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31)

막상 자대 가는 순간 싹 잊게 되는 매직이 벌어진다.

아무튼.

둘이 투닥투닥 하는 걸 보고 웃으면서 한 마디씩 거드는 걸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첫 실전 전까지 이게 되는 게 중요했는데 말이다.

저렇게 친한 상태에서 ‘실전’을 겪으면, 강철과도 같은 유대가 생기니까.

‘흑풍단주님에게 고마워해야겠네.’

역시 신교 최강의 무력대를 이끄는 자답게, 사람 키우는 건 확실했다.

***

[치직- 곧 작전 지역 상공에 진입할 예정입니다. 5분 안에 도착합니다.]

헬기 조종사로부터 무전이 들려왔다. 무소음 스텔스 헬기라는 말처럼, 일반 헬기에 비해 소음이 극도로 작았다.

“아우, 비 엄청 오네요.”

쌍검을 등에 멘 적하가 바깥을 쳐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오늘 날씨는 비바람으로 시계가 개판이었다.

“작전해야 하는 입장에선 행운이지. 준비해라.”

“옙, 대장.”

언제부턴가 적하는 날 그냥 대장으로 부르기로 한듯했다. 어차피 나도 예의 따지는 성격은 아니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류은채가 보면 엄청나게 뭐라 하겠지만.

사내라면 가스라이팅을 단호히 거부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미리 말했듯이 증거 확보가 중요하다. 파괴력이 강한 무공은 자제해. 다짜고짜 청운적하검 날려서 화물선 반쪽 내면 안 된다?”

“아니, 대장은 왜 저한테만 그래요.”

적하가 입술을 샐쭉거리며 날 흘겨봤다.

“네가 젤 불안하니까 그렇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닷. 오늘 점이 택화혁澤火革이거든요.”

“그게 뭔데?”

“아무튼 좋은 겁니다! 설명할 시간 없어요.”

그놈의 점. 문제는 저 점이 은근 잘 들어맞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서 관망했지만, 적룡대 다른 사람들조차 슬슬 적하에게 물들고 있었다. 대놓고 오늘의 운세 알려달라는 것만 몇 번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강합니다. 강습 준비 부탁드립니다.]

시작할 때가 되니, 아까까지 서로 농담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적룡대 무전 채널을 열었다.

[목숨이 우선이다. 절대 무리하지 마라. 위험인물은 혼자 싸우기보단 합공으로 처리하고, 지원 요청을 아끼지 마라. 다들 무운을 빈다.]

말을 마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헬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어두운 바다에 떠 있는 화물선의 모습이 시야에 서서히 들어왔다. 희미한 서치라이트가 내뿜는 빛을 피하며 헬기 두 대가 화물선 근처로 다가갔다.

‘후우....’

조용히 심호흡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인원을 나눠 각자 화물선 일부를 제압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제압할 곳은, 브리지였다.

아마도 위험인물이 지키고 있을 가능성이 큰 장소였다. 이윽고 헬기의 문이 열렸다.

“먼저 내려간다. 잘 해라, 믿는다.”

나는 잔뜩 긴장한 적하의 등을 한 번 두드려 주고, 바로 공중에서 뛰어내렸다.

빗방울이 볼을 스치며 맹렬한 속도로 하강했다. 아래는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였다. 상대방이 침투를 인지하는 순간 증거를 인멸하려 들 수 있기에 기본적으로는 잠입이 원칙이었다.

쿵- 몸이 바다에 가라앉으며 강력한 충격이 느껴졌다. 미리 진기를 두르고 있었기에, 충분히 버틸만했다.

곧바로 용천혈에 내기를 실어 수면 위로 뛰어오르면서, 바다를 단숨에 달렸다. 우천이 몰아치는 바다가 꽤 성질을 부렸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수상비水上飛 정도야 이제 그리 어렵진 않았다.

바다에 이어 화물선까지 단숨에 오른 나는 기감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 셋.’

의외로 무인은 아니었다. 총을 든 용병들로 보였다.

파바박- 혈라지를 날려 셋의 아혈과 마혈, 훈혈을 동시에 짚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용병들이 쓰러졌다.

기척을 죽이고 화물선 복도를 달리면서 감시카메라도 전부 박살 냈다. 놈들이 이상을 인지해도, 무슨 사태인지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하도록.

‘둘.’

