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말입니까?”
“응.”
“글쎄요. 죽는다는 얘기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가, 별 감흥이 없군요.”
“아, 몰라! 알아서 해. 난 말 했다.”
“예,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하아....”
베아트리체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혈마녀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만.”
“...맘대로 해.”
“예.”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학생회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무신제에 참가하지 말라....
진정 호의로 말했을 경우, 함정일 경우.
두 개로 나눠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며 나는 천천히 상념을 이어나갔다.
단순 호의라면 혈교가 무신제 때 무슨 짓을 저지른다는 얘기였다. 위험하니까 나가지 말라는 얘기겠지.
‘나를 노린다?’
정사마가 전부 참여한다는 얘기는, 혈교의 끄나풀도 숨어들 수 있다는 얘기였다.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근데 혈교 소속인 베아트리체가 내게 그걸 알려줬을까? 아무리 반쯤 미친년이라지만, 쉽게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혈교에서 계획한 게 있다면 배신이나 다름없을 텐데 말이다.
저 얘기를 꺼낸 것 자체가 함정일 경우는, 지금 단계에서 아예 예측조차 불가능했다.
‘머리 아프네.’
미친 자의 생각은 정상인이 해석하기 너무 어려웠다.
고민을 거듭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기숙사 문 앞이다.
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천하연이 파격적인 복장을 하고 내게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경계를 풀어헤친 천하연의 모습이 사뭇 정겹다.
“그대 왔나?”
“어. 학생회실 다녀오느라 좀 늦었네.”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어째 예전보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이 늘어난 느낌이다. 나는 아까부터 자꾸 신경 쓰이는 부분을 결국 물어보기로 했다.
“그, 속옷 제대로 입고 있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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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륵- 대답 대신, 천하연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부드러운 옷감이 살결에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점점 다가왔다.
천하연의 입매가 미려한 곡선을 그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천하연이 까치발을 들고 내 목에 양팔을 둘렀다. 금빛 머리칼이 볼을 간질였다.
“....”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과 코끝을 스치는 진한 목단향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투명할 만큼 하얀 얼굴이 내 귓가로 다가왔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천하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궁금하면 봐도 된다만.”
“...야, 갑자기 뭔.”
반쯤 농으로 말을 건넸다가, 오히려 내가 된통 당한 모양새다. 천하연이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팔을 스르륵 풀었다. 괜스레 민망한 기분에 나는 천하연의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장난이니라. 속옷은 잘 챙겨입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천하연이 드레스 옷깃을 살짝 들어 올렸다. 본능적으로 향하던 시선을 강제로 억제했다.
“이런 장난 좀 그런데.”
“한여름 때문에?”
“...대충?”
털썩. 천하연이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았다. 탄탄한 우윳빛 허벅지가 시선을 자극했다.
“미리 사과하마.”
“사과?”
다소 뜬금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대가 죽는 걸 원치 않는다.”
“당연히 나도 죽고 싶은 생각이야 없지.”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볼 생각이구나.”
“...응?”
“그대는... 화경의 벽이 얼마나 높은 건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어.”
생각보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화경의 벽. 겪어보진 못했지만 끔찍하게 높을 거라는 건 예상이 갔다. 당장 천하연조차 이번 폐관 수련에도 넘지 못했으니까. 아마 그걸 겪고 하는 얘기겠지.
“지금 내 성장세면 1년이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최대 5년은 견딜 수 있다는 말도 있고.”
“모르는 일이지. 또한, 만일 그 1년이 6개월로 줄어들지 않는다 장담할 수 있겠나? 냉정히 생각해 보거라. 희망을 품는 건 좋지만, 그대의 상황에서 지나친 낙관은 경계 대상일 따름이다.”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1년에서 5년이란 모호한 숫자가, 오히려 3개월에서 6개월로 줄어들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껏 외면하고 있던 진실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유혹.”
천하연이 나직하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하연을 쳐다봤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실린 기색이 결연했다. 농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뚜렷한 진심이 느껴졌다. 입안에서 온갖 말이 맴돌았다.
나지막한 어조로 천하연이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도, 나의 친우인 한여름에게도 못 할 짓임은 알고 있다. 허나, 만일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대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견디기 힘들 것 같구나.”
천하연의 입가에 걸린 시린 미소를 보니, 심장이 저렸다.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는 선연하게 느껴졌다. 나는 천하연의 옆으로 가 조심스레 앉았다.
