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1)

두꺼운 방호문 너머에 기척 하나가 감지됐다.

머리통을 든 반대편 손으로 문을 잡았다. 손아귀 힘으로 방호문 문짝을 아예 뜯어내서 옆에 던져버렸다.

툭. 척추가 흔들리는 머리통을 어둠 속에 대충 집어 던졌다.

“히이이이이익...!”

공포에 찬 노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와.”

가라앉은 음색으로, 나는 정면을 노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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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포를 입은 노인이 쭈뼛쭈뼛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내가 독마를 죽일 줄은 몰랐던 듯, 얼굴에 여전히 경악한 표정이 남아있었다.

“당문이 개입했나?”

“난 모른다!”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 나는 노인에게 순식간에 다가가, 아혈과 마혈을 동시에 짚었다. 노인의 몸이 통나무처럼 꼿꼿하게 굳었다. 주변을 기감을 넓혀 살펴본 후, 통신을 켰다.

[메인 구역 제압은 끝났다. 상황은?]

[외부로 도망 나오려던 놈들을 몇 잡았습니다. 현재 구속 중입니다.]

홍은주가 대표로 말했다.

[유령단에게 인계하고 내부로 조심히 진입하도록. 아직 남아있는 독기가 있을 수 있다.]

[예, 주군.]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노인의 아혈을 풀어줬다.

“살려줘!”

노인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뻔뻔함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죽이진 않을 것이다.”

심문을 해야 하니까. 독마는 살려두기 너무 위험해서 죽였지만, 노인은 무공을 거의 익히지 않았다. 아마도 연구를 위해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듯했다.

“나, 날 당문에 데려다주면 크게 사례하겠다!”

“정신을 못 차리는군. 네놈이 당문임을 실토한 것이더냐?”

“당연히. 난 당문의 사람이다! 나를 죽이면 보복이....”

나는 입가에 실소를 머금었다. 보복?

“당문이 신교를 상대로 보복을 한다? 재밌는 얘기군.”

“히끅. 시, 신교!”

그제야 노인이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이로써 당문이 관여되어 있음은 확실해졌군.”

“아, 아니다! 당문은 관계가 없다!”

“설득력 있는 소리를 하거라.”

“이이이익!”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지?”

“난 연구를 했을 뿐이다! 학자가, 학문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이 꼴을 보고도 ‘연구’를 운운하는 거 보니,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기괴한 말투도 그렇고, 여전히 노인의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아니, 잘못이다.”

나는 노인의 말을 단호히 부정했다. 연구의 목적이라고 모든 게 허락되진 않는다. 연구윤리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생명을 다루는 계열은 더더욱 중요시해야 하는 게 연구윤리다.

이놈은 그런 연구윤리를 깡그리 무시했다. 학자? 학자라 불러주기도 아깝다.

“신교. 신교. 여긴 당문의 영역이야. 당문은 곧 정파. 이곳은 정파의 영역이다! 대체 어쩌려고 이런 사달을...!”

“천마 천위강 교주님께서 직접 허락하신 일이다. 대 천마신교가 일일이 정파의 허락까지 받아야 하나?”

“정마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고작 네놈 하나 때문에? 그럴 리 없지. 이 참상은 우리가 직접 무림맹에 고할 것이다. 정파에서 당문의 입지는 확연히 줄겠지.”

“마교의 말 따위,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상관없다.”

어차피 독마를 격살한 것만 해도, 충분히 성과는 얻었다. 게다가 이번 일로 적룡대라는 존재가 알려질 거다. 화려한 데뷔가 될 것이고, 그건 고스란히 적룡대의 명성에 더해질 거다.

무림에서 명성은 곧, 힘과도 같다.

물론 그만큼 혈교도 노릴 테니 위험성은 올라가겠지만.

어차피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나는 느긋하게 벽에 몸을 기대고 기다렸다. 심문은 어차피 내 전문이 아니었다.

“대장!”

가장 먼저 내 근처로 달려온 건 적하였다. 내 위치는 자동으로 적룡대에게 전송되고 있었다. 조심하라고 그리 강조했는데, 호흡을 보니 신나게 달려온 모양이다.

“조심히 진입하라니까.”