이번 역시 똑같이 진행했다. 무인이 아닌 자들은 굳이 죽이지 않았다. 살인의 거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입이 되어줄 거다. 적룡대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입.

나는 적룡대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쿵- 가벼운 폭렬장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자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대신 무인은 가차 없이 죽였다. 혈교의 주구일 수 있으니까.

하나하나, 조용히 길을 가로막은 자들을 전부 처리하고 나는 브리지 근처에 도착했다.

‘다섯.’

그중에서 둘은 기세가 꽤 강대했다.

자료에서 본 적 있었던, 흑백쌍귀黑白雙鬼로 추정됐다.

다음화 보기

다섯 놈 전부 무인이었다. 안쪽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거로 보아, 이상은 확실히 인지한듯했다.

꽝! 브리지의 두꺼운 문을 발로 차서 박살 냈다. 무거운 쇠문이 브리지 안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나는 천마신공의 구결을 운용하며 발을 내디뎠다. 폭발적인 공력이 몸을 휘감았다.

“누구냐!”

놈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기겁했다. 묵묵히 혈라지를 날렸다. 세 놈은 목이 꿰뚫려 즉사했고, 나머지 두 놈은 손을 휘둘러 쳐냈다. 경악한 두 놈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흑과 백. 대비되는 복장을 한 무인들이었다. 외형으로 보아 일본인으로 추정됐다. 들어오기 전 감지했던, 강맹한 기세를 가진 둘이 이들이었다.

보자마자 비소가 절로 나왔다. 컨셉 하고는.

“네놈들이 흑백쌍귀인가.”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면서 이런다?”

놈들이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그러면서도 쉽게 달려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연하겠지. 지금 나는 풍지해조차 화경으로 착각했던 기세를 감추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나는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덕분에 놈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고용인에 대해 말하라.”

“어린놈이 오만방자하군. 무슨 사술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안 통한다!”

나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심리 싸움에서는 내가 압도적으로 앞섰다.

“안 통한다면서, 왜 뒷걸음질이나 치고 있지? 순순히 불거나, 덤비거나. 둘 중 하나만 해라.”

“...놈, 대체 어디서 온 거냐.”

하얀 옷을 입은 백귀가 내게 물었다.

“신교神敎.”

“그, 그럴 수가. 신교가 대체 왜...! 이곳은 정파의 영역이다!”

놈이 눈을 부릅떴다. 무림맹 1급 수배자 주제에 정파를 논하는 걸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파는 신교의 행사를 막지 못한다.”

“...얘기하면 우리를 살려주겠나?”

신교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태도가 바로 변했다.

뒷배가 참 좋긴 좋다.

게다가 놈들이 가진 무전에서는 연신 지원을 요청하는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적룡대 쪽도 할 일을 잘 하는 모양이다.

“순순히 분다면.”

놈들이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정확한 건 모른다. 거액의 대가를 받고 의뢰를 받았을 뿐이니.”

“의뢰내용은?”

“보시다시피. 선박의 호위다.”

“섬 내부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 거지?”

“우린 모른다. 섬 내부로 진입은 허가되지 않았다.”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듯했다. 어차피 거짓이어도 상관없었다.

“고작 그것뿐인가?”

저벅.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놈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자, 잠깐! 하나 더 있다!”

“말해라.”

검은 옷을 입은 흑귀가 옆의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다급히 보여줬다.

“이걸 봐라.”

“공供? 그게 뭐?”

이바지하다, 받들다의 뜻을 지닌 한자였다. 놈들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모호했다.

“모르는가...? 일본에서 저 뜻은 좋은 의미만으로 쓰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어린아이, 코도모子供를 이렇게 쓰겠는가!”

子供->子ども.

재빨리 적어서 보여준 내용을 보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내가 일본 문화도 알아야 하나?”

“공供은 제물의 뜻이다. 제물! 우리가 실어나른 화물 중에 저렇게 적힌 것들이 여럿 있었다.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화물의 형태로 보아 인간 크기의 관이었다.”

“이 배에도 있나?”

“아니, 없다! 대부분 물자가 섬으로 들어갔다.”

“화물 선적 장소. 전부 불어라.”

“일단 우, 우리를 내보내 주면 말하겠다.”

“지금 협상을 할 처지는 아닌듯한데?”

나는 다시 한번 끌어올린 기세를 놈들에게 집중했다. 놈들이 부들부들 떨며 눈빛을 교환했다.

