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31)

“하긴 증거가....”

주변에서 소곤거리며 당문 쪽을 힐긋힐긋 훔쳐봤다. 계속된 서문정천의 연설과 반복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녹포 사내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본 사건에 관련된 집단은 둘이외다. 혈교라는 사교 집단, 그리고 당문. 본 맹주는 깊은 책임을 통감하고, 맹주 직속 조사단을 꾸려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약속드리는 바이오. 질문 있소?”

쾅- 녹포 사내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문 당사음이오. 맹에서는 만화단萬花團을 맡고 있소이다. 말씀 한마디 올려도 되겠소?”

“말하시오.”

서문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참으려 했으나, 다들 너무한 것 아니시오? 마교의 말만 믿고 우리 당문을 음해하다니요! 같은 정파 식구들끼리. 나 당사음은 하늘에 맹세코 지금까지 의와 협을 추구하려고 노력했소이다!”

“흥, 의와 협은 무슨. 방금 전까지 본문의 멸문지화를 입에 담은 자가.”

곧바로 철령문의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주변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당사음은 애써 무시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얘기만 들으면 혈교라는 사교 집단과 우리 당문이 무슨 결탁이라도 한 것 같소이다! 듣자 하니 적룡대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마교 놈들이 밝혀낸 사실이라는데, 믿을 수 있겠소? 나는 그 정보가 신뢰성이 있다 믿지 않소이다!”

“한 가지 정정하겠소.”

서문정천이 중간에서 개입했다.

“정정?”

당사음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적룡대는 이번에 천마 천위강 교주의 둘째 제자가 만든 직속 무력대요. 단순 듣도 보도 못한 집단이라고 볼 수는 없소이다.”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으시오? 안 그래도 내 그것 관련해서 맹주께 한마디 하려 했소. 듣자 하니 그 둘째 제자라는 자가 중원무공아카데미 생도라지요? 정파의 동량을 키워내야 할 아카데미에, 마교의 악적들이 드나들다니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지금 그런 걸 논하는 자리가 아닌 것 같소이만? 누가 밝혔든, 증거는 명백하오. 이들을 보시오.”

정면의 거대 디스플레이에 천마신교에서 사로잡은 인물들의 얼굴과 신상이 주르륵 나타났다. 녹포를 입은 노인과 연구직으로 보이는 자들이 화면에 비쳤다.

“이래도 당문이 관련이 없다 하겠소?”

“저 노인은 당문 사람이 맞소. 허나, 오래전에 치매에 걸려 실종된 사람이오. 우리도 놀랐소이다.”

“본 맹주가 판단하기에 저런 대규모 시설을 사천 당문이 몰랐을 것 같지는 않소이만. 저곳은 사천당문의 코앞 아니오.”

“혈교라는 사교가 그만큼 강대하다는 얘기 아니겠소! 우리의 눈을 피할 정도로!”

당당한 당사음의 태도에, 좌중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확실히, 설득력이 아예 없진 않았다.

특히 대문파의 경우 흡혈귀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혈교의 위험성을 인지했기에 더 고개를 끄덕였다.

“본 맹주는 당연히 당문의 무고함을 믿고 싶소. 허나,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모든 건 조사를 통해 명명백백히 밝히면 그만이지요.”

“됐소! 내 이 자리를 빌려 똑똑히 선언하리다. 조사? 마음껏 하시오. 대신, 근거도 없이 사사로이 우리 당문을 음해하는 자가 나온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다들 명심하길 바라오.”

당사음이 근처의 누군가와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 자리에 앉았다.

“당문이 입장은 잘 반영하도록 하겠소. 다음 질문받겠소.”

곧바로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서문정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존경하는 무림동도 여러분. 황보가의 황보명이라 하오. 강호에서는 파암권破巖拳이라 불리고 있소. 내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맹주께 한 가지 여쭙고자 하오.”

“말해 보시오.”

“만화단주께서 마교 교주의 둘째 제자가 아카데미에 다닌다고 하던데, 맞소이까?”

“원래부터 제자였는지, 아니면 최근 밝혀진 건지는 조금 모호하긴 하오만. 생도인 건 맞소.”

“허어... 어찌 그걸 용납하셨단 말이오. 본인은 참으로 안타깝소. 그 자리에 백도의 헌앙한 무인을 넣어도 모자랄 판에. 마교, 그것도 교주의 둘째 제자라니요!”

황보명이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 하나를 꽉 쥐어 들었다.

“천마신교는 본 무림맹과 불가침을 맺은 지 오래요. 또한, 아카데미를 세운 무신께서는 정사마를 구분하는 걸 원치 않으셨소이다. 파암권께서도 아카데미 출신이니 잘 아실 터인데?”

“암, 알다마다요. 그러니 더 하는 말 아니겠소. 마교의 잡종이 후배가 되는 꼴을 어찌 보고만 있겠소이까. 안 그렇소, 여러분?”

주변에서 옳소 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황보명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본인과 비슷한 생각인가 보구려. 이 일은 정식 안건으로....”