“그... 넌 괜찮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필요에 의해 하는 게?”
처음은 누구에게나 귀중한 경험일 텐데 말이다.
“이건 나를 위함이기도 하니까. 그대와 함께하면 아마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겠지. 무인이라면 마다할 리가 없지 않겠나? 그리고 한 가지 정정하자면.”
내 쪽으로 허리를 틀면서, 천하연이 한 손을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대라면 괜찮다.”
“....”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나는 아마 평생을 독신으로 살 것이고, 남성과 느긋하게 사랑을 나눌 여유 따위는 없을 터이니. 어쩌면 이곳에 다니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볼 수 있겠지.”
“그럼 굳이 내가 아니어....”
“쉿-”
천하연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입술을 꾹 눌러버렸다. 자연스레 하던 말이 막혔다.
“내 말뜻을 제대로 이해 못 한듯하구나. 단순히 그대라면 괜찮은 게 아니라, 그대여야 한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길 생각 따위는 없다.”
“왜?”
조금은 갑작스러웠다. 천하연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마음은 일반적인 호의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으니까.
“글쎄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나.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문득 깨닫고 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지.”
“나는.”
“알고 있다. 그대의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것 정도야. 화답을 바라는 게 아니야. 동등하게 마음을 나누는 걸 원하는 것도 아니구나. 그저, 작은 발자국 정도나마 남기길 바랄 뿐.”
두근. 아까부터 심장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해도, 저런 얘기를 듣고 쉽게 될 리가 없었다.
내가 묵묵히 있자, 천하연이 머리를 톡 내 어깨에 기댔다.
“...저질렀구나.”
그리고는 산들바람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솔직히 말하면, 한여름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면서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힘들었다.
천하연의 바람대로 작은 발자국 정도가 아닌.
내면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진지한 대화 이후, 우리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이러다 사이좋게 잘 기세기에, 나는 먼저 씻으러 들어왔다. 욕조에 물을 받고 몸을 담그고 있던 도중, 한여름이 채팅을 보내왔다.
[야, 인터넷 봄?]
[뭔 인터넷?]
[거기 너 얘기로 도배됐던데. 오늘 기사 떴더라.]
[벌써?]
[잠시.]
한여름이 폰으로 링크 몇 개를 보내왔다. 열어보니 ‘새로 밝혀진 천마의 둘째 제자 정체 알려줌.’부터 시작해서 경지 추측까지 온갖 내용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도 소위 말하는 인방과 렉카들은 존재하는지, 온갖 뇌피셜을 써 내려가며 말하는 걸 보고 있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간 커뮤니티를 둘러볼 여유도 없어서 이제야 보는 거지만, 아예 무인 전문 분석 채널까지 있는듯했다. 연예인 비슷하게 활동하는 무인들도 꽤 많았고.
일단 오늘의 화제는 한여름 말대로, 나에 관한 내용이었다. 전 세계 인터넷이 떠들썩했다.
대부분 ‘누구는 스승 잘 만나서 사기 무공 날로 먹고 누구는 삼재검법이라도 익히려 낭인촌 전전하고’ 이런 느낌의, 안 좋은 얘기가 주를 이뤘다. 다짜고짜 마교랍시고 쌍욕 날리는 글들도 많았다. 쌍욕은 백퍼 정파 무인이다. 반대로 일방적인 찬양도 있는 걸 보아하니, 대충 댓글 다는 꼴만 봐도 진영이 보였다.
종합해 보면 악플에 가까운 내용이 대다수였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멘탈 좀 괜찮아?]
한여름이 조금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른 쪽 때문에 멘탈이 안 괜찮긴 하지만, 적어도 악플 때문에 멘탈이 나가진 않았다. 전혀.
[오냐. 별 느낌 없는데.]
[다행이당. 근데 여기도 노량진이나 신림동 고시촌 같은 곳이 있나 봐. 무인 버전 고시촌인가?]
오히려, 저런 짠 내 나는 현실을 보니 조금은 안타까웠다. 중원무공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생도들이 얼마나 엘리트에 속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나마 사기급 특전이라도 주면서 빙의시켜줬으니 감사하다 해야 할지. 조금은 복잡한 기분이기도 했다.
[그러게. 듣기만 했는데 악플 보니 존나 실감 나네. 흑화한 애들 많구나.]
[저러니까 혈교에 넘어가고 그러나 봐. 근데 제꼬삼이 뭐야?]
