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죽게 생겼는데 그런 게 중요해?”
“양심이 있지 나도.”
누구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건데 말이다. 나도 조금은 억울했다.
“난... 상관없진 않지만. 견딜 수는 있어. 네가 살 수만 있다면.”
“이용한다 치자. 아무한테나 가서 ‘오늘 섹스하자. 네 처녀를 원해.’ 하면 미친놈이라며 뺨 맞지 않을까?”
“...여러 명 들이대면 몇 명은 통할 거 같은데.”
“대체 뭔 근거야. 나한테 무슨 최면어플이라도 있는 줄 아냐?”
“최면어플만큼 강력한 게 있잖아.”
“...그럴 리가.”
“왜 이럴 때만 둔감남으로 변하는 거야.”
“객관적인 거지. 원래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거부터 먼저잖아.”
“하아... 본인이 나서서 해도 모자랄 판에. 나한테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어?”
“그러게나 말이다. 양심출타 특성이 일을 안 해.”
“...고려는 해봐. 마음은 쉽게 주지 말고.”
“노력은 해볼게.”
“그리고 그....”
한여름이 살짝 볼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뭔데?”
“...천하연이랑 나, 어느 쪽이 좋았어?”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까까지 울던 애가,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날릴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잘 모르겠다’였다. 둘 다 좋았으니까.
이제 거짓말 안 하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신도 날 이해해줄 거다.
“당연히 네가 더 좋았지.”
“...그래?”
한여름의 입가가 살짝 씰룩거렸다.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비교할 수는 없지.”
이건 진심 섞인 얘기였다. 내게도 처음은 한 번뿐이었으니까.
“에이씨. 들으니까 또 열 받네.”
한여름의 눈이 고양이처럼 찢어졌다.
퍽- 옆구리에 한여름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화난다고 말하는 것치곤, 표정은 분노와 거리가 멀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당초 그런 걸 왜 묻냐.”
여심이란 종종 종잡을 수가 없다.
“그냥, 궁금하잖아.”
입술을 빼죽 내민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부드럽게 머리를 헝클었다. 슬슬 외출 시간이 아슬아슬해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
김무공과 한여름이 떠난 이후, 류은채는 집무실로 복귀했다.
‘...이상해.’
홍화각 출신인 류은채는 방 안의 몇 가지 흔적만 보고도 상황을 유추해내는 법을 배웠다. 혹시 모를 암살자 같은 자들로부터 천마궁 같은 시설을 보호해야 했으니까. 당연히 눈썰미가 엄청나게 좋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한여름의 격한 움직임. 태연한 척했지만, 실핏줄이 불거진 한여름의 눈. 김무공이 갈아입은 옷. 구겨진 물티슈 등.
이 모든 걸 종합해본 결과, 둘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한여름이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물론 나올 때는 어느 정도 해소된 모양이지만.
류은채는 컴퓨터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며 의미 없는 클릭을 반복했다.
워낙 경황이 없어 얘기를 못 했지만, 류은채의 집무실에는 감시용 카메라가 비밀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무인조차 발견하기 힘들게 만들어진 신교 특제였다.
혹시라도 누가 몰래 침입할 수 있었으니까.
당연히 소리도 전부 녹음된다.
한여름의 요청에 따라 방을 나가기 전, 그간 피로가 겹쳐서 그런지. 류은채는 그걸 끄는 걸 깜빡해버렸다. 김무공과 한여름 역시, 감정의 격류에 휩싸여 발견을 못 한 듯했다.
‘...안 돼.’
주군의 비밀을 파헤치려 드는 건, 수하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허나, 류은채는 주군을 올바르게 보필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잠깐, 확인만 해보자.’
비밀로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류은채는 기록된 파일을 눌렀다.
둘의 대화 내용이 흘러나옴에 따라 류은채의 눈동자가 시시각각 커졌다.
“지부장님!”
쾅- 거세게 문이 열리며 적하가 들어왔다. 류은채가 다급히 보던 파일을 닫았다.
“노크. 하라고 했지요?”
류은채가 차갑게 적하를 노려보았다.
“죄송해요.”
문을 닫고, 천연덕스럽게 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지요?”
“그그... 저, 들어버렸는데요.”
“네...?”
“제가 귀가 좀 좋아서.”
집무실은 당연히 방음이 됐다. 하지만, 적하 정도의 무인이 못 들을 정도로 철저하진 않았다.
그리고 류은채는, 둘의 대화 내용을 몰입해서 듣느라 주변 경계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미쳤지.’
주군의 비밀을 파헤치려 드려 한 것도 모자라, 부주의한 실수로 인해 수하가 엿듣게까지 만들다니. 평소의 류은채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류은채는 서늘하게 뇌까렸다.
“잊으세요. 저도 잊을 테니까.”
김무공이 말했던 천마신공의 공능과 시한부, 천하연에 대한 초반부 얘기까지만 들었지만.
애초에 눌러본 것 자체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류은채는 당장 파일을 삭제하고, 신교에서 쓰는 비밀 파기용 클리너까지 돌려버렸다.
