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말도 안 돼.”
“대공을 감축드립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적하와 반대로, 노서진이 차분하게 포권했다. 그제야 적하도 따라 하면서 소리쳤다.
“대, 대공을 감축드립니다!”
“대공은 무슨. 아직 갈 길이 멀다.”
“대장이 갈 길이 멀면 저는 언제쯤 천하제일검이 될 수 있을까요.”
“목표가 천하제일검이냐?”
“천하제일인은 아무리 봐도 무리잖아요. 대장도 있고, 소교주님도 있고.”
적하가 툴툴거리며 발로 땅을 긁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둘을 데리고 근처 휴식 장소로 왔다. 연무장 근처에는 휴식을 위해 세워놓은 건물이 있었다.
호다닥 안으로 들어간 적하가 에어컨 바람이 내리쬐는 의자에 앉더니 추욱 늘어졌다.
반대로 노서진은 꼿꼿한 자세로 칼같이 앉아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에어컨도 없이 어떻게 수련했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대장은 좋겠네요.”
“왜?”
“초절정이면 한서불침寒暑不侵이잖아요. 여기까지 경공으로 뛰어오셨지요?”
“그랬다만.”
“...땀 하나 안 난 거 같은데. 나도 꼭 빨리 경지 올려야지.”
“...적하, 공자님께 너무 무례하게 행동하지 마.”
가만히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노서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는 상관없다.”
“아닙니다. 이건 저희 적룡대 기강 문제입니다.”
단호한 저 표정을 보니, 문득 류은채가 생각났다.
하긴, 류은채가 지금 적하랑 내 모습을 봤으면 호되게 뭐라 할 거 같긴 했다.
“언니는 너무 칼 같아서 문제야. 대장은 편한 사람을 좋아해.”
“...시끄러워.”
맞붙은 둘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는듯했다. 저래서 매번 쌈박질하는 거였고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면서, 화제를 돌렸다.
“무신제 신청은 다 했지?”
“옙.”
“네. 적룡대 전원 마쳤습니다.”
“잘했다. 곧 예선이니 몸 관리 잘 해.”
“예.”
한동안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알았는지, 지부 직원들이 와서 시원한 음료를 건넸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셔갈 때쯤, 나는 노서진을 쳐다보며 먼저 물었다.
“할 말 있나?”
아까부터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뭔가 바라는 게 있어 보였다.
“...비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머뭇머뭇하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마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전력을 다할 수는 없겠지만.
아까 둘이 비무했던 장소로 가서 나란히 섰다.
“선공은 하지 않으마. 전력으로 와라.”
한 손만 까딱였다. 홍옥 같은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노서진이 멸절마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쿵-
노서진의 발바닥을 중심으로 진기가 폭발하며, 뜯겨나간 풀 조각과 흙먼지가 분분히 휘날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노서진이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기세만 보면 일격필살에 가까울 정도로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쩌엉-
천마군림보는 쓰지 않았다. 건곤대나이 역시.
손짓에 의념을 실어 가볍게 쳐냈다. 바람이 귓전을 휩쓸고 지나가며, 검기 실린 검이 뒤쪽으로 강하게 튕겨 나갔다.
경악한 노서진이 이를 악물고 한 발을 디뎠다. 진각 경파가 노서진의 발밑에서 터지며 다시금 빛이 번뜩였다.
노서진은 노주광 장로의 손녀라 들었다. 천마신교의 장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당연히 노서진 역시 어릴 적부터 수많은 영약을 복용해온 탓에, 분명 내공량은 막대했다.
‘보인다.’
느려진 시계 속에서.
노서진의 검격이 실시간으로 해제되고, 분석됐다. 그 막대한 내공을 일격 일격에 쏟아붓는 게 멸절마검이었다.
쩌저정-
한 번 막았다고 끝이 아니었다. 마치 연환처럼 계속해서 검격이 쏟아졌다. 마도의 무학이 효율을 중시한다더니, 확실히 극도로 효율적인 검술이었다.
반격은 하지 않았다. 회피도 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느긋하게 손을 휘둘렀다.
덕분에 끊임없이 충돌이 반복됐다.
난타전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물론 난타는 노서진 홀로 하고 있었지만.
쩡-
별 감흥 없이 노서진의 검격을 손날로 쳐내는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절정 고수 정도로는, 아무런 버프 없이도 내게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전에는 고도로 집중해야 겨우 천마군림보에 실을 수 있었던 의념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쓰는 게 가능했다. 이런 잡생각을 하면서도 권기를 뿜어낼 수 있을 정도로.
검을 휘두르는 노서진의 팔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할까?”
공격을 막아내며 나직하게 말을 꺼냈지만 노서진은 묵묵부답이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한 번 스위치 켜지면 끝을 봐야 직성인 모양이다.
