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발바닥을 내려찍으며 즉각 내부로 진입했다.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왔다. 내부는 미로와 같이 넓었으나, 주요 통로는 한정되어 있었다. 나는 악취를 따라 기다란 길을 계속해서 달렸다.
앞쪽에 자료로 봤던 절정고수 하나가 복도를 지키고 있었다. 별호와 이름. 사실 잘 기억나진 않았다.
어차피 누구든 상관없다.
“여긴 어...!”
달리면서 눈을 부릅뜬 놈의 머리통을 붙잡고, 그대로 쥐어짰다.
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으스러졌다. 사망한 놈의 시체를 쓰레기 던지듯 버리고, 용천혈에 내기를 더하며 속도를 올렸다.
화물선과 달리 이곳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전부 무인이었고, 개중에는 혈공을 익힌 거로 보이는 놈들도 있었다. 놓치지 않고 기감을 넓혀 살피며 하나하나 전부 죽였다.
어렵진 않았다.
과거에는 드높아 보였던 절정 고수 역시, 생명을 불태우며 얻은 힘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졌다.
무인이 아닌, 연구직으로 보이는 자들은 용병들처럼 제압해놨다.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심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주변을 훑어보면 볼수록, 구조가 익숙했다. 나는 ‘이런 장소’를 겪은 적 있다.
개성. 당문 제약의 흔적을 찾았던 그곳과 비슷했다.
연구 시설이 거기서 거기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직감적으로 뭔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나는 철문 여러 개가 있는 넓은 장소에 도착했다.
그중 하나.
두꺼운 철문 안쪽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적혈귀.’
하나도 아니고 둘.
혈교가 관여되어 있음은 확실했다.
귀중한 적혈귀를 배치해놨을 정도니까.
꽝- 문을 발로 차서 날려버리자, 붉은 안광을 번들거리는 적혈귀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암연육양장.’
양손에 끌어모은 암연육양장의 기운을 적혈귀 두 놈에게 각각 먹였다.
“크르르르...!”
내부부터 불타올라 움직임이 멈춰버린 적혈귀를 내버려 두고, 나는 주변을 훑었다.
‘供.’
공供이 적힌 관이 수백 개가 있었다. 비릿한 냄새의 근원이 여기였다.
“미친놈들.”
관 중 하나를 열어본 순간, 육성으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관 안에는 채 열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아이의 시신이 보존된 채 담겨 있었다. 지독한 시독屍毒의 냄새가 풍겼다.
다음 관도 열었다. 진기 갈취에 말라비틀어진 시신이 보였다. 역시, 체구로 보아 어린아이의 시신인듯했다. 이건, 산채로 정기를 빼앗겼을 때 보이는 시신의 양태였다.
아무리 좆같은 세상이라지만, 이런 아이의 시신을 보는 건 입맛이 너무 썼다. 나는 묵묵히 아이가 누워있는 관들을 닫았다.
이곳뿐만 아니었다. 아마도 아까 있던 철문 안쪽에 전부. 이런 상태일 거다. 내면에서 조금씩, 무언가 끓어올랐다.
두근-
일순.
섬찟한 느낌이 들어, 나는 뒤로 돌아섰다.
그곳에는 어느새 다가온 두 명의 노인이 있었다.
“어디서 온 놈이지?”
담담하게 묻는 건장한 노인과.
“히히히히, 저거 노부가 가지면 안 되겠소?”
눈빛부터 광기로 물든 녹포 노인이 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위험하니 일단 뒤로 물러나 계시오.”
건장한 노인이 팔로 녹포 노인을 제지했다. 녹포 노인이 비틀거리며 저 멀리 사라졌다.
“대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
다시 한번 노인이 뇌까렸다.
나는 저 노인을 알고 있다.
여기에 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자였다. 천비각이 잘못 판단했다.
독마毒魔.
혈교 십이사도 중 오사도. 독마전의 전대 전주. 당연히 혈교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도 독마까지는 예상외였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혼란케 한 건 저자가 아니었다.
뒤에 있던 노인.
‘저런’ 녹포를 입고 다니는 자들은 전 세계에서도 단 하나밖에 없다.
사천당문四川唐門.
저건 독의 조종이라 불리는, 위대한 가문의 혈족에게만 허락되는 복장이었다.
다음화 보기
임무 개시 전, 천비각에서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선박의 자동식별번호(AIS)를 차단하고 조작하여 항로를 숨긴 화물선이 오간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전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는 섬에, 거대한 부두와 시설을 ‘어떻게’ 만들었냐 하는 점이었다.
규모보단 위치가 문제였다. 경상도와 전라도 경계 근처에는 한 가문이 자리 잡으면서 엄청나게 발전한 도시 하나가 있다.
중국 사천에서 한국의 사천으로 이주한 가문.
사천당문이었다.
