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던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천하연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가 시선을 내리깔고 작게 우물거렸다.
“...해결은 잘 됐나?”
“네 덕에. 고마워.”
천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너 아니었으면 큰 실수 할뻔했지. 고맙다.”
진심을 담아 나는 말했다. 천하연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그런가.”
“그런 거지.”
“그녀가, 원망하진 않았나?”
“착해빠진 애거든. 원망은 무슨. 내가 잘못했지. 미리 말했으면 다 이해해줬을 텐데.”
“...잘 풀린 것 같구나.”
“생각보다 더.”
“방, 옮겨야 하지 않나?”
천하연이 소심하게 내 눈치를 봤다.
“방은 왜?”
“...그대와 이전처럼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이전처럼... 까지는 무리지.”
이미 천하연과 관계를 한순간 그건 물 건너갔다.
“그럼 옮기는 게.”
“괜찮아. 마음 같아선 셋이서 지냈으면 더 좋겠는데. 그건 안 되니까.”
“세, 셋이서?”
“...일단은 묵인해준다더라. 글고 너한테도 말할 게 있는데.”
나는 현실 얘기를 제외한, 천마신공의 효과나 무혼, 협인지로 같은 걸 천하연에게 털어놓았다.
“처녀와 음양합일을 통해 경지 상승이라... 그래서 그런 엄청난 효과가 발생한 거였나. 믿기 힘든 기사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겠구나.”
천하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상태창과 현실 얘기까지 해야 하나 좀 고민했지만, 일단은 말하지 않았다. 천하연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함부로 그런 걸 털어놨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변덕스러운 상태창이 패널티라도 부여했다간 대참사였다.
“한여름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내가 화경에 도달하는 걸 원하더라.”
“그녀가 허락했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게 낫지 않겠나?”
천하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까지 그러기냐.”
“그대의 정인 몰래 정을 나눈 나로서는,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그대가 무얼 하든 제지할 자격이.”
“아니. 그렇게 얘기하면 여름이도 엄청 화낼걸?”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천하연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렇구나. 그녀라면 불같이 화내겠지.”
“암튼, 난 쓰레기라 한여름도 좋고 너도 좋거든.”
“정말 쓰레기 같은 발언이구나.”
“네가 그랬잖아. 쓰레기가 될 각오 하라며.”
“그랬던가?”
“이제 와서 오리발이냐.”
“농담이다.”
“이게.”
나는 소리죽여 웃는 천하연의 목덜미를 손으로 잡고 주물럭거렸다. 어깨를 살짝 움츠리던 천하연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진한 목단향이 코끝을 스쳤다. 천하연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내 무릎 위에 닿았다. 마치 내가 무릎베개라도 해주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보통 남녀 위치가 반대 아닌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나는 천하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천하연이 무릎 위에 머리를 뉘고, 입술을 달싹였다.
“나쁘지 않겠구나.”
“뭐가?”
“그대의 몸이 다 낫고... 우리가 아카데미를 졸업한다면. 다 같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우리 사부만 허락하신다면 말이지.”
움찔. 사부 얘기가 나오자마자 천하연이 몸을 떨었다.
“...그대를 죽이려 들 수도 있겠구나.”
“그치?”
사부 성정이면 단순 일대일 동거도 용납 안 해줄 것 같은데.
셋이면 말할 것도 없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구나.”
“필사의 각오로 사부 앞에서 팔이라도 먼저 자를까?”
“...그대가 아버지보다 강해지면 된다.”
“....”
사부보다 강해지라고?
열심히 생각해 봐도, 다 같이 사이좋게 할아버지 할머니 되어서 모여 사는 그림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냥 실버타운이잖아.
게다가 저 얘기는 힘으로 사부를 꺾으라는 거니까.
“패륜아냐?”
“...어쩔 수 없다.”
천하연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정지했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무섭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아버지를 힘으로 제압하라는 건 좀.
“그리고, 아버지라면 기뻐하실 거다.”
“제자가 스승을 제압해도?”
“스승들은 대개 이율배반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제자가 자신의 품을 벗어나지 않길 원하면서도, 언젠가는 자신을 뛰어넘기를 바라지.”
“...부모 같네.”
나를 제자로 받을 때 사부가 비슷한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제자와 스승은 부모자식 간의 관계와 같다던가.
“무인들의 세계에서는 다를 게 없다. 그러니 사제지연을 함부로 맺지 않는 것이고.”
“그럼, 사부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해야겠네.”
“좋은 말이구나. 목표는 높게 잡는 게 좋지.”
사뭇 즐거운 음색으로 말하며, 천하연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천하연의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냥. 좋아서 말이다.”
“실없긴.”
천하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조금씩 다가오더니, 내 이마에 한 번 키스했다. 그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은 여기까지만.”
“응?”
“...친우끼리 따로 풀 문제도 있으니 말이다.”
친우. 아마 한여름을 말하는듯했다.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으니, 천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자의 세계란 것도 있는 법이니. 그대는 몰라도 된다.”
“어, 그래.”
여자의 세계라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폭풍과도 같은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의 일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변화를 겪었기에 달라지지 않은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후배님, 또 딴생각하지?”
