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코앞까지 다가와서, 한여름이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여름의 표정을 정면에서 볼 자신이 없었다.
“말했어야지.”
툭.
“다른 사람도 아니고.”
툭.
“...나한테는, 말했어야지.”
너니까 말을 못 한 거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한여름도 몰라서 말하는 게 아니고,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가슴팍이 조금씩 젖어오는 걸 느끼며, 나는 한여름의 머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나쁜 놈. 너 죽으면, 혼자 어떻게 살라고.”
뒷머리를 토닥이면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반복해서, 여러 번.
“비겁하잖아. 매번, 이렇게.”
“....”
“내가, 고작 그런 것도 이해 못 할 년으로 보였어?”
고작이 아니다.
아니, 한여름에겐 ‘고작’이 맞을 거다.
그녀가 언젠가 말했었다.
내 목숨을 저울에 올리는 순간, 계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바꿔 말하면, 한여름이 보는 내 목숨값도 그렇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내가 비겁했다. 미안하다.”
내가 비겁한 게 맞다. 알면서도 외면했다.
거리를 살짝 벌리고, 한여름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소매로 닦아줬다.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한여름이 나를 보았다.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설명해. 전부.”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처녀와 음양합일을 하면 경지가 오르는 천마신공.
화마정과 시한부.
천하연과 무슨 관계인지.
양심출타, 협인지로 특성.
천마신공의 원류가 신교에 있다는 것 역시.
지금껏 숨겨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한여름은 묵묵히 내 곁에 앉아 얘기를 들었다.
물론.
정신 나간 유니콘 신공의 효과와 양심출타라는 특성을 봤을 땐 헛웃음을 켜기도 했다.
“...고작 이런 게 뭐라고.”
한여름이 서늘하게 뇌까렸다.
막상 전부 털어놓고 보니, 나도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사소한 오해가 쌓여서 되돌릴 수 없는 지경까지 가기 전에, 적절한 선에서 멈춰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모든 걸 한여름이 대범하게 이해해줬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애초에 한여름에게 솔직히 말하면 ‘이해해줄 것이다’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냥, 지금 돌이켜보면 나야말로 일종의 중2병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홀로 모든 걸 안고 가는 고독하고 외로운 길.
굳이 그래야 할 합리적인 이유라곤 없는데 말이다.
그걸 멋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던 건지.
“...나도 숨기는 거 있었어.”
한숨을 푹 내쉰 한여름이 상태창으로 무언가를 공유해왔다.
[일편단심一片丹心]
등급 : 고유
한 남자에 대한 애절한 사랑의 증거.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등급 : ?
Till Death Do Us Part.
사랑의 증표로서, 김무공과 무혼武魂을 공유한다.
내게 제대로 말하지 않은 두 개의 특성.
비무 때마다 내 예상을 뛰어넘는 능력치를 자랑하기에 뭔가 있겠다 싶긴 했는데, 설마 이런 것일 줄 전혀 예상 못 했다.
톡- 내 어깨에 한여름이 머리를 기대왔다. 그리곤 작게 읊조렸다.
“웃지 마.”
“안 웃어.”
특성으로까지 발현된 사랑의 증표를 보고, 웃을 수 있을 리가. 오히려 쟤가 그 정도로 나를 좋아했을 줄은 몰랐기에. 심장 언저리가 저렸다.
“있잖아.”
“응.”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기억나지. 진짜 당황했잖아.”
“나도 당황했거든.”
“왜? 갑자기 아저씨가 나와서?”
“아니. 난 진짜 배 나온 40대 아저씨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잠시 한여름이 말을 멈췄다.
“뭔데?”
“생각보다 잘생겼더라고.”
“....”
“웃지 마. 여고생한테 얼굴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아?”
“나야말로 털 숭숭 난 아저씨 나올 줄 알았거든. 설마 교복 입은 꼬마애가 나올 줄이야.”
“그때도 꼬마는 아니었거든.”
“그건 그래. 교복 아니었음 성인으로 착각했겠지.”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해도, 한여름은 외모 변화가 거의 없었다. 키도 그렇고. 그때부터 외형적으론 완성된 상태였다.
“아무튼. 처음 보자마자 바로 반해버렸어.”
