입은 사내가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흑풍단黑風團. 신교에서 최강을 다투는 무력집단이자, 사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구성원들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어 나도 정확한 건 모른다.

“십마광무진 전수는 흑풍단에게 일임하겠다. 알아서 하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흑풍단주가 나와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적룡대 준비가 끝나면 제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적룡대 인사에 관해선 발령이 끝났고, 이제 소집만 남았다.

“제자야.”

흑풍단주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부가 말을 걸어왔다. 수련 장소 근처의 바위에 고아한 자세로 사부가 걸터앉았다. 외부라 산바람이 나부끼는데도 사부는 머리털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신선과도 같은 신비로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사부는 마인이니 신선이 아니라 마선魔仙이겠지만.

“예, 사부.”

“너는 무엇을 이루고자 함이더냐.”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 훅 들어왔다. 사부는 가끔 이런 기이한 언행을 보일 때가 있었다. 전에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현경에 이르러 상단전이 트이면서 얻는 감각 때문이라던가.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을 받았었다.

이럴 때면 마치 사부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생존입니다. 겸사겸사 무의 끝을 보고 싶다는 소망도 있습니다.”

“전자는 가능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불가능의 영역이구나.”

“어차피 꿈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무극을 보고자 함이니.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한다 하여, 잘못된 건 아니지.”

“갑자기 이런 걸 묻는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사부가 제자의 꿈도 몰라서 되겠느냐.”

사부의 시선이 어딘가 먼 곳을 향해있었다. 대체 뭘 시야에 넣고 있는 건지, 나로선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 생존에 방해될 놈들은 전부 치울 생각입니다. 혈교든,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물이든.”

정확히는 내가 생존해서 저런 것들을 치워야 한여름이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을 테니까.

“광오하구나.”

“모름지기 천마의 제자라면, 광오한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 또한 옳다.”

어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사부가 지었다.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 것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대충 분간이 갔다.

“합격진,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곤대나이도 그렇고, 십마광무진 역시 천금을 가지고도 못 배울 상승 무학에 속할 거다. 감사를 표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별거 아닌 것에 감사할 필요는 없다.”

“그럴 수는 없지요. 감사합니다, 사부님.”

“...고집하고는. 됐다. 혈교를 치울 생각이라 하였느냐?.”

“예. 괴물 막는 것도 바쁜데 그딴 집단이 활개 치게 둘 생각은 없습니다.”

“수많은 살인을 해야 할 것이다. 네 손에 묻은 피가 도저히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악인이라 하나 그들도 인간이다. 견딜 수 있겠느냐?”

“각오한 바입니다.”

“그렇다면 선택하거라.”

“선택 말입니까?”

“그래. 먼저 수련 위주로 경지를 끌어올릴 것인지, 아니면 혈교를 직접 처단할 것인지.”

“남의 손에 맡길 생각 없습니다. 적룡대가 십마광무진을 익히는 즉시, 실전을 겪게 하고 싶습니다. 적룡대는 혈교와 살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차후 적룡대라는 이름이 혈교에게 공포로 군림하도록. 그렇게 만들 겁니다.”

나로서도 단순 수련보다는, 실전을 통해 경지를 끌어올리는 게 필요했다. 또한 정파의 말랑말랑한 샌님들은 혈교 같은 것들과 싸우기엔 독기가 부족했다. 인간을 지키려고 괴물 상대로 싸울 때는 강할지 몰라도. 비열한 혈교 놈들을 상대하려면 신교 쪽이 더 적합했다.

당문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이독제독以毒制毒.

그것이 내가 만들고자 하는 적룡대의 역할이었다. 적룡대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물론 심하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정 못 버틸 거 같으면 보내줘야지. 어차피 적룡대의 가장 선두에는, 내가 설 예정이다. 수하를 소모품으로 쓸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그리고.

적룡대는 정파 무인들, 특히 아카데미 생도들에게도 큰 자극이 될 거다. 처음에는 마교라 멸시하고 혐오하겠지만, 억지로라도 교류하다 보면 또 달라지는 법이다. 원래 인간이란 서로 벽을 세우고 대화를 아예 하지 않을 때 가장 날이 선 행동을 하는 법이었다.