서문정천이 눈을 부릅뜨고 입을 열려던 찰나.

“그만.”

지금까지 가장 뒤쪽에서, 고요히 회의장을 응시하던 노인이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음에도, 혜광심어처럼 회의장 내부의 모두에게 생생히 울려 퍼졌다.

“누구를 생도로 받고, 누구를 내보낼지. 그건 오로지 내 권한이니. 자네들은 내게 강요할 수 없다네.”

몸을 일으킨 작은 거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중원무공아카데미 총장이자 현 천하제일인이 차분하게 내뱉은 말에, 일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중원무공아카데미 총장은 무림맹에서 의결권은 없었지만, 맹의 주요 회의에 참석하여 발언할 권한은 있었다.

물론 독고패는 전 맹주라는 위치도 있기에, 대부분은 그저 조용히 참석만 하고 아카데미로 돌아갔었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리고 내 결정은, 김무공 생도는 아카데미에 다닐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네. 천마의 둘째 제자.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고향이 멸망하고, 끝없이 후퇴만 한 주제에. 아직도 자네들은 정사마에 집착하는가?”

쿵- 독고패가 은연중에 뿜어낸 기세에, 황보명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적전신’이라는 말처럼, 독고패는 매사에 절대 온화하지만은 않았다.

무적전신無敵戰神. 젊은 시절부터 수천 곳이 넘는 전장을 전전하여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하여 붙은 별호였으니. 독고패의 본래 성정은 패왕霸王에 가깝지 현왕賢王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화단주처럼 나도 선언 하나 하겠네. 내가 총장으로 있는 한, 아카데미에서 정사마의 구분 따위는 없을 것이네. 그리고 누구도! 설사 그 생도가 천마신교 출신이라 하여도, 내 생도를 건드리는 건 절대 용납지 않을 것이니. 행여나 뒷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게. 이건 나 무적전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이니, 우습게 여기지들 말게나.”

이전과 다르게, 독고패의 말에는 그 누구도 토를 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침묵만이 흐르는 회의장 내부를 쳐다보며, 독고패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흠, 한 가지 또 말할 게 있다네. 올해 무신제武神祭는 규모를 좀 더 확대할 예정이라네. 정녕 백도 정파의 위세를 뽐내고 싶으면, 여기서 억지나 부릴 게 아니라 무신제에서 무武로 증명할 수 있도록 후기지수들 응원이나 하게나.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인의 자세 아니겠는가?”

무신제 얘기가 나오자 다들 눈빛이 변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무신의 등선을 기념하여 아카데미에서 여는 무신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 중 하나였다.

특히 무신제의 꽃인 비무대회에서는 후기지수들이 무를 겨누고, 탁월한 솜씨를 보이는 자들은 용봉의 칭호를 받기에.

다른 말로는 용봉지회라 불리기도 했다.

“저... 총장님. 확대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이번 무신제는 정파만 참여하지 않을 거라네.”

“그 말은...?”

“아직 논의된 바는 없으나, 전 세계는 물론이고 천마신교까지 참여를 원한다면 배제하지는 않을 생각이라네. 이해됐는가?”

천마신교 얘기가 나오자 사방이 시끌벅적해졌다.

그만큼 독고패의 말은 파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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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비해 인구는 압도적으로 늘었음에도, 대종사의 자질을 가진 자는 계속해서 줄어만 갔다.

누군가는 천지간의 기운이 쇠하여 그렇다 하였다.

누군가는 천리가 무의 발전을 더는 허락지 않는다 하였다.

누군가는 천문이 닫혔다고 하였다.

누군가는 신의 저주라 울부짖었다.

진실은 알 수 없었으나.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무학의 발전에는, 대종사의 자질을 지닌 천재가 무조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시천마, 달마, 장삼봉, 구파의 대종사들, 무신.

대종사의 자질을 지닌 자들의 일년은, 평범한 자들의 천년, 만년과도 같았으니.

평범한 자들이 아무리 많아 봐야 무학의 발전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이, 무武가 지닌 냉혹함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수많은 무학이 실전됐다.

여전히 발전은 더디기만 했다.

게이트 사태가 터지면서 무를 발전시키기보단, 있는 것을 지키기도 급급해졌다.

모두가 외면하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한없이 퇴보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호비록江湖祕錄 말세편末世篇 서문序文.』

천마신교의 이름으로 전달된 내용을 받아본 무림맹에서는, 공개적으로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 마냥 믿을 수는 없겠지만, 조용히 묻어버릴 생각은 없는듯했다.

‘오래도 걸렸고만.’

확실히 연맹 체제인 무림맹답게, 관련 자료를 넘긴 지 한참 지나서야 발표가 떴다. 덕분에 벌써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사부님, 제자 김무공입니다.”

나는 의관을 정제하고 문 앞에서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사부를 볼 날도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이윽고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나는 사부가 앉아있는 자리 앞까지 다가갔다. 사부가 묵묵히 나를 쳐다봤다. 조금은 묘한 시선이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정파에서 네 존재를 인지했다. 알고 있나?”