“...너무 계기가 없는 거 아냐?”
“소설도 아니고, 현실에선 원래 반하는 데 계기 같은 거 안 필요하거든.”
“그건 그렇다만. 아무리 그래도.”
“게임에서는 밥맛이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차분하고. 배려심 있고. 잘생겼고. 네가 나쁜 거야.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애였어도 분명 위험했어.”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아니긴. 천하연만 봐도 알겠는데.”
“....”
천하연을 얘기하니까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천하연도 대체 내 어디를 보고 좋아하는 건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첫눈에 반하고, 너를 보며 점점 좋아지고. 어느 순간부터 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됐고. 내가 티 엄청 냈는데. 몰랐어?”
“...몰랐지.”
티 냈다고 하기엔, 현실에서 한여름의 행동은 애정행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짜 몰랐구나.”
묘하게 허탈한 목소리였다.
“맨날 치고박고만 했잖냐.”
“자꾸 어린애 취급하니까 열 받아서 그랬지. 내가 멍청하긴 해도 네 생각만큼 어린애는 아니었거든.”
“애초에 미성년자는 연애 대상이 아니에요.”
“남들은 잘 사귀던데? 내 친구 중에서도 몇 있었어. 대학생이나 직장인이랑 사귀는 애들.”
“내 기준이 중요한 거지. 남들이사.”
“암튼, 처음에는 고잔 줄 알았다니까. 발기부전이라든지.”
“...뭔.”
“한 집에서 자주 먹고 자고 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심지어 상대는 미소녀 여고생이다. 이게 말이 된다 생각해?”
“본인 입으로 미소녀라 얘기하는 건 좀.”
한여름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입을 열었다. 아까보단 확실히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지구는 돈다처럼 당연한 사실이잖아. 그래서 너 기절해있을 때 아침에 유심히 관찰했는데, 잘 서더라고.”
“....”
나는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얘기가 왜 이런 쪽으로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고자는 아니겠구나 안심했지. 근데 철벽 너무 심했어. 무슨 나랑 몸이라도 맞닿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내가 무슨 금 간 도자기야? 건드리면 깨져?”
“아니, 나도 남잔데 가끔 그런 생각 들긴 했지.”
조금은 억울한 기분이다. 누구 때문에 그간 연애도 못 했는데. 한여름 신경 쓰다 보면 여자 생각이라곤 할 수도 없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생각만 하지 말라는 얘기야. 나 유리처럼 뭐만 하면 와장창 깨지는 여자 아니니까. 이제 미성년자도 아니잖아.”
“...그래.”
“그리고.”
한여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섹스한 거, 천하연 뿐이야?”
“당연하지. 숨긴 거 없어.”
“하아....”
“....”
“천하연, 좋아해?”
예상치 못한 질문이 훅 들어왔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아마도.”
“나쁜 새끼.”
“할 말이 없다.”
“솔직히, 진짜 열 받거든. 천하연과 잤다는 사실보다, 네가 천하연에게 마음을 줬다는 게 더 짜증 나.”
꽉 쥔 주먹으로 허벅지를 꾹꾹 눌러대며 한여름이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알지. 아니까 더 짜증 나. 사랑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너를 미워하기는커녕 좋기만 한 것도 짜증 나고.”
“....”
“아까 너를 미워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 봤거든.”
뚝뚝.
또 한여름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근데, 역시 안 되겠더라. 내가, 어떻게 널 미워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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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충분히 진정될 때까지.
미약한 떨림까지 멈추고, 한여름이 천천히 몸을 뗐다.
“아씨, 난리도 아니네.”
나는 묵묵히 근처에 있는 물티슈를 건넸다. 한여름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는 내 가슴팍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옷 괜찮아?”
“여기 갈아입을 거 있어.”
“...다행이네.”
“너야말로 좀 괜찮냐?”
“안 괜찮아.”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그래.”
“나만 바라보라는 얘기는 안 할게. 지금 그럴 상황은 아닌 거 같으니까.”
“....”
“화경 찍어야 한다며. 계획은 있어?”
“없지. 영약도 별 효과 없을 거라 하고. 그냥 계속 수련하는 수밖에.”
한여름이 입술을 샐쭉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여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천마신공. 이용할 생각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내가 색마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