게이트 사태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는 이상, 강제로라도 섞어버리면 결국 어떤 형태로든 완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과정이 절대로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나이가 어리고 잠재력이 충만한 아이들을 뽑은 이유는 그 때문도 있었다.

비슷한 연배여야 서로 경쟁심을 가지기 쉬우니까.

“그런가. 네 뜻은 충분히 이해했다.”

어딘가 씁쓸한 음색으로 사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사부가 뒷짐을 진 채, 느긋한 걸음걸이로 움직였다. 보기에는 그랬으나, 나는 경공을 썼는데도 따라가기 힘들었다. 한참을 이동한 끝에, 사부와 나는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벽 내부로 들어갔다.

높은 벽 안쪽으로 축구장 넓이의 수십 배는 되어 보이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잘 보거라.”

사부가 검을 뽑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뽑지 않았던 검이었다. 이윽고, 신교 교주의 상징인 천마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웅- 검명이 울리면서, 산천초목이 숨을 죽였다. 검두부터 검파, 검신까지 전부 묵색의 기이한 빛이 아른거렸다.

나는 사부의 뒤쪽에서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검날을 휘감기 시작했다.

사부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과거부터 신교는 마공을 익힌 무인들이 많았다. 마기란 극도로 위험한 힘이니. 마공을 익히다 폭주하여 되돌릴 수 없는 마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탄생한 검이 있다.”

쿵-

사부가 손짓하자 주변에 칠흑의 강기검이 하나둘씩 둥둥 떠올랐다.

그 숫자가 서른세 개가 되었을 때, 강기검은 불어나는 걸 멈추고 허공에서 넓게 공터를 둘러쌌다.

‘미친....’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상단전을 인두로 지지는듯한 통증이 일었다. 강기검의 배치가 끝나자, 사부가 몇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것이 마를 제압하는 검. 봉마검형封魔劍形이라 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부가 천마검을 지면에 내려찍었다. 천마검이 지면에 박히는 것에 맞춰, 공중에 현현했던 강기검도 서로 공명하면서 내리꽂혔다.

콰과과과광-

지면에 거대한 균열이 질주하며 땅거죽이 뒤집히고,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다행히 텅 빈 공터라 다행이지.

만약 저 안에 무언가 있었다면, 형체조차 찾지 못하고 증발해버렸을 게 분명했다.

단순히 범위가 넓은 게 아니라, 위력이 너무 초월적이었다.

무혼의 보조를 받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이 기술이 봉마검형입니까?”

나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사부에게 물었다.

“봉마검형, 육신적멸六神寂滅이라 한다. 상대를 가둬 멸하는 게 목적인 초식이다.”

“엄청나군요.”

“신교는 도가나 불가처럼 법력을 통해 마기를 제압하지 않는다. 더 강한 마로 마를 찍어누르지.”

“제가 익히기엔 힘들어 보입니다만.”

당장 ‘강기검’을 다수 구현해야 하는데.

초절정의 경지에서도 이건 불가능했다. 최소 화경은 올라야 흉내라도 내지.

아니면 초절정에 올라 버프를 받아야 억지로나마 구현이 가능할듯했다.

그마저도 내공 소모가 엄청날 거다.

“봉마검형은 다른 천마검결과 다르게 천마신공을 익히지 않아도 배울 수 있는 무공이다. 네가 검을 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허나 어렵지 않다. 검은 수법의 연장선이라 보면 된다.”

독고패 총장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화경에 오른다 해도 봉마검형을 난사할 수는 없겠지만, 만일 이것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절체절명의 상황에 구명절초로 탁월한 효능을 발휘할 터이니. 네가 혈교를 멸하고자 한다면 꼭 익히는 게 나을 것이다.”

“...매번 감사드립니다, 사부님.”

역시.

다시 생각해 봐도, 사부를 만난 건 최고의 기연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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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각 주변에는 빈 건물들이 꽤 많았다. 다만 이용만 하지 않을 뿐이지, 철저하게 관리는 계속해왔다.