저런 대규모 시설의 건설에는 분명 사천당문의 눈길이 닿았을 텐데, 그걸 어떻게 회피했냐 하는 점은 천비각에서도 미제로 남았었다.
‘애초에 그런 거였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천당문에서는 ‘애초에’ 이곳에 시설이 건설된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아니, 단순히 아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저 녹포 노인이 독마와 꽤 친분이 있는 거로 보아 아예 협력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문제는.
내가 아는 사천당문은 혈교와 양립할 수 없는 집단이었다.
사천당문을 멸문시킨 게 혈교였으니까.
찰나의 순간 이어진 상념을 마쳤다. 일단은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신교.”
나는 독마와 눈을 마주치며 차갑게 내뱉었다.
독마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역시, 아까까지의 차분한 모습은 가면이었나.
“감히, 마교의 엽견獵犬 따위가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긴. 추악한 놈들이 추악한 짓을 벌이는 곳이겠지. 독마전이 당문과도 연관이 있었나?”
“...뭐?”
내 질문에 독마가 눈을 부릅떴다.
“내가 네놈을 모를 것 같나? 독마. 혈교 오사도. 독마전의 전대 전주. 혈교의 노괴가 정파의 영역에서 무슨 짓이지? 그것도 당문 혈족과.”
“...위험한 놈이로구나.”
대번에 시선이 달라졌다. 눈빛에 은은한 경계가 실렸다. 독마가 조심스레 기운을 끌어올렸다. 코끝을 시큰하게 만드는 매캐한 냄새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독마의 무공 경지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지, 높지 않다 해도 초절정에는 이르러있었다.
애초에 그의 진정한 힘은 단순 무공보다는 수십 년이 넘도록 몸에 축적한 독을 이용하는, ‘독공’에 있었다. 화경의 고수조차 독마의 독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독공까지 포함한다면, 화경과 동급이라 보는 게 맞으리라.
일반적으로는.
“죽이진 않을 것이다. 네놈이 뭘 알고 있는지, 어떻게 파악한 건지 알아내야 할 터이니.”
나직한 목소리로 독마가 뇌까렸다. 자신감의 근원은 있었다. 이렇게 지하 공간 같이 닫힌 장소는 독공을 극대화하기 딱 좋은 곳이었으니까.
다만, 그가 알지 못하는 점이 하나 있었다.
화르륵-
내면에 이글거리는 불길의 심상이 깃들었다.
피부와 호흡으로 흡수되는 독은 태양지체의 막대한 양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타올랐다.
시야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짙은 독연 안에 있음에도, 나는 평소와 같이 평온했다.
반탄지기처럼, 피부에 은은한 열기의 막이 형성됐다.
게다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천마신공이 주변의 독기 자체를 아예 내공으로 변환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독’인 마기를 잡아먹는 천마신공의 공능은 독공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따라서.
경지를 떠나, 나는 독마에게 상성상 압도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럴 거로 예상했던 것이, 진기를 끌어올리자 맹렬한 확신으로 변했다.
독마의 존재를 인지했음에도 후퇴보다는 싸움을 택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조용히 서 있자 독마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놈, 생각보다 잘 버티는군.”
“이 많은 아이들의 원정元精을 취하고, 시독을 만들어낸 결과가 고작 이것이냐? 고작 이딴 걸 위해, 그리 많은 사람을 죽였나?”
저벅. 나는 독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아까 관에 누워있던 창백한 얼굴과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자꾸 떠올랐다. 평정심을 유지해주는 특성이 없었다면, 감정의 격류를 참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거다.
“마교의 잡졸 주제에 정파의 위선자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거라. 우리가 어디서 비롯된 존재인지는 알 터인데?”
“잘 알지. 신교를 뛰쳐나간 폐기물들이 모인 집단. 그것이 혈교 아니더냐.”
“크흐흐... 작금의 신교라고 우리와 뭐 다를 성싶으냐?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 마찬가지다. 다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지. 그게 잘못인가?”
더는 들어줄 가치도 없었다. 놈이 말을 하며 내뱉는 숨결 하나하나가 역겹게 느껴졌다. 살의를 품자 그에 화답하듯 단전으로부터 진기가 용솟음쳤다.
상대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풍지해와 같은 경지였지만.
전혀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수련했던 대로, 부드럽게 손으로 원을 그렸다. 건곤대나이는 유형의 물체만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핵심은 무형의 기운을 다루는 것에 있었으니.
독마가 내부에 흩뿌려놓은 독이 건곤대나이의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사술을 부리는 거냐!”
그제야 기겁하며 독마가 달려들었다. 초록색으로 번들거리는 손바닥이 내 머리를 향해 다가왔다. 건곤대나이의 중심, 구슬처럼 응축된 독기를 천마신공의 기운으로 뒤덮어 독마에게 쏘아냈다. 독마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독기를 다시 받아내려다, 황급히 손을 놀렸다.