이제 둘의 대화는 영원히 복구할 수 없으리라.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근데 우리 주군 그러면, 신녀님에 소교주님까지? 능력 너무 좋은 거 아냐...?”
“...거기까지 하시죠.”
“아니, 지부장님도 생각해 봐요. 아무리 우리 주군이 잘생겼고, 능력도 좋다지만 이러다 아랫도리로 신교 장악하겠어요.”
“...적룡대 다른 대원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
“알아요. 저야 뒷배가 없지만 다들 신교에 한두 개씩 빽 달고 있잖아요? 이거 완전 초대형 스캔들인데. 알렸다간....”
“신교가 뒤집히겠지요. 장로님들이 소교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야 유명하니까요.”
류은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 자신에게 선을 대려는 장로도 있었다. 거절했었지만.
“근데 이거 심각한 거 아녜요?”
잠시 집무실 안을 서성이던 적하가 툭 내뱉었다.
“그보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죠?”
“주군 반응이 영 요상해서 점을 쳐봤거든요. 그러니까 더 요상한 게 떠서. 혹시나 해서 왔지요.”
“그 점, 꽤 잘 맞네요.”
“그쵸? 슬금슬금 고양이걸음으로 와봤더니, 귓가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과장되게 적하가 몸을 떨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예. 저밖에 없었어요. 다들 훈련 끝나고 휴식 시간이라.”
류은채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건 다행입니다만.”
“우리 대장.”
“주군.”
냉랭한 말투로 류은채가 정정했다.
“...주군 1년 내로 화경 가능할까요?”
쪼르륵- 답답한 마음에 류은채가 냉수를 따랐다.
“불가능하겠지요. 보통이라면.”
초절정에서 1년 내 화경에 도달한 사례는, 적어도 류은채가 알기로는 거의 없었다.
“내 순결이라도 바쳐야 하나? 진짜 신교는 기괴한 무공 많네요. 방중술의 일종이라 보면 그리 이상한 건 아닐지도. 도가에도 있으니까.”
“켈룩-”
순진무구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일삼는 적하의 목소리에, 류은채는 마시던 물을 뿜을뻔했다.
“저희는 무인입니다. 밤시중 드는 사람들이 아니라요. 그리고 저런 무공은 저도 처음입니다. 신교 무공 중에서도 주군께서 익힌 무공이 유독 특이한 겁니다.”
“저도 알아요. 그냥 답답해서 해본 말이지.”
적하가 툴툴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원칙적으로는 지부장인 류은채가 상급자였지만.
어차피 적룡대는 김무공의 직속 부대.
교주와 김무공을 제외하면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류은채가 강제성 있는 명령까지 내리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이 모든 건 어차피 형식적인 부분이고.
김무공은 사실상 류은채를 적룡대주와 동급 취급하고 있긴 했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고심해보도록 하지요. 이 사안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 아예 잊어주시면 더 좋고요.”
“제가 기억력이 좀 좋아서. 잊기는 힘들 것 같네요.”
“그럼 입 꾹 다무세요. 논의할 일 있으면 주변 확인하고, 저한테만.”
“넵. 명심할게요.”
모종의 유대감이 형성된 걸 느끼며, 둘은 시선을 마주치고, 머리를 끄덕였다.
***
“저기.”
한여름이 손가락으로 근처를 가리켰다.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뉘는 갈림길이었다.
나는 한여름의 허리를 껴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말캉한 감촉과 진한 향기가 밀려들었다. 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짧은 키스를 나누고 다시 안았던 팔을 풀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한여름이 조금은 부끄러운 듯 말을 건넸다.
“이젠 상관없어.”
볼 테면 보라지 뭐.
어둑어둑한 아카데미의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인지. 묘하게 감상적이 되는 느낌이었다.
뭔가 헤어지기 싫을 정도로.
한여름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쭈뼛거리기만 했다.
그러더니 한 발짝 걸음을 내디디고, 까치발을 들어 내 입술에 한 번 키스했다.
“내일 봐.”
“...그래. 잘 자라.”
“응.”
떠나가는 한여름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나도 기숙사 쪽으로 움직였다.
찬찬히 걷던 도중, 채팅 하나가 툭 날아왔다.
[맞다, 말 못 한 거 있는데.]
한여름이었다.
[뭔데?]
[...나보다 다른 사람이랑 더 많이 자면 안 된다?]
순간 머리가 얼얼했다. 다른 사람. 아마 천하연을 말하는 거겠지.
[얌마, 그게 뭔.]
[나도, 각오하고 하는 얘기야. 농담 아냐.]
[당연한 얘기를.]
...순간 뇌리를 스치고 간 쓰레기 같은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럼 됐고.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한다고.]
[응. 끝까지 말해줘.]
[...그래.]
채팅을 닫고,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들어가서 천하연에게도 감사를 표할 필요가 있었다.
내 미숙함을 바로잡아줬으니까.
본인이 악역이 될 걸 각오하고.
한여름도 그렇고, 천하연도 그렇고.
참, 내게는 과분한 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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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문을 닫고 들어가니, 소파에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있는 천하연이 보였다.
“나 왔어.”
조금은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