베아트리체가 몸을 살짝 내밀고, 뱀처럼 가늘게 좁힌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날씨 좋구나 싶어서요.”
나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봤다.
정오의 태양이 발하는 빛살이, 흔들리는 관목 사이로 내리쬐고 있었다. 우리는 그 아래서 무신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부분의 일은 고용된 사람들이 직접 했지만, 몇몇 부분은 당연하게도 아카데미 학생회에서 나서야 했다.
“무공이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
근처에서 나를 거들던 한여름이 차갑게 내뱉었다.
“애인이라고 지금 편드는 거야?”
“너무 달라붙지 말라는 얘기에요.”
“학생회에서 우리 후배님 챙기는 게 나 말고 누가 있다고.”
“저 있으니까 굳이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요.”
“후배님 꽤 앙칼지네.”
“선배님도요.”
베아트리체와 한여름은 어느 순간부터 가식을 벗어던지고 시시각각 부딪히더니, 매번 이런 꼴이었다. 처음에는 말렸는데 나도 그냥 포기했다. 저러면서도 할 일은 서로 협력하면서 척척 하는 걸 보니.
이걸 손발이 맞는다 해야 할지 안 맞는다 해야 할지 복잡한 심경이었다.
“이런 건 그냥 사람 쓰면 안 됩니까?”
나는 학생회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나무 사이로 설치하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굳이 학생회에서 할 필요가 없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 쓰면 되지.
“전부 사람 쓰면 재미없잖아. 학생회 전통이야. 일 년에 한 번 있는 축젠데.”
“다른 분들은 안에서 일하는데.”
“안에서 일할래?”
“아뇨.”
복잡한 서류랑 씨름하는 것보단 몸 쓰는 게 낫긴 하지.
“봐. 내가 배려해준 거라니까. 안 그래도 학생회에서 후배님 보는 시선 이상한 거 알지?”
“그러게요. 몇몇 분은 노골적으로 피하시던데.”
그나마 회장인 모용성과 부회장인 베아트리체, 그리고 묵수대주 철무진은 기존과 같이 대했기에 딱히 어려움은 없었다. 어차피 학생회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1학년은 더더욱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멍청한 거지. 후배님 같은 거물을 몰라보고.”
“....”
이 여성이 진짜 혈마녀 제갈혜가 맞긴 맞을까.
저 환한 미소를 볼 때마다 회의감이 종종 들었다.
당장이라도 노골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지켜보다 보면 언젠가는 허점을 보이겠지.
“조금 쉬자. 카페 갈래?”
“카페 갈래?”
나는 바로 옆의 한여름을 보며 물었다.
“좋아.”
잠시 나와 베아트리체를 번갈아 보던 한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승자, ICK의 앨리스!
카페 내에 설치된 거대한 디스플레이에서 함성 소리가 흘러나왔다. 앨리스라 불린, 거대한 대검을 무기로 쓰는 여성이 화면을 보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비무대 한가운데서 휘날리는, 곱게 땋은 금발이 꽤 인상적이었다.
올해 무신제는 규모를 확대한 탓에, 다른 지역에서도 예선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주문한 커피를 들고 디스플레이가 잘 보이는 좌석에 앉았다.
“ICK가 뭐야?”
내 옆에 딱 붙어있던 한여름이 화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커피를 홀짝이던 베아트리체가 대신 답했다.
“Imperial College of Knight. 줄여서 ICK. 영국의 유서 깊은 무인 양성 아카데미야.”
“그런 게 있었구나.”
“우리 아카데미가 가장 유명하지만, 각국에도 나름 유서 깊은 아카데미들이 있거든.”
“들어본 적 있습니다.”
나는 머리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장 우리나라 근처도 신경 쓰기 바빠 자세한 건 알아보지 않았지만.
당연히 무인들은 이쪽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국뽕 게임 특성상 이쪽이 워낙 압도적이라 그렇지. 다들 살아남기 위해 나름 필사적이었다.
“아마 여유 있는 국가에서나 이쪽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까. 이름값 있는 곳은 몇 안 되지 않을까?”
“학생회로 들어온 정보는 없습니까?”
“대충 있지. 미국의 히어로 아카데미나 프랑스의 ARC(Académie Royale des Chevalier), 독일의 Kriegsschule까지는 확정 아닐까 싶은데. 그쪽 대표 정도 되면 예선은 무조건 통과할 테니까.”
다들 알고 있는 곳들이었다.
베아트리체의 말대로 대부분 국가에서는 생도를 진지하게 키울 시간도 없이 최소한의 교육만 마치고 전장에 내보내느라 바빴다.
대표까지 뽑아서 이쪽으로 교류를 보낼만한 국가는 당연히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은 안 나갑니까?”
“내가 나갔으면 좋겠니?”
“예.”
“싫어.”
이럴 때는 또 철벽이다. 무슨 무공 쓰는지 좀 보고 싶은데 말이다.
[내가 비무 신청이라도 해볼까?]
한여름이 슬쩍 채팅을 보냈다.
[절대 안 받아줄걸.]
[막 시비를 더 건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