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31)

“그대는 듣나?”

“들어야지. 슬슬 마수 쪽도 신경 써야 하잖아.”

아카데미 2학년으로 넘어가면 이제 ‘실전’을 훨씬 많이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실전이란, 대부분 게이트 관련 사태다. 천하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도 좋다.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정보까지 신교는 파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 감사.”

탁.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난 씻고 올게.”

“그래.”

실은, 마음 같아선 당장 상승한 경지의 힘을 느껴보고 싶었지만.

초절정부터는 ‘평범한’ 수련 장소에서 힘을 썼다간 대참사가 날 수도 있다.

아예 입신지경入神之境이라 불리는 화경化境보다야 못해도, 지금 나만 해도 충분히 인간의 수준을 벗어났다.

온몸의 근육이 힘을 내뿜고 싶어서 근질거렸지만, 당장은 자제했다.

‘기회가 오겠지.’

아마도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나는 확신했다.

***

“현재로서 파악된 마수 등급은 F급부터 SS급까지입니다. 낮은 등급의 마수는 현대무기로 제압할 수 있지만, 급수가 올라갈수록 특이한 역장을 형성하여 현대무기에 강한 내성이 생기기 시작하지요. 그리하여 A급부터는 사실상 통하지 않습니다. 역장을 베어낼 수 있는 무인이 중요한 이유지요.”

청하 교수가 동그란 안경을 쓰고 말을 이었다.

‘마수학’ 수업도 청하 교수가 맡은듯했다.

...아카데미 인력이 이리 없나 싶지만.

그만큼 청하 교수가 유능하다는 얘기겠지.

아니면 이상할 정도로 나와 동선이 겹친 것이거나.

워낙 인간 빌런들을 때려잡는 데 집중해서 그렇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수 같은 것들을 때려잡아야 했다.

내가 혈교 같은 빌런들을 제거하려 했던 것도, 인간들이 제 살 깎아 먹는 걸 막아 게이트 사태를 보다 쉽게 해결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툭툭-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한여름의 옆구리를 찔렀다.

[졸지 말고 일어나.]

“으에?”

한여름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하 교수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한여름을 쳐다봤다. 한여름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청하 교수의 시선을 피했다. 청하 교수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매처럼 똑같은 얼굴로 저러니까, 무슨 한 편의 콩트를 보는 느낌이다.

“자, 자는 분들 깨워주세요! 마수는 장차 여러분들이 상대해야 할 주적입니다. 본 수업에서는 제가 실제로 상대했던 마수들과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내용까지 다룰 예정이니, 주의 깊게 들어주셨으면 해요.”

청하 교수가 앞의 화면에 복잡한 수식이 적힌 프레젠테이션을 띄우며 말을 이었다.

근데 아무리 봐도... 저 안경 일종의 컨셉 아닌가 싶다.

청하 교수 같은 무인이 시력이 떨어질 리는 절대 없는데 말이다.

“수식은 무시하셔도 됩니다. 핵심만 말해드릴게요. F급의 마수가 평균적으로 1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면, E급은 10, D급은 100. 이런 식으로 10배씩 증가합니다. 그럼 현재 파악된 가장 강한 등급인 SS급은, 얼마나 되는 기운을 품고 있을까요?”

“...1000만?”

나는 멍하니 읊조렸다. 게임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애초에 게임 내 마수와 여기 존재하는 마수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차이가 났었나.

“맞습니다. 1000만이지요. 게다가 특별히 강한 개체도 있습니다. 경악한 UN에서는 그들에게 신화 속 괴물의 이름을 붙였지요. 북극으로부터 남하하여 시베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크라켄. 아프리카를 지옥의 대지로 만든 레비아탄. 중국을 멸망으로 몰고 간 수많은 네임드 마수들.”

찰나의 순간, 청하 교수가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안경을 살짝 조절하면서 화면을 넘겼다. 여러 구도에서 찍은, 영롱한 빛깔의 ‘검은 용’ 사진이 나타났다.

마치 우주를 한몸에 담고 있는듯한,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나는 ‘저것’을 알고 있다. 찾아본 적이 있었으니까.

“이것은 중국을 멸망으로 몰고 갔던 SS급 마수 중 하나. 공허룡空虛龍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요.”

자연스레 내 시선이 책상 옆 바닥에 내려놓은 흑룡검으로 향했다. 분명 공허룡의 이빨로 만들었다 했다.