...일견 냉철해 보이는 겉보기와는 달리, 불같은 성정을 지닌듯했다.
이대로라면 탈진할 때까지 저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슬슬 끝내는 편이 나았다. 지금껏 억제해놨던 천마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쿵- 막대한 기운이 경맥을 순환하면서 진기를 뿜어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대기가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여유롭게 노서진의 칼날을 막아내며, 나는 오른발 용천혈에 의념을 끌어모았다.
굳이 공격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 검격을 옆으로 회피하며,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꽝-
진각을 중심으로 땅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끝없는 균열이 사방으로 질주했다. 노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이 굳었다.
천마군림보天馬君臨步.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일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혈교 놈들이 말했던 것도 있고, 이제는 유니콘 신공의 원류가 천마신공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천마군림보 역시 원류와 동일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
천마군림보에 실었던 의념을 회수하면서, 비틀거리는 노서진을 부축했다.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노서진이 고개를 슬쩍 틀면서 작게 읊조렸다.
묘한 감회가 일었다. 온갖 버프의 힘만 믿고 싸웠던 때와 달리.
이제는 확실히 본신의 힘만으로도 절정 고수조차 아래로 내려다보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경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성장세를 실감하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급히 다가오는 적하와 홍은주를 보며,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
한편.
김무공과 헤어진 한여름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고급진 거리를 거닐었다.
‘여긴가?’
주소에 적힌 대로 찾아가자, 직원이 밀실로 한여름을 안내했다. 아카데미 근처에는 이런, 무인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장소가 곳곳에 존재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넓은 방에 도착한 한여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왔나.”
화려한 방 안에는, 천하연이 다소곳하게 앉아 한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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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문이 닫혔다.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방. 넓긴 해도 조금 답답함을 한여름은 느꼈다. 천하연의 손짓에 따라 정면 의자에 앉았다. 동그란 테이블을 두고 둘은 시선을 마주쳤다.
“이런 곳까지 따로 부를 일이 있었어? 무공이한테 비밀로 하면서.”
끄덕. 천하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 일인지 여성의 모습이었다.
“심각한 일이야?”
“....”
천하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심각한 일. 당연히 심각한 일이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 한여름은 자신을 보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김무공과 한여름의 관계가 파탄을 맞이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에게 안긴 이후 머릿속을 맴돌았던 온갖 번뇌들이 천하연의 뇌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선 언제나 결론은 똑같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서서히 들렸다.
우웅- 천하연의 몸에서 기운이 일어나며, 방 전체를 기막이 둘러쌌다. 이로써 무슨 소리도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게 됐다.
잔잔하게.
천하연의 입술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 --.”
들었는데, 들리지 않았다.
한여름은 멍하니 천하연을 응시했다.
심장이 철렁했다. 고장 난 카메라처럼, 초점이 일그러졌다.
숨이 멎은듯한 감각. 그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가능성이었다.
“거짓말.”
부정.
김무공이 그럴 리 없다.
자신을 사랑한다 속삭였으면서.
뒤에서는 천하연과 태연하게?
자신이 아는 김무공이라면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김무공의 모든 걸 알고 있다 장담할 수 있나? 일말의 의심이 깃들었다.
떨리는 손을 꽉 쥐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거짓말이 아니다.”
“...김무공이 그럴 리 없어. 내가 아는 김무공이라면.”
“그대가 생각하는 게 맞다. 그는 그럴 자가 아니지. 원래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럼 왜...?”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천하연을 보며, 한여름은 슬슬 짜증이 솟구쳤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만일 둘이 잤다 치자.
왜 그걸 넙죽 자신에게 말한단 말인가.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에 따로 불러서, 소리를 차단하는 기막까지 치고.
사고가 헛돌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한여름은 차갑게 타오르는 눈으로 천하연을 노려봤다. 천하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잘못이구나. 그의 시한부를 이용한 것이지.”
시한부.
단 한 단어만 한여름의 귓가에 박혀 들었다.
“시한부. 무슨 말인지, 똑바로, 제대로 설명해.”
“말 그대로. 그의 독특한 무공은 몸에 심한 과부하를 준다. 게다가 무인도에서 화마정을 몸에 품으며 원래도 위험했던 몸이 한계를 맞이한 것이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길어야 5년, 짧으면 1년. 어쩌면 더 짧을 수도 있다 하더구나.”
“...이상 없다 했는데.”
“그대가 아는 김무공이라면, 자신이 시한부라는 걸 알렸겠나? 다른 이도 아니고, 그대에게?”
한여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자신이 아는 김무공이라면.
...절대 알리지 않았을 거다.
그에게 있어 한여름은 언제나.
처음 봤던 그 모습 그대로인듯했으니까.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조금은 나아졌지만, 어디까지나 ‘나아진’ 것이지.
그는 언제나 똑같았다. 무리한 일은 홀로 감당하려 들었다.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