“조심히 왔습니닷. 제가 들어왔던 통로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근데 이 노인은...?”

적하가 내 시선을 스리슬쩍 피하며 아래 드러누운 노인을 쳐다봤다.

“당문이다. 여기서 실험을 돕고 있더군.”

“헉.”

한 발짝 뒷걸음질 치며 적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버하지 마라.”

“우리 혈교 친 거 아니었어요?”

“주력은 혈교였다. 둘이 사이좋게 쓰레기 짓을 하고 있더군.”

“대체 왜...?”

“나야말로 왜인지 알고 싶다. 나름 명문이라는 놈들이.”

혀를 차며 노인을 노려봤다. 아혈이 짚이지 않았음에도, 노인은 아까부터 말수가 적어졌다.

이윽고 내부 정리를 마저 끝내면서 들어온 적룡대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마지막으로 은은한 적색 머리칼을 빛내는 홍은주가 내 근처로 다가왔다.

“주군. 시설 소탕은 끝난듯합니다.”

“고생했다. 다들 다친 데는 없나?”

“예!”

우렁찬 대답이 동시에 들려왔다.

“너희가 봐야 할 게 있다. 저놈 끌고 따라와라.”

나는 아까 봤던 철문 안쪽으로 들어가 관을 하나씩 열었다. 관을 열 때마다 적룡대원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일그러졌다.

“윽. 대장, 이거 시독 냄새 아녜요? 게다가 이 시신은 말라비틀어졌는데, 설마....”

“그래. 아이들의 정기를 흡수하고 독을 실험했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

“...목 벨까요?”

적하가 노인을 노려보며 검을 반쯤 뽑았다. 음성에 은은한 분노가 실렸다.

“나중에. 알아낼 건 알아내고 죽여야지.”

“알겠습니다.”

철컥. 적하가 검을 거세게 집어넣었다. 다시 아혈이 짚인 노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것이, 너희가 상대해야 할 놈들의 정체다. 세계 곳곳에서 이런 쓰레기 짓을 수도 없이 벌이고 있을 거다. 여기 있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니. 놈들을 상대할 때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라.”

“주군, 그런데 이 자는...?”

홍은주가 목이 사라진 독마의 시체를 유심히 쳐다보며 물었다.

“혈교 오사도, 독마다. 이제는 오사도였던 자라 해야겠군. 아직 독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 건드리진 마라.”

“알겠습니다. 오사도라면 십이사도 중 하나를 격살하신 겁니까?”

적룡대에게는 혈교에 관해 알릴 때, 대략적인 조직도도 그냥 싹 다 일러뒀다. 미리 알고 대응하는 것과 모르고 대응하는 건 천양지차니까.

“대단한 건 아니다. 어차피 또 누군가로 채워지겠지.”

“...그래도 그런 고수를.”

“운이 좋았다. 오사도가 아닌 다른 사도였다면 쉽지는 않았을 거다.”

순수한 무투파 사도였다면 이처럼 쉽게는 이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상성상 압도적으로 유리해서 이리 간단히 처리한 것도 있었다.

[김무공 공자님, 천비각 2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대기하라.]

[알겠습니다.]

나는 적룡대와 사로잡은 노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거기에는 장비를 챙긴 천비각 요원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보며 동시에 포권했다. 가볍게 손짓하며 그들의 조장에게 다가갔다. 혼자만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부 정리는 끝났다.”

“알겠습니다. 이후 증거 수집은 저희 천비각과 유령단이 하고자 하는데, 허가해주시겠습니까?”

“그래. 뒷일은 맡기마. 이놈은 우리가 직접 신교로 데려가겠다.”

천비각 조장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당문이군요?”

“혈교와 당문이 짜고 친 모양이더군.”

“허어... 그래도 명문이란 놈들이. 혈교와 당문의 연합은 너무 낮은 가능성 때문에 거론조차 안 했는데 말입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조사해 보면 알겠지.”

“알겠습니다. 바로 복귀하실 예정이십니까?”

“아니, 너희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진 대기하겠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수습해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추적추적 내리던 비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

과천시 중앙동.

이곳에는 산을 반쯤 밀어버리고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가 존재했다.

세계무림연맹.