“여기서부터는 기밀입니다. 대외적으로는 비교적 최근에 ‘토벌했다’라고만 알려졌지, 누가 어떻게 토벌했는지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청하 교수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나를 보며 한번 싱긋 웃었다.

“한때 북경을 쑥대밭으로 만든 공허룡은 중국 북부를 따라 한반도로 내려올 뻔했죠. 아니, 거의 확실했습니다. 저것이 사람들이 사는 대지로 다가온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는 뻔했지요. 혼란을 염려하여 비밀에 부쳤지만, 당시에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때, 세 명의 절대자가 공허룡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무적전신 독고패. 천마 천위강. 전륜마존轉輪魔尊 천권악.”

청하 교수가 나직하게 세 명의 무인을 말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독고패 총장까지 나섰던 건 몰랐지만, 사부가 어떤 형태로든 공허룡과 관계있음은 예상했다.

그러니까 한 쌍의 부부검을 나와 천하연에게 각각 넘겼겠지.

“독고패 총장님을 제외한 두 분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천마신교의 분들이지요. 공허룡. 그리고 그것이 이끌고 온 수많은 마수들과 격전 끝에 마침내 공허룡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만....”

옆을 슬쩍 염탐하니 한여름도 지금 얘기는 꽤 흥미진진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명을 들었다.

“일반인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저희는 사실을 은폐했습니다. 그렇게 여겨졌지요. 실은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무림맹에서는 공허룡 토벌에 천마신교가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했어요. 제 수업을 듣는 생도분들도 천마신교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얼굴에 꽂히는 시선이 따갑다. 본인들은 힐긋힐긋 본다고 저러는 거 같은데, 나로서는 대놓고 쳐다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김무공 인기 많네.]

한여름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얼굴 뚫리겠다.]

[괜찮아?]

[고작 시선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지.]

[역시 김무공.]

[졸리진 않아?]

[신교 얘기 나오니까 귀신같이 안 졸림. 근데 전륜마존은 누구야?]

[...나도 처음 듣는데.]

[넌 알 줄.]

[나라고 모든 인물을 알겠냐.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지. 딱 보니까 과거 사람인데.]

[그건 구래.]

채팅창을 구석으로 다시 치워놓고, 청하 교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 전투로 당시 천마신교의 태상장로셨던 전륜마존께서 귀천하셨습니다. 사실상, 공허룡 토벌의 주축은 천마신교였던 셈이지요. 그런데도 천마신교는 딱히 그 사실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본래라면 저 역시 무림맹 소속이니 여러분들에게 공개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청하 교수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우리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리 중요했을까요? 저는 정파의 한 사람으로서, 참담하고, 부끄럽게 생각해요. 저는 지금껏 수많은 마수와 싸워왔습니다. 힘이 필요한 곳은 많고, 무인은 한없이 부족합니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여 대립해서는, 인류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니 오늘 마수학 수업을 기점으로 부탁드립니다.”

안경을 벗어 내려놓고, 청하 교수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적어도 제 수업을 듣는 생도라면, 과거의 편견과 적의를 내려놓고 협력의 길을 모색해주셨으면 합니다. 첫날이고 하니,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요. 고생하셨습니다.”

묘하게 응원받는 느낌에 손뼉이라도 칠뻔했다. 역시 청하 교수는 좋은 사람이다. 한여름도 동경 어린 눈망울로 청하 교수를 쳐다봤다.

[역시 멋있는 사람이야.]

[괜히 저 나이에 화산칠검수가 된 게 아니지.]

[나도 안경 써볼까?]

나는 한여름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는 머리카락을 살짝 헝클었다.

“됐다. 안경은 무슨.”

“왜? 난 안경 쓰면 안 돼?”

[안 쓰는 게 더 이뻐.]

“...읏. 알았어.”

헤실헤실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지신 모양이다. 어제 일이 문득 떠올라 마음 한편이 콕콕 쑤셔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는 천에 돌돌 싸인 흑룡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오후는 수업이 없었던지라 갈 곳이 있었다.

***

“배부르다.”

한여름은 볼록 솟아오른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디저트 먹을래?”

“좋아.”

역시 밥 다음은 디저트지. 살짝 업된 기분으로 김무공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가던 도중,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비밀리에 둘이서 만났으면 하는구나.]