무슨 말을 하나 싶었더니.

“물론입니다. 애초에 그러라고 저지른 짓 아니겠습니까.”

“아카데미 생활이 이전보다 쉽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가겠느냐?”

“각오한 바입니다.”

제갈혜도 그렇고, 어딘가에 있을 혁리악도 그렇고. 온실 속 화초처럼 신교에 머문다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다. 직접 부딪쳐 보는 게 낫겠지.

“그렇군. 받아라.”

탁. 사부가 검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파충류의 것으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검은 가죽으로 된 검집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검을 들어 올렸다.

“뽑아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살짝 거리를 벌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뿐만 아니라, 검신 역시 은은한 묵빛을 띠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비로운 광휘가 검을 감돌았다. 손가락으로 검면을 살짝 튕겨 보니 소리부터가 독특했다. 철의 맑은 느낌이 아닌, 밀도 높은 둔탁함이 느껴졌다.

“철이 아닙니까?”

“고작 철 따위가 아니다. 중국을 멸망으로 몰고 갔던 마수 중 하나. 공허룡空虛龍의 송곳니로 만든 검이다. 수많은 자들이 공허룡의 파편으로 무언가 만들기 위해 시도했지만, 성공한 건 오직 둘 뿐이다.”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전 세계에 둘밖에 없는 귀보.

마수의 등급도 스킬과 똑같이 세분되어있는데, 중국을 멸망으로 몰고 간 마수라면 최소 S급 이상이다. 둘밖에 제대로 정련하지 못했을 정도라면, 아마 SS급 이상일 확률도 높았다.

그 정도면 화경의 무인으로도 힘들고, 현경의 무인은 있어야 토벌 가능했다.

어쩌면 사부가 직접 토벌한 마수일 수도 있었다.

“상관없다. 봉마검형을 쓰려면 평범한 검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니. 가져가라.”

“...감사합니다.”

조심히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허리춤에 패용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사부에게 물었다.

“둘이라고 하셨는데, 혹 나머지 하나가....”

“하연이의 검이 맞다. 공허룡의 발톱으로 만들었지.”

역시. 천하연의 검도 일반적인 재질은 아닌듯했다.

“하연이의 검이 내기를 잘 받아들이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면, 흑룡검의 강점은 강도다. 아마 튼튼함으로만 따지면 천마검보다 나을 것이다.”

“허어... 그렇군요. 이 검의 이름이 흑룡검입니까?”

“그래. 내가 지은 이름이다만. 마음에 안 드나?”

사부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닙니다. 제자, 아주 마음에 쏙 듭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자꾸 흑룡 하니까 누가 생각나서 그렇지. 검의 모습을 보면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명칭도 없었다.

“아끼지 말고 쓸 때는 쓰도록. 그래 봐야 병장기에 불과하다.”

“예. 물론이지요.”

“그리고 흠.”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사부가 잠시 뜸을 들였다.

“사부님?”

“하연이 잘 부탁하마. 잡것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제답게 잘 보필하도록.”

“어차피 남장 상태 아닙니까?”

“세상엔 다양한 종자들이 존재한다.”

“...어차피 당한다고 당할 사저도 아닐 텐데요.”

“토 달지 마라.”

“옙.”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던 때는 언제고. 그래도 사부의 반응에서 이전보다 나에 대한 평가가 조금이나마 올라갔음이 느껴졌다. 이제 친하게 지내는 것 정도는 허락해주실 모양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

김무공이 희희낙락하며 떠나간 이후에도, 천위강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상념에 잠겼다.

처음에는 일종의 거래로 받은 제자였지만, 고작 한 달 사이에 김무공에 대한 인식은 꽤 많이 바뀌었다.

본래라면 흑룡검 같은 귀물을 쉬이 내어주는 일은 없었으리라.

‘경박함만 좀 버리면 좋을 텐데.’

가끔가다 깐죽거리는 걸 듣고 있으면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허나, 김무공을 상대로 천위강이 물리력을 쓸 때는 수련 시간에 한정됐다.

많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다르게, 천위강은 무작정 폭력부터 가하는 걸 선호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힘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이런 천위강의 지론은 그의 생활 습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게다가, 이제 와선 김무공의 친근한 태도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지금껏 천위강 앞에서 저리 행동하는 자는 없었기에, 늘그막에 아들이라도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아직 봉마검형을 제대로 쓰지 못함에도, 흑룡검을 굳이 내어준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천위강은 새로 받은 제자가 무언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사부 된 자로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게 낫겠지.

“흑풍단주.”

천위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근처에 있던 흑풍단주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본인은 한사코 괜찮다고 말했지만, 무림의 생리를 지겹도록 겪은 천위강 입장에선 마냥 제자에게 맡겨두기만은 힘들었다.

혈교 뿐만 아니라, 정파도 문제였다. 오히려 음습하다는 면에선 혈교보다 더할 때도 있었다.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전신을 만나야겠다. 준비하도록.”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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