줄여서 무림맹이라 부르는 집단의 본단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 정부과천청사가 내려다보이게 세워진 건물들은, 마치 이 세계에서 무림맹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거대한 요새처럼 구축된 무림맹 본단의 정 중앙, 맹주전에는 수많은 차량과 헬기가 오가며 사람들을 내려놨다.

다급히 소집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맹주전에 있는 대회의장에서는 격렬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연합체인 무림맹답게, 온갖 문파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요 문파 인물들만 해도 이 정도였다.

“마교가 미친 것 아니겠소!”

팽가의 대표로 참석한 팽사혁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시작은 천마신교에서 날아온 하나의 제보 때문이었다. 제보라기보단, 일방적 통보에 가까웠지만.

“옳소. 명백한 무림맹의 영역에서 작전을 펼치다니. 이건 침략이오, 침략!”

“허나, 사안이 사안이 아닙니까. 생체실험이라니요.”

“사교도 관여되어 있다고 들었소.”

“허어... 설마 당문이....”

“크흠!”

당문 얘기가 언급되자 무림맹 주요 인사들이 있는 곳에 앉아있던, 녹포를 입은 장년 사내가 강한 불편을 내비쳤다.

“거 말조심하시오. 믿을 게 없어서 마교의 말을 믿소?”

“믿고 싶지 않아도 증거가....”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당신, 문파가 어디오?”

갑자기 녹포 사내가 증거를 운운하는 남성을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우리 철령문을 겁박하는 것이오? 우리는 당문이 두렵지 않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딱 그짝이구나.”

녹포 사내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철령문을 하룻강아지라 부른 것이오? 정도를 걷는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곤 도저히 생각지 못하겠군! 자중해도 모자랄 판에.”

“닥쳐라! 당문은 모욕을 참지 않는다. 멸문지화를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입, 조심하라!”

으득. 철령문의 사내가 이를 악물며 주먹을 굳게 쥐었다. 비통한 일이나, 힘의 차이는 현격했다. 당문이 작정하고 철령문을 치고자 마음먹으면, 증거도 남기지 않고 멸문시켜버리는 것도 가능하리라.

“무림맹주님 납십니다.”

저벅저벅. 문이 열리고 기다란 장검을 등에 멘 남성이 안으로 걸어왔다. 당당한 보폭에서 무림맹주의 성정이 엿보였다. 이내 회의장의 가장 상석에 무림맹주가 섰다.

시장통 같았던 대회의장 내부에 일순 고요함이 감돌았다.

“친애하는 무림동도 여러분. 반갑소. 서문정천이오.”

서문세가의 대장로이자 검왕劍王이라 불리는 위대한 무인이 좌중을 한 번 훑어보고 포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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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정천.

그는 서문세가의 적장자 출신으로, 본래 차기 가주의 자리로 내정된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약관이 되었을 때, 돌연 차기 가주 포기를 선언한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세가의 가주 자리 대신, 그가 택한 건 검이었다.

그렇게 서문정천은 검의 정점에 오르기 위하여 혼인조차 마다하고 부단히 수련을 계속했다.

본래부터 탁월한 재능을 자랑했던 서문정천은 반백 년의 세월을 거쳐, 마침내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등에 업고.

서문세가의 대장로에 이어, 독고패가 물러난 이후 무림맹주의 자리에 추대됐다.

평생을 올곧게 검만 수련한 무인답게, 서문정천의 대쪽같은 성격은 전 무림에서도 유명했다.

대회의장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서문정천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급히 소집된 회의임에도 모인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전하는 바이오. 먼저, 잠시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소.”

서문정천을 필두로 회의장 내부 사람들이 눈을 감고 묵례했다. 묵례가 끝난 후, 서문정천이 입을 열었다. 내공이 실린 음성이 나직하게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미리 배포한 자료는 다들 보았을 거로 생각하오. 참으로 참담한 일이외다. 명백한 백도 무림맹의 영역에서. 천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진기를 갈취당하고, 생체실험에 희생당하는 일이 발생했다니. 본인은 백도 무림맹의 수좌로서, 깊은 책임을 통감하는 바이오.”

무거운 낯빛으로 연설하는 서문정천을 보며, 다들 시시각각 표정이 굳어갔다.

“맹주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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