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31)

그리고 무적전신 독고패 정도면, 정파 영역 한 가운데서도 제자의 울타리로서 충분하리라.

그리 판단했다.

***

“공자님, 준비 끝났습니다.”

류은채가 홍화각 인원 일부를 이끌고 찾아와 내 짐을 들었다.

“내가 들어도 되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홍화각 인원까지 전부 가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닙니다. 공자님을 따라가는 건 오직 저 혼자만입니다.”

“어? 너도 가?”

“전에 말 안 했습니까?”

“말 안 했는데.”

전혀 들은 바가 없다. 류은채는 남아서 흑룡각을 관리할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요새 일이 많아 실수했군요. 적룡대의 거취 문제도 있어, 저도 가기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저것 지원할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나야 환영이지.”

이 사람도 실수라는 걸 하는구나. 어쩐지 요새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았더니. 적룡대부터 시작해서 흑룡각 관리나 신교의 다른 조직과 조율하는 일까지 혼자 도맡아 하다 보니 과부하가 온 모양이다.

그래도 똑 부러진 성격답게, 류은채의 일 처리 능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카데미 근처에 머물 적룡대의 관리부터 신교와 연락 등. 이것저것 잡무를 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류은채라면 확실히 믿을 수 있다.

“가자.”

빌딩 아래로 내려가자, 적룡대가 형형한 기세를 뿜어내며 절도있게 대기하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적룡대는 실전과 혹독한 훈련을 통해 아예 다른 집단으로 거듭났다.

물론 나를 보며 입 모양으로 ‘대장대장’을 말하는 적하 같은 아이도 있었지만. 저 적하조차 이제 실전을 간다고 저번처럼 긴장하는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우리는 차례차례 차량에 탑승하여, 공항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드디어 신교를 떠나는 날이었다.

고작 방학을 보낸 정도였지만, 그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신교가 마치 제2의 고향처럼 느껴졌다.

신교 전용 공항 안쪽으로 가자, 적룡대보다 10배는 많은 머릿수를 자랑하는 흑의인들이 보였다. 마영수라대였다.

나는 그들의 근처에 가서 내렸다.

흑의인들의 호위를 받는 한 여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천하연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날 환영했다.

“어. 잘 지냈지?”

폐관 수련 이후 처음 보는 천하연이었다. 햇빛을 덜 봐서 그런가, 이전보다 피부가 더 하얘진 느낌이다.

“물론. 그대는 잘 지냈나?”

“나중에 자세히 말해 줄게. 좀 바빴거든.”

“듣자 하니 그런 것 같구나. 그대들이 적룡대인가?”

천하연이 적룡대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천마현세 만마앙복! 적룡대 전원, 소교주를 뵙습니다!”

적룡대가 천하연을 보며 단체로 포권했다.

“허례는 됐다.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 거 같은데. 그대는 이름이....”

“적룡대주 홍은주입니다.”

“그런가. 내 사제를 잘 부탁하마.”

“존명! 맡겨 주십시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천하연이 다른 방향을 쳐다봤다.

“오나 보구나.”

나 역시, 이쪽으로 다가오는 차를 주시했다.

차 문이 열리고, 흰색 옷을 입은 여인들이 차례차례 차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보필을 받으며, 한 여성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어서 와.”

“응. 오랜만이야.”

한여름이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몸짓으로 다가왔다.

기나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온다.

이젠 아카데미로 복귀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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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는 이전과 동일하게 배정받았다. 천하연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몇몇이 아마 손을 쓴 거겠지.

혹여나 사부의 제자라는 것 때문에 퇴학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했던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시선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개강 후 첫날인데도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진 모양이다.

혼란, 경계, 호기심, 적의.

나는 가만히 있음에도, 주변에서 온갖 감정의 격류가 휘몰아쳤다.

“흠흠.”

수업이 시작되기 전, 지금 내 앞을 반복해서 오가는 김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 말 있냐?”

“아니다!”

김용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긴. 딱 봐도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러지 말고 그냥 말해.”

“그... 진짜로 마교 소속이냐?”

김용이 나를 힐긋 보더니, 시선을 피하고 뇌까렸다. 남자 놈이 저러니까 꿀밤이 매우 마렵다.

“진짜지 가짜겠냐?”

“천마의 둘째 제자?”

“어.”

“역시, 내가 패배한 건 우연이 아니었군. 알았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김용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어딘가의 듣보잡에게 진 것은 자존심이 팍 상하지만, 천마의 둘째 제자에게 패배했던 건 괜찮다는 것일까.

정신승리 방법도 가지가지란 생각만 들었다. 내 옆에서 한여름이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웃기냐?]

[쟤 가만 보면 좀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관심 가지지 마라.]

[질투해?]

[시꺼.]

[내 취향은 절대 아니니까 걱정 마. 근데 어그로 장난 아니네.]

[글게. 탱커 된 기분임.]

한여름의 신녀 후보 발탁은 공식적인 발표가 나가지 않았다. 신교 내부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결국 모든 이목이 내게 쏠렸다.

특히 저기. 비취색 머리 장식을 한 소녀가 내게 맹렬한 적의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무심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기운을 집중했다.

움찔.

살벌한 내 기세를 받고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당소소’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당문에 저지른 짓이 매우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괜찮다.

나도 당문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거든.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이미 난 개성 실험 시설도 당문 짓이라는 걸 확신했다.

미묘한 기류가 계속해서 감도는 교실에, 청하 교수가 차분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나랑 시선을 마주쳤다.

