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31)

매번 청하 교수만 일하는 느낌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막중한 자리에서 사회를 보기에 적당한 인원도 딱히 없었다. 다른 교수들은 나이가 좀 있었으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니겠는가.

“오늘 중원무공아카데미 무신제를 찾아주신 내빈 여러분과 방문객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잠시 후, 10시부터 무신제 개막식을 시작하도록....”

청하 교수의 안내가 이어지고, 다들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소음이 잦아들고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럼, 지금부터 무신제 개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경쾌하게 소리친 청하 교수의 말에 맞춰, 사방에서 우렁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막식 안내 이후는 귀빈 소개였다.

“지금부터 내외 귀빈들을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참석자분들께서는 큰 박수로 맞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평범한 멘트.

“...어?”

하지만, 저걸 듣자마자 얼빠진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저 멀리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는 천하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가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쿵-

일순, 행사가 진행되는 대연무장 전부를 짓누르는 파괴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청하 교수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술을 뗐다.

“먼저, 천마신교의 천마. 천위강 교주님께서 참석해주셨습니다.”

저벅- 저벅- 무거운 발소리가 울려 퍼지며,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부가 나타났다.

다음화 보기

사위가 고요해졌다. 정적 사이를 가르며 나타난 남성은 무심한 표정으로 독고패 총장의 옆으로 가 앉았다. 오직 단둘을 위한 자리. 아까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듣긴 했다. 과연 독고패 총장과 나란히 앉을만한 사람이 누군지.

무림맹주부터 시작해서 온갖 후보들이 나왔지만.

그중에 ‘천마 천위강’이란 이름은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숨을 죽이고 사부를 응시했다.

자리에 앉기 직전.

사부의 시선이 잠시 내 쪽으로 향했다.

가만히 있기도 저어해서, 나는 조심스레 사부를 향해 포권했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사부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들켰다.’

사부에게까지 숨길 수 있다 생각하진 않았지만.

내가 초절정에 도달한 걸 바로 간파당했다.

[깨달음이 있었나 보군. 축하한다.]

나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전음과 함께, 사부의 시선이 내 쪽에서 벗어났다.

“귀한 시간 내주신 천위강 교주님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얼어붙어 있으니 답답함을 느꼈는지, 청하 교수가 다시 한번 안내했다.

짝-짝-짝-

대놓고 나부터 먼저 물개 박수를 쳤다. 이윽고 내 옆에 있던 한여름이 따라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도 박수 소리가 점점 커졌다.

[교주님이 직접 오실 줄이야.]

한여름이 멍한 얼굴로 단상을 쳐다봤다.

백도의 절대자와 마도의 절대자.

청하 교수의 말대로라면, 애초에 친분이 있는듯했다. 공허룡을 상대로 함께 맞서 싸웠다 했으니.

[그러게 말이다. 이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뒤이어 개막식 행사가 진행됐지만, 다들 반쯤은 넋이 나가 있었다.

정파 영역의 한 가운데에, 아무런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마도의 절대자가 나타날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너 알고 있었어?]

천하연에게 슬쩍 전음을 날렸다. 그녀가 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혈교와 무신제 얘기는 했지만, 직접 오실 줄은 몰랐구나.]

[...하여간, 사부도 보통 사람은 아냐.]

[동감이구나.]

나를 힐긋 쳐다본 사부의 표정을 슬쩍 보니, 안력을 집중해야 보일 만큼 눈가에 ‘아주 미세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마치 내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일종의 서프라이즈 같은 느낌을 의도한 건 아니겠지?

물론 사부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상으로 무신제 개막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1시간에 걸친 행사 이후, 마침내 개막식의 종료를 알리는 청하 교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버버벙- 동시에 화려한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축제는 축제인지, 사부로 인해 잠시 경직되었던 분위기는 금방 사라지고 열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예쁘다.”

한여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형형색색의 연기와 함께 터지는 불꽃들은 해가 밝게 떠 있는데도, 나름의 운치를 자아냈다.

“슬슬 가자.”

무신제 비무 참가자들은 당장 오늘부터 이동하기로 되어있었다.

***

무신제의 꽃.

비무대회.

대도시 인근에서 검기를 날려가며 싸우긴 힘든 탓에, 무신제 비무대회는 대도시와 거리가 먼 강원도 철원 평야에서 시행됐다.

나는 적룡대의 호위를 받으며 한여름, 천하연과 한 차를 타고 철원까지 이동했다. 우리는 무신제를 관람 온 수많은 차량을 뚫고 나아갔다.

“지치네.”

엄청나게 막히는 차량 때문에 한여름이 질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헬기 탈 걸 그랬나?”

천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지야. 슬슬 도착한 모양인데.”

나는 창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가을을 맞아 황금빛으로 물든 철원 평야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랗게 익은 벼들 사이로 해바라기와 붉은 맨드라미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탁 트인 벌판의 중앙.

아카데미 소유의 부지에는 무인 수백 명은 경공을 쓰면서 뛰어다닐 수 있는 거대한 연무장과.