“아, 알았다. 말하겠다!”

놈들이 지명을 하나둘씩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듣는 내용은 실시간으로 천비각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항적 데이터와 비교하여 분석은 그쪽에서 해줄 것이다.

“아는 건 다 말했다! 약속대로....”

쿵! 나는 발을 살짝 들어 찍어 내렸다. 아까와는 달리, 의념이 실린 천마군림보였다. 올올이 풀려나오는 패도적인 진기의 파동이 브리지를 억압하며, 놈들이 일순 동작을 멈췄다.

반응하지도 못할 사이에 백귀의 근처로 다가간 나는 목을 향해 수도手刀를 휘둘렀다.

퍽- 번뜩이는 빛줄기가 백귀의 목에 한 줄기 혈선을 그렸다. 손날이 놈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살과 뼈가 대번에 잘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피분수와 함께 주인을 잃은 목이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

자세를 틀어 장심에 모은 혈수마공의 기운을 흑귀에게 때려 박았다.

“끄아아악! 사, 살려준다고....”

온몸이 불타오르는 고통에 놈이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차갑게 흑귀를 응시하며 머리통을 붙잡고, 콘솔 근처에 내려찍었다.

꽝! 강철로 된 콘솔에 부딪힌 두개골이 으스러지며, 육편으로 변한 뇌 조각과 핏물이 손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약속?

악인 따위와 한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다. 애초에 난 이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무림맹에서 1급 수배를 걸었을 정도면, 한두 건의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겠지.

[기관실, 제압했습니다.]

[상갑판, 제압했습니다.]

.

.

이윽고 적룡대로부터 하나둘씩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브리지. 제압했다. 다음 포인트에서 합류하라.]

나는 브리지를 나와 합류 장소로 이동했다. 나머지는 근처에 대기 중인 유령단이 처리해줄 거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대기하고 있자, 적룡대가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주군.”

물에 젖어 축 처진 핏빛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적룡대주 홍은주였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몸 주변에 아른거렸다.

“다친 덴 없나?”

“예. 적룡대 십인 모두, 부상자 없습니다.”

“특이사항은?”

“화물칸이 비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진즉 하역이 끝난듯합니다.”

“그런가. 이동한다.”

담담히 화물선 위에서 섬을 향해 뛰어내렸다. 지금쯤 섬 쪽에서도 이상을 인지했을 거다. 이젠 속전속결이었다.

[상관설, 공손린. 둘은 선착장을 담당한다.]

[예, 주군.]

둘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은 나를 따라 동시에 내달렸다. 경공 질주가 비바람을 가르고 쭉 이어졌다.

길을 따라 중간중간 지키는 자들이 있었지만, 순식간에 처리하고 이내 시설의 경계까지 도착했다.

[계획대로 둘씩 흩어져서 시설을 소탕한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는 미리 진입하지 마라.]

[예!]

동시에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홀로 천비각에서 지하 시설의 입구가 있으리라 추정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규모 지하 시설인 만큼 진입로가 한두 군데는 아니었다. 다만, 엄청난 양의 물자를 집어넣는 가장 큰 입구는 있기 마련이었다.

천비각이 지정해준 좌표로 가자, 거대한 콘크리트 방공호 입구를 경계하고 있는 사내 둘이 보였다.

경지는 일류 정도.

“누...!”

빠각. 달리면서 그대로 슬격으로 몸통을 올려쳤다. 일격에 놈의 갈비뼈가 전부 부러져나가고,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짓이겼다.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한 놈이 즉사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옆에 있던 놈이 검을 빼 들었지만.

팍- 가볍게 내지른 혈라지에 심장이 꿰뚫렸다.

경악한 채 굳어버린 눈동자를 뒤로하고, 나는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정답이다.’

기감으로 살펴보니, 메인 게이트는 이곳이 확실했다. 천비각이 확실히 유능하긴 유능하다.

장심에 혈수마공의 기운을 끌어모은 뒤, 방폭문에 대고 발출했다.

꽈아앙-!

두꺼운 방폭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내부로 가는 길이 열렸다.

[주군, 주변 진압은 끝났습니다. 환풍구를 포함한 출입구 역시 인원을 나눠 감시 중입니다.]

적룡대주 홍은주로부터 통신이 왔다. 벌써 정리를 끝낸 모양이다.

[대기하도록. 진입할 필요는 없다. 도망 나오는 놈들 위주로 처리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