눈빛에서 미미한 걱정이 엿보였다. 하여간, 보면 볼수록 여린 여자다. 정파에서 신교 이미지는 절대 좋지만은 않을 텐데.

담담하게 청하 교수가 입을 열었다.

“좋은 방학들 보내셨나요?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올해는 무신제가 개최됩니다.”

전 세계적인 축제, 무신제는 나도 알고 있다. 게임 내에서도 꽤 화려한 이벤트에 속했거든. 게다가 무신제의 메인 이벤트인 비무 대회는, 무림판 올림픽이라 볼 수 있었다.

“중원무공아카데미 생도들은 전부 본선부터 시작합니다. 예선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장점이지요. 이것도 경험이니, 최대한 지원해주셨으면 해요.”

청하 교수가 무신제에 대한 설명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한여름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 쳤다.

[왜?]

[너 나갈 거야?]

[당연히 나가야지.]

[움. 그럼 나도 나가야지.]

[안 봐준다.]

[바라지도 않거든. 글고 나 이전이랑 다르다?]

[나라고 같겠냐.]

[암튼. 이젠 안 질 자신 있음.]

[신녀궁에서 뭘 배웠길래 근자감이 폭발했냐?]

[그런 게 있음.]

[다른 놈한테 탈락이나 하지 마라. 만만치 않을 텐데.]

[너도.]

문득 생각이 나서 천하연을 힐긋 보니, 그녀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무래도 천하연은 굳이 나갈 생각이 없는듯했다. 기본적으로 정체를 숨겨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한 가지 추가로 알려드릴 게 있어요. 이번 무신제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후기지수 연배인, 이립(而立 : 서른 살) 미만의 지원자를 받을 예정이에요. 총장님께서 이미 결정하신 사안이지요. 이번 주 안에 자세한 발표가 나갈 예정입니다. 참고해 주세요.”

이러면 얘기가 또 달라졌다. 독고패 총장 덕에 의외로 빠르게 기회가 다가왔다. 적룡대의 이미지를 더 확실히 각인시킬만한 기회.

이립 미만. 적룡대 역시 전원 서른을 넘지 않는 후기지수에 속하니까, 참여 자격도 충분히 됐다.

예선부터 뚫고 와야겠지만, 적룡대 수준이면 어렵지 않게 본선까지는 올라올 거다. 거기서부터는 쉽지 않겠지만.

아마 아카데미 생도들이랑 좋은 승부가 되지 않을까 싶다.

***

수업이 끝난 이후.

한여름과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중, 나는 학생회의 부름을 받아 학생회 건물 내 접견실에 도착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접견실 내부에는 여성 한 명이 소파에 오연한 자세로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어서 와, 후배님.”

귓가에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부회장님이 부르신 겁니까?”

“응. 내가 불렀어.”

베아트리체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베아트리체가 손짓하는 대로 근처에 가 앉았다. 베아트리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것도 단둘이.”

그녀가 혈마녀라는 걸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상당히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개강 직후, 수업이 끝나서 그런지 이 넓은 학생회 건물에는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말야.”

“굳이 둘이서 말입니까?”

“응. 후배님, 진짜 마교 출신이야?”

“그 질문 오늘 몇 번 받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맞습니다. 천마 천위강 교주님의 둘째 제자가 접니다.”

“흐응, 그렇구나.”

베아트리체가 붉은 입술을 혀로 한번 핥았다. 문득 현재의 나와 베아트리체가 맞붙었을 때 승산을 가늠해봤다. 생각보다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여전히 베아트리체는 순수한 처녀인 데다가, 협인지로의 발동 역시 모호했기에. 버프를 아예 못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순수한 무공으로 싸우면 내가 밀릴 가능성이 컸다. 암살은 불가능하다. 어차피 정파 영역 한 가운데서 다짜고짜 암살할 생각도 없긴 했지만.

“신교 출신인 게 문제가 됩니까?”

“아마도? 나는 별 상관없지만. 안 좋게 보는 사람들 학생회에서도 있을걸.”

“단순히 그런 걸 말하고자 하심이면 그냥 메시지로도 충분했을 텐데요. 어차피 나중 가면 다들 알게 될 거고. 남의 시선이야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니아니아니. 핵심은 그게 아냐.”

베아트리체가 머리카락 끝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그럼?”

“무신제, 후배님도 나가?”

“예. 경험이니까 당연히 나갈 생각입니다만.”

“흐음.”

물끄러미 내 얼굴을 주시하는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냥 안 나가면 안 될까?”

“예?”

순간 이어진 베아트리체의 말에, 입 밖으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짜고짜 무신제에 나가지 말라니.

“난 후배님이 안 나갔으면 좋겠어.”

“맥락도 없이 그러면 저도 당황스럽습니다만. 이유를 말해 주셔야 납득을 하지요.”

“그건 말 못 하는데. 아무튼 안 나갔으면 해.”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가 고운 아미를 잔뜩 찡그렸다. 얼굴에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심정이 묻어나왔다.

“할 얘기는 그것뿐입니까?”

“잠시잠시. 생각 좀 해볼게.”

손위에 포근한 느낌이 닿았다. 베아트리체가 몸을 기울여 은근슬쩍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나는 즉시 손을 뿌리쳤다. 베아트리체가 입술을 샐쭉거리며 나를 흘겨봤다.

“나한테 너무 매정하네, 후배님.”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

“뭐...?”

“할 말 없으시면 가보겠습니다.”

“...너, 그러다 죽을 거야.”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던 베아트리체가 작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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