천마신공에 의해 정화된 독구슬은, 단순한 ‘독’이라기보단 순수한 내력 폭탄과도 같았다. 당연히 저런 식으로 평범한 독이라 생각하고 흡수하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구슬을 막아내며 독마가 수십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건곤대나이? 네놈, 천위강의 제자였더냐!”
독마가 까드득 이빨을 씹었다. 사부의 이름을 부를 때 맹렬한 증오가 느껴졌다.
“두 번째 제자, 김무공이다. 저승 가는 길에 잘 기억해 둬라.”
“크흐흐... 운이 좋구나. 제자가 죽었을 때 천위강, 그 건방진 것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나.”
광소를 뿜어내던 놈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눈동자가 서늘한 광망으로 번들거렸다. 이미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사부는 네놈 따위가 입에 올릴 분이 아니다.”
“닥쳐라!”
쿵! 놈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이제야 원거리에서 흩뿌리는 독으로는 나를 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듯했다. 호흡부터 피부까지 온몸으로 독을 뿜어내는 탓에, 마치 독구름이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쇄도해온 독마가 독기로 번들거리는 쌍장을 내질렀다. 단순히 원거리에서 하독하는 것과 직접 독기를 퍼붓는 건 아예 위력 자체가 달랐다. 일반적인 사람이면 호흡 한 번에 한 줌의 핏물로 화할 만큼, 장력에 섞인 독기가 지독했다.
“하찮아.”
나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어차피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전혀 통하지 않는 독기를 제외하면, 남는 건 장법 경력밖에 없다. 단순한 힘의 대결이라면, 내가 밀릴 리 없다.
하물며, 단순 위력 대결로 갈 필요도 없었다.
파바바바박-
찰나의 순간 수십 번이 넘게 이어진 독마의 장을 건곤대나이로 차분하게 빗겨냈다. 정수리가 뜨거워지며, 무혼이 자연스럽게 길을 인도했다. 투로가 익숙해지면서 독마의 빈틈이 서서히 보였다.
퍽-
부드럽게 독마의 장법 경력을 쳐내며, 좌장을 그의 가슴팍에 내질렀다.
“크억...!”
우드득 소리와 함께 독마가 찐득한 피를 내뿜었다. 조금은 얕았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독마와 시선을 마주쳤다. 독마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퉤. 독마가 내장 섞인 핏물을 뱉어냈다.
그가 짓씹듯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천위강이... 괴물을 키웠구나...!”
쿠궁- 나는 오연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대기가 거세게 진동했다.
천마군림보가 내뿜는 보법 경파가 공간 전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혈수마공의 기운을 모으다가, 불현듯 드는 깨달음에 손바닥을 털었다. 잔뜩 응축되었던 혈수마공의 붉은 기운이 빛으로 화하며 흩어졌다.
그 대신.
오로지 천마신공의 기운만을 계속해서 끌어올렸다. 꿀렁거리는 독기로 가득 찼던 공간이 어느새 천마신공의 묵빛 기운으로 뒤덮였다.
“천마신공...?”
기운을 감지한 독마가 눈을 부릅떴다.
“복원했다...? 온전한 천마신공을? 그건 불가능하다! 시천마가 살아온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냐!”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던 독마가 절규 섞인 말을 내뱉었다. 나는 무심히 독마에게 다가갔다. 놈이 비척비척 뒷걸음질 쳤다.
“천마신공이 온전했다면 혈교가 탄생하는 일도 없었을 터. 네놈, 정체가 뭐냐...!”
“말했지 않나. 천마 천위강의 둘째 제자. 그게 나다.”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게 전부일 리가 없다. 천위강이 천마신공을 복원했다면, 혈교는 그날로 지워졌을 터. 이리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대체 ‘원래의’ 천마신공이 어땠길래 독마가 저리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정정해줄 생각은 없었다.
“말이 많다.”
“이이익...! 독이 통하지 않는다 하여 노부가 우습게 보였더냐!”
놈이 분노에 찬 일갈을 내뱉으며 손을 쭉 뻗었다. 내 심장을 노리는 기습적인 찌르기였다.
독마의 움직임이 분절된 이미지처럼 뚝뚝 끊겨 보였다.
선천지기까지 불태우는지, 이전과도 비할 바 없이 빨랐으나.
그뿐이었다.
달려드는 독마를 고작 몇 걸음으로 피하면서, 놈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곱게 죽여주는 것도 이놈에게는 사치였다.
우드드득- 천마신공의 기운이 실린 손가락에 힘을 줬다. 놈의 머리통이 비틀리면서 몸통으로부터 그대로 뽑혀 나왔다. 바닥에 핏물이 촥 번지며, 머리에 붙은 척추뼈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시시각각 생명을 불태워가며 얻은 힘이라 그런가.
초절정고수이자, 전대의 거마巨魔인 독마를 단숨에 격살했음에도, 생각보다 별 감흥은 없었다.
나는 뽑아낸 놈의 머리통을 붙잡은 채 다른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