천하연이 주소 하나와 함께 연락을 보내왔다. 한여름은 갸웃하며 폰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비밀? 무공이한테도 알리지 말고?]

[그래.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보냈던 주소로.]

찾아보니 그리 멀진 않았다.

[응. 1시간 정도 후에 괜찮아?]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보면 알겠지 모.’

한여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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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몸도 풀 겸, 나는 경공을 써서 이동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한여름은 갈 곳이 있다며 따로 사라졌다. 어딘지는 한사코 말하지 않기에 뭔가 싶지만. 어차피 나도 확인할 일이 있었다.

성남시의 경계를 벗어나 경기도 광주시 인근으로. 나무 위를 밟고 높이 뛰어다니다 보니, 저 멀리 거대한 잔디밭들이 보였다. 류은채가 말했던 장소와 일치했다. 산속에서 저곳만 별세계처럼 보였다.

‘여긴가.’

본래 골프장이었던 걸 인수하여 신교의 비밀 지부로 만들었다던가. 말이 비밀이지, 이 정도 규모면 어지간한 문파는 다 알 거 같지만 말이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자, 공사 소음 사이로 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주군.”

홍은주가 나를 보며 포권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면을 쳐다봤다. 절정 고수들이 전력으로 비무하는 걸 전제로 만들어진 연무장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저 멀리서 붉은빛의 노을이 나타났다가, 양단되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적하는 이전과 달리 검 하나만 쓰고 있었다. 아마도 적하검을 연습하는 모양이다.

“적하와 노서진인가?”

“예. 연령도 비슷하고 경지도 비슷하다 보니 가장 적극적으로 비무에 나서는 편입니다.”

예전에 서류에서 봤던 바로는 적하가 스물, 노서진이 스물하나였다.

노서진이 익힌 멸절마검滅絶魔劍은 그 이름답게, 극도로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정종 무공 그 자체인 청운적하검과, 마공 그 자체인 멸절마검.

도가 무학이 기본적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공능을 지니고 있는 걸 생각하면, 노서진은 꽤 잘 싸우고 있었다.

물론 한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밀어붙이는 적하가 더 대단한 면도 있지만 말이다. 문득 드는 궁금증에 말을 꺼냈다.

“보통 누가 이겨?”

“무승부가 가장 많습니다. 격해지기 전에 저나 다른 대원들이 개입하는 편입니다.”

“잘했어. 경쟁은 좋지만 조심해야지.”

“예, 류은채 지부장께서도 단단히 강조하셨기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류은채는 안쪽에서 일하고 있어?”

“그렇지요.”

“죽으려 하지?”

홍은주가 살짝 내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류은채는 나를 따라오면서, 홍화각에서 신교 서울지단 비밀지부 지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단번에 몇 계급이나 되는 신분 상승을 겪었긴 해도, 그만큼 일 역시 배로 늘었다는 얘기였다.

“어디서 영약이라도 구해다 먹여야 하나.”

“...괜찮으실 겁니다. 아마도요.”

“그 ‘아마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데.”

“지부장님도 무인이시니 견디실 겁니다. 아...?”

순간, 홍은주가 정면을 보며 움찔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천마군림보를 밟으며 공간을 격하고 나아갔다.

보법에 실린 막대한 의념에 적하와 노서진의 움직임이 단숨에 멈췄다.

적하와 노서진 사이에 파고든 나는 검 두 개를 붙들고 건곤대나이로 회수했다.

“...대장?”

“...공자님?”

대번에 검을 빼앗긴 둘이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방금은 위험했다. 생사결도 아닌데 너무 무리하진 마라.”

각자에게 검을 넘겨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둘이 검을 양손으로 받으면서 몸을 푹 숙였다. 동글동글한 인상의 적하와 백설처럼 하얀 피부, 칼단발에 날카로운 눈매의 노서진이 대비되면서 묘하게 실소를 자아냈다.

“대장,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머리를 슬쩍 든 적하가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빛냈다.

“수업 없는 김에 잘 지내고 있나 보러왔지.”

“저희야 언제나 똑같지요. 수련, 수련, 수련.”

“힘내라.”

“옙! 근데 대장.”

적하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제가 감이 좀 좋은데요.”

“본론만.”

“혹시, 오르셨어요? 느낌이 딱 사부 같은데....”

뭘 말하는지는 뻔했다. 나는 적하의 어깨를 한번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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