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1)

[그러진 마라. 경계를 풀어야 정보 캐내기도 쉽지.]

[그건 그래.]

슬쩍 한여름과 시선을 교환했더니, 베아트리체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나는 후배님도 그냥 안 나갔으면 하는데.”

“그건 안 됩니다.”

위험이 있다면 오히려 ‘무슨’ 위험이 있는지 파악해야 했다. 어차피 초절정까지 오른 이상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상대는 거의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을 혈교는 모르고 있으니.

이건 혈교에 대한 함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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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 직원의 보고를 받으면서, 장백검군 고승빈은 눈썹을 꿈틀했다. 무신제 진행을 총괄하는 건 고승빈의 역할이었다.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Kriegsschule 대표는 탈락입니까?”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과 다르게 독일 지역 대표는 딱히 소속이 없었다.

“예. 독일 대표는 다른 자로 결정됐습니다.”

“누구죠?”

“이자입니다.”

학사 직원이 화면에 인물 하나를 띄웠다. 선이 굵은 남성의 사진이었다.

“오스카 폰 샤움베르크?”

고승빈이 나직하게 사내의 이름을 읊조렸다.

“샤움베르크 가문의 장자입니다. 독일에서는 나름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라고 합니다만.”

“딱히 들어본 적은 없군요.”

“예. 최근 들어 두각을 나타낸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쪽 지역에서도 꽤 이변으로 취급하는 모양입니다.”

“신원 확인 철저히 부탁드립니다.”

“맡겨주십시오.”

고승빈은 화제를 돌렸다. 특이하긴 했지만 어차피 무인들의 세계는 변수투성이였으니.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일본은 역시 불참입니까?”

“그렇습니다. 사할린 쪽이 심상치 않은가 봅니다. 일본 소속 모든 무인에게 비상 대기령이 내려졌습니다.”

사할린섬과 대륙을 연결하는 타타르 해협은 그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특히 포기비와 하바롭스크 간의 거리는 고작 7km. 수심도 얕은 탓에 마수들이 섬 안까지 밀려들었다. 중국 북부부터 시베리아 동부는 사실상 방치 상태였기에, 사할린은 마수들을 막는 최전선 중 하나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형 게이트가 터져 버렸으니.

한가하게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심지어 무림맹까지 지원 요청이 들어와, 총장인 독고패는 무림맹 회의에 급히 참석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무신제 준비는 거의 끝나갑니까?”

“예.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철원 평야에 설치된 메인 비무대도 완공됐다고 합니다.”

“좋군요. 그....”

잠시 뜸을 들인 고승빈이 입을 열었다.

“1학년, 천하연 생도 혹시 참가합니까?”

“...신청자 명단에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김무공 생도는?”

“참가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고승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선을 가볍게 통과한 적룡대 포함. 본선에 천마신교 무인만 열한 명이다.

‘좋은 자극이 되겠군.’

대부분 생도들은 천마신교가 강하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지만, ‘얼마나’ 강한지에 관해서는 완벽히 무지했다. 거기에 정파 무인의 자존심까지 곁들여지니, 모르는 상대를 얕보기도 쉬웠다.

그러다 현장에 나가서 천마신교의 실체를 처음 마주하고 충격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정저와井底蛙에서는 빨리 벗어날수록 좋다.

고승빈은 그리 믿었다.

***

토요일.

축제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벌써 중원무공아카데미 인근은 유동인구로 가득 찼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과 무인들, 길드 관계자나 언론, 생도 가족. 심지어는 축제를 중계하러 모인 수많은 개인 스트리머까지. 난장판에 가까웠다.

물론 아카데미 부지 인근은 철저하게 통제되었기에, 아무나 드나들 수는 없었다.

“으아... 사람 진짜 많다.”

한여름이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통제된 인원’만 해도 아카데미 내부를 채우기엔 충분했다. 애초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구역은 아카데미 일부에 불과하기도 했으니까.

저런 상황 때문에 주말인데도 외출은 꿈도 꿀 수 없어서, 우리는 아카데미 내부 카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카페 내부 디스플레이에서는 연신 무신제에 관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세계적인 축제긴 하나 보다.

“뭐 먹을래?”

“나 무화과 타르트.”

한여름의 요구대로 착실하게 주문한 디저트를 들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슬슬 대진표 나올 때가 됐는데.”

무화과 타르트를 포크로 푹 찍으며 한여름이 폰을 뒤적거렸다.

“너무 일찍만 안 붙었으면 좋겠다.”

“아마 신교 출신들은 적당히 배분하지 않을깜?”

“듣고 보니 그럴 거 같기도.”

이왕 축제하는 거, 즐기면 더 좋으니까.

학사에서도 신교 출신을 한곳에 몰아넣는 것보다 여러 곳에 분배하여 이슈를 극대화하는 쪽을 선호하긴 할 거다.

우우웅-

무화과 타르트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한여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중, 주머니의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동시에 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진표 왔냐?”

“왔어. 난 E조, 첫 상대는 대호 길드 송영근이라는 분이네.”

“처음 듣는데.”

“나도 처음이야. 인터넷 찾아보니까 대충... 일류 초입 정도 되는 듯?”

“낙승이겠네. 방심하진 말고.”

“응. 넌 A조네.”

“나도 같이 좀 보자.”

한여름이 내 쪽으로 와서 몸을 딱 붙이며 화면을 보여줬다.

“이분도 처음 듣는데. 새마을 길드 양춘식?”

“후기지수 맞아?”

길드부터 본인 이름까지. 도저히 후기지수 연배 느낌이 아니었다.

“...일단은 맞나 봐.”