[그건 왜?]
[가는 곳마다 누가 이걸로 도배하는데?]
저기나 여기나.
하여간, 인터넷이 있는 한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모양이다.
[제발 꼬추는 3cm. 줄여서 제꼬삼.]
[불쌍하게도. 헛된 희망을 품는구나. 우리 김무공 씨 거기 튼실한 거 봐야 할 텐데.]
[내가 아랫도리는 어디 가서 안 밀리긴 하지.]
[남자들은 그런 거 가지고 자부심 느껴?]
[당연하지. 수컷들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데. 괜히 제꼬삼 거리는 게 아님.]
[오, 지식이 늘었다.]
[암튼, 너무 신경 쓰지 마. 난 인터넷 잘 보지도 않으니까.]
[다행이야. 난 이제 잘라고.]
[그래그래. 얼른 자라.]
아마 자기 전에 폰 만지작거리다 나에 관한 내용을 본 모양이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은근 귀엽게 느껴졌다.
마지막 대화 이후, 짧은 채팅 하나가 뜸을 두고 날아왔다.
[사랑해.]
[...나도.]
조금은 가벼워졌던 마음이 곧장 무거워졌다. 이놈의 양심출타 특성은 왜 결정적인 순간에 내 양심을 안 출타시켜주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그랬으면 훨씬 홀가분했을 텐데.
심란한 기분에 나는 욕조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하며 내면을 관조했다. 진기가 몸을 순환함에 따라 심신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현재 내 경지는....
절정 극.
조금만 더 하면 초절정까지는 도달이 가능했다.
무공을 익힌 기간을 감안하면 말이 안 되는 성장세였다.
문제는 저 ‘조금’이 1년이 될 수도, 10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평생을 절정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스러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야 절정의 벽은 무혼의 보조를 받아 의념을 깨달으면서 비교적 쉽게 넘었지만.
초절정은 또 아예 다른 문제였다. 어찌어찌 초절정을 넘었다 해도 다음은 화경이다.
당연히 경지가 올라갈수록, 벽은 더욱더 높아진다. 화경의 고수가 극도로 드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물며 스물에 화경은, 무림사를 통틀어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너 씻을 거지?”
목욕을 마무리하고 나가자, 천하연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머리를 진기로 말린 후, 곧바로 침대 위로 가서 누웠다.
여전히 생각은 복잡했다.
한참을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도중,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무심코 상태창을 열고 확인하던 나는, 그대로 동작이 정지했다.
그건.
지금껏 봤던 모든 파일 중에 가장 간결했지만.
지금껏 봤던 그 어떤 파일보다도 강하게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나는 좀 더 빨리 각오했어야 했다.』
단 한 줄의 글귀.
반투명한 상태창이 막 씻고 침실로 들어오는 천하연의 모습과 겹치면서.
마치, 누군가 나를 낭떠러지로 떠미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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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목욕 가운을 입은 천하연의 손에는, 기다란 병 하나와 와인잔 둘이 들려 있었다. 천하연이 침대 근처 테이블에 병과 잔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쪼르륵- 천하연이 조용히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한 모금 마셨다.
“마시겠나?”
그리고는 나를 보며 투명하면서도 갈색 빛깔의 액체가 담긴 잔을 흔들었다. 진한 알콜향이 풍기는 걸 보니, 이번에는 술이 확실했다. 나는 천하연의 정면 의자에 풀썩 앉아, 따라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위스키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다채로운 향이 입안을 감돌았다. 농축된 과일 향 같기도 하고, 은은한 바닐라 향 같기도 했다.
“코냑?”
“아마도.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술은 잘 모른다.”
도수는 꽤 있었지만, 어차피 일정 경지 이상의 무인은 진기를 순환시키면 술을 먹어봐야 취하진 않았다. 나는 특히 더 심한 편이었고. 독마의 독도 버틴 몸은 술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다만, 아무런 효과가 없어도 술이란 건 본래 분위기에 취하는 법이다. 특히 침실 안에서 단둘이 이러고 있으니, 자연스레 미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넌 무신제 나갈 생각 없어?”
묵묵히 술만 마시기도 저어해서, 먼저 화제를 돌렸다. 천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교의 후계자란 노리는 자들이 많지.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없어 보이는구나.”
무신제는 전 세계에 방영되는 대축제라 들었다. 천하연이 나가면 단숨에 모든 이목이 쏠릴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