그리고 흑룡각이 새 주인을 맞이한 이래, 주변 건물들은 지원 건물로 완벽히 탈바꿈했다. 호위대를 위한 화려한 숙소, 거대한 연무장. 편의 시설 등.

지금은 적룡대를 위한 거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새하얀 돌이 넓게 깔린 연무장 중앙에 적룡대 인원이 한둘씩 모였다. 서로 다른 소속에서 뽑혔기에 아직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거대한 연무장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그녀들이 내뿜는 기파만큼은 이 공간 전체를 꽉 채울 만큼 대단했다.

“다들 모였나.”

쿵. 모여있던 여성들이 발 구르기를 하며 포권했다.

김무공을 끝으로, 적룡대 십인 포함 11명이 모두 모였다. 하나같이 외모가 빼어난 탓에, 남자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으나.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미동조차 없었다.

정면에서 담담하게 좌중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면접 때 말했듯이, 존대는 생략하겠다. 반갑다. 다들 알겠지만, 천마 천위강 교주님의 두 번째 제자, 김무공이다.”

나직한 김무공의 인사에, 적룡대는 긴장하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먼저 한 가지 고지할 게 있다.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적에 대해서다. 다들 괴물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단호하게 김무공이 고개를 내저었다. 적룡대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내가 최우선으로 토벌하고자 하는 적은 혈교다. 우리는 혈교의 공포로 군림할 것이다. 따라서 혈교가 저지른 온갖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고, 수많은 살인을 하게 될 것이다. 두려운 자는 미리 빠져도 좋다.”

김무공의 말에 고요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연무장을 벗어나려 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김무공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없는 것 같은데요?”

적하가 손을 번쩍 들면서 얘기했다.

“좋다. 나중에라도 좋으니 힘들면 얼마든지 말하도록.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럼, 지금부터 할 일이 있다. 적룡대. 지금은 고작 열 명의 조직이지만, 이끄는 자는 필요한 법이다. 대주를 뽑아야 하니, 생각 있는 자는 지원하도록.”

“대주는 어떻게 뽑습니까!”

이번 역시 적하가 소리쳤다.

“신청자끼리 대련을 벌여 이기는 자가 대주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김무공이 생각하기에 당장 이것만큼 불만이 적은 수단도 없었다. 무인이란 결국 무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니까.

“마음에 드네요. 저 신청할게요.”

당돌한 성격답게 적하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적하가 나서자, 뒤이어 한 둘씩 발을 옮겼다.

결국, 열 명이 전부 신청하는 사태가 되어버렸다.

“역시 이렇게 됐나. 지금부터 대주 선출을 시작하겠다. 흑풍단주님.”

김무공의 등 뒤에서 흑의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적룡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풍단주는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김무공은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흑풍단주에게 부탁을 해서 준비를 해놨다.

곧바로 흑풍단 일부가 나타나 비무 준비를 위해 연무장을 분리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능숙하게 행사를 위한 천막을 치고, 대기 장소를 만들었다.

김무공과 흑풍단주가 천막 아래 마련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첫 번째 비무는 청운적하검을 익힌 적하와 뇌정마공을 익힌 예서나였다.

“단주님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어디서 쉬이 볼 수 없는 기재들입니다. 판단이 어렵군요. 김무공 공자님의 안목이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오, 시작하나 봅니다.”

파지직- 예서나의 몸 주변에 노란 번갯불이 튀기 시작했다. 뇌정마공은 뇌기를 다루는 극도로 위험한 무공이었다. 익히기 어려운 대신, 그만큼 탁월한 위력을 자랑했다.

뇌기가 실린 공격은 무기를 쓰는 상대에게 위협적일뿐더러, 권사라면 공격 하나하나가 내가중수법처럼 작용했다.

“뇌정마공이라. 장로님 중 한 분의 독문무공이지요. 저 아이는 적하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열여섯의 나이에 청운과 적하를 합일한 천재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적하는 쌍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청운적하검.

원래는 청운검과 적하검이라는 무공이 따로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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