타닥타닥 폰을 두드리면서 양춘식에 관한 내용을 찾았다. 의외로 사진만 보면 건실한 청년 모습이었다.

“사파 쪽인가 보네.”

“지금은 합법적인 사업 위주로 하고 있다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긴 하지.”

“A조랑 E조면, 우린 결승까지는 안 만나겠구나.”

한여름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128강부터 시작, 싱글 엘리미네이션 방식으로 패자전은 없었다. 적룡대 대원들도 골고루 분배된 걸 보니, 편의상 16명을 한 조로 구분하여 시딩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결승까지 올라올 자신은 있고?”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한여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슬쩍 주변에 소리를 차단하는 기막도 둘렀다. 남들이 우리 대화를 들어서 좋을 건 없으니.

“무리하진 마. 비무하다 다치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잖아.”

“...너도 조심해. 무리는 맨날 지가 하면서.”

“이래 봬도 초절정이거든. 천하연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후기지수 중에서 내 상대는 없다는 말이지.”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 혈교 놈들 습격할 수 있다며?”

“정확히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얘기지. 신분을 위조하고 비무에 참가할 수도 있고.”

설마 대놓고 일을 벌일까 싶지만.

위장이라고 하기엔, 베아트리체의 표정은 분명 한없이 진지했었다. 그건 내 위험을 확신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태도였다.

“움. 그쪽일 가능성이 높겠네. 비무 때 사람 다치거나 죽는 건 흔하다 들었어.”

“응. 글고 참가는 안 했지만, 천하연에게 미리 부탁은 해놨거든. 혹시 모를 위험 있을 수 있으니 경계 부탁한다고.”

“그럼 뭐, 안심이겠네.”

“그래도 낌새 이상하면 바로 기권해. 혈교 무공 중에 자폭하는 부류도 있잖아.”

“맞아,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지만....”

“혈교는 충분히 그렇게까지 할 놈들이지.”

“그게 문제야.”

한여름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혈교 얘기는 일단 여기서 그만 하고, 우리는 다시 대진표로 눈을 돌렸다.

“너 양춘식 이기면 다음 상대 당소손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여름이 말했다.

“그러겠네. 어지간해선 당소소가 올라올 테니.”

이걸 운명의 장난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라 해야 할지.

내 64강 상대는 아마 당소소가 될 것 같다.

“...이쪽은 너 진짜 죽이려 드는 거 아냐?”

“불가능이지. 당소소가 자폭공 써도 답 없음.”

“금지된 독을 쓴다든지?”

“태양지체랑 천마신공 조합에는 독 전혀 안 통하더라. 오히려 내공으로 소화해버리던데.”

“뭐 그런 사기가 다 있어.”

질렸다는 어조로 한여름이 내뱉었다.

“너도 아마 비슷할걸?”

“...그런가.”

“오냐. 거의 확실함.”

초대 천마가 직접 창안한 천산신녀공이 고작 독에 무너지진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극음이든 극양이든, 우리가 지닌 신체는 독기운이 침습하기엔 너무 강력했다.

***

월요일.

이제는 확실하게 선선해진 9월 말의 아침 날씨.

우리는 평소에 잘 입지도 않던 예복을 갖춰 입고, 대연무장에 도열했다.

그런 생도들의 주변으로 엄청난 인파가 대연무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곧 무신제 개막을 알리는 의전 행사가 시작된다. 주변을 둘러보니 입학식과 비교해도 훨씬 화려하고 거대한 규모였다.

형형한 기세의 무인들이 예복을 입고 절도있게 있는 모습은 자못 봐줄 만했다.

나와 한여름은 학생회 소속이라 가장 앞줄에 서 있었다.

[이게 전 세계로 방영된단 말이지?]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한여름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다던데. 카메라 달린 드론 엄청 날아다니잖아.]

일반인들이야 잘 인지하지 못하는듯하지만.

윙윙거리는 소리가 꽤 시끄럽게 들렸다.

게다가, 온갖 소음들 사이에는 나에 관해 속닥거리는 얘기들도 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내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그냥 전부 무시하고 담담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 여기 천마신교의 이공자가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오?

- 사실이오. 저기 있군.

- 외형은 제법 봐줄 만하오만. 저자가 진정 마교의 이공자가 맞소?

- 확실하오.

- 기세는 느껴지지 않는데. 천마의 제자라 하기엔 약해 보이는군.

- 반대일 수도 있소.

- 반대라?

- 너무 강해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는 말이지.

- 어림없는 소리! 정보에 따르면 스물이라 하였소.

- 하긴, 스물에 초절정은 아니겠지. 특수한 무공일 수도 있소. 마교의 기괴한 무공은 유명하니 말이오.

- 하긴 그 말도 맞소이다.

내 외형부터 경지까지 아주 제멋대로 평가하고 있었다. 한여름도 주변의 소리를 걸러 들으면서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 사람들이 우리 무공이가 힘쓰는 것 좀 봐야 할 텐데.]

[최소한만 드러내야지.]

[자신의 힘 중 3할은 숨겨라. 맞지?]

[오냐. 난 3할만 드러낼 생각임.]

[그거로도 충분해?]

[대진표 보면 충분할 거 같던데.]

절정과 초절정.

고작 한 단계 차이지만, 실제 다루는 힘은 아예 달랐다.

경지가 상승할수록 한 단계 차이가 극심해지는 법이다.

무엇보다 초절정에 오른 순간, 무리해서라도 강기를 쓸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었다.

[슬슬 시작하나 봐.]

분주히 장비를 체크하던 학사 직원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단상 위에 선 청하 교수가 마이크를 잡고 안내를 시작했다. 저렇게 깔끔한 복장의 청하 교수를 보니 또 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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