5성급 호텔을 연상케 하는 숙박 시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게다가 30층이 가볍게 넘는 건물의 가장 위층은 비무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벽면 자체가 통유리로 만들어졌다.

물론 아래도 따로 관객석이 있긴 했지만.

안전을 위해서인지 비무대와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오죽하면 일반인을 위한 망원경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까.

우리는 미리 배정된 호텔 방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아카데미 생도들은 미리 신청하기만 하면 당연히 뭐든 허가됐다.

전 세계에서 모여들어 그런지, 벌써부터 동양인뿐만 아니라 이국적인 외모의 사람들도 꽤 보였다.

천하연도 이국적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으아아-”

한여름이 내 방으로 와서 침대에 풀썩 대자로 누웠다. 방은 1인 1실이었지만, 대충 자기 방에 짐을 던져놓고 한여름은 내 쪽으로 와서 뒹굴뒹굴했다.

“야, 씻고 누워.”

“내가 더러워?”

눈을 가늘게 뜨고 한여름이 나를 쏘아봤다.

“아니, 그건 아니지.”

“옷이 문제야?”

“...내가 잘못했다.”

“알았어. 완벽히 이해함.”

고개를 끄덕인 한여름이 곧장 속옷을 제외하고 다 벗은 뒤, 이불까지 덮고 야무지게 누워버렸다.

당연히 1인 1실 특성상, 침대는 킹사이즈 침대 하나뿐이었다. 물론 말이 1인 1실이지, 시설이나 면적은 스위트룸 수준이었지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옷가지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한여름이 양손으로 이불을 붙잡고, 눈만 살짝 내민 채 작게 속삭였다.

“...할래?”

막상 저 모습을 보니까, 머리와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다.

“그럴....”

똑똑.

순간,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태연하게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투명한 녹안이 나를 응시했다. 찰나였지만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여름이 안에 있는 걸 바로 인지한듯했다.

“한여름 놀러 왔거든. 들어올래?”

머뭇머뭇하던 천하연이 결국 안으로 발을 디뎠다.

“미안하다.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 거 같은데.”

“아냐. 좋은 시간은 무슨.”

한여름이 슬쩍 몸을 일으켰다.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할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천하연에게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그게 말이다.”

“뭔데?”

“곧 아버지께서 이쪽에 도착하신다고....”

나는 바로 한여름에게 눈빛을 보냈다. 벗어놨던 옷을 순식간에 갖춰 입은 한여름이 침대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우리 사부가? 나한텐 말도 없던데.”

“그대와 식사하길 원하시더구나.”

“다 같이?”

“아니. 그대와 단둘이서만. 아무래도 미리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겠네. 고맙다.”

“아니다.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방해는 무슨. 사부 언제 온대?”

“한 시간쯤 뒤라 들었다.”

“...나 좀 씻을게.”

한 시간이면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곧바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떡진 모습으로 사부를 만났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심지어 단둘이 밥 먹는데 말이다. 사부 생각은 역시 알기가 어려웠다.

***

깨작깨작.

나는 포크를 들고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었다.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호텔 최상층에 있는 프렌치 식당. 환하게 불이 밝혀진 비무대가 한눈에 보이는 룸에서, 나와 사부는 마주 앉아 식사했다.

직원은 요리가 나올 때마다 나타나서 접시를 내려놓고, 가져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새삼스레 느끼지만, 프렌치는 나랑 안 맞는다. 차라리 든든한 국밥 한 그릇이 낫지.

“사부님? 저는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숨 막히는 분위기를 감당키 힘들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부가 제자 보는 데 조건이 필요하더냐?”

“그건 아닙니다만. 굳이 단둘이서 볼 필요가 있나 해서 말입니다. 다 같이 먹으면....”

“할 말이 있다.”

“경청하겠습니다.”

“혈교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다 들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추측일 뿐이지요.”

“본래는 내가 머물 생각이었다.”

사부가 지키고 있다면, 솔직히 혈교가 무슨 짓을 하든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본래라 하심은.”

“상황이 변했다.”

“상황 말입니까?”

“그래. 아직 공표되진 않았다만, 사할린 상황이 심상치 않다.”

“사할린이라면, 일본 북부 아닙니까?”

“최소 S급 마수가 출현했다는 정보가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 무림맹과 신교 양측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최소가 S급이면 그 위일 수도 있다는 얘깁니까?”

“그래. 이건 극비다만.”

우웅- 사부가 기막을 쳤다.

“독고패 총장은 공허룡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직도 완치가 안 된 겁니까?”

“공허룡이 소멸하면서 남긴 일종의 저주다. 그는 시시각각 약해지고 있어. 과도한 힘을 쓸수록, 독고패 총장에게 남은 시간은 줄어들 거다.”

이건 게임의 ‘여백’ 부분. 그것도 꽤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독고패 총장은 단순히 금분세수 했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현경의 무인조차 이겨내기 힘들 만한 저주라니....”

“공허룡 같은 게 여럿 있었다면 인류는 당장이라도 멸망을 대비해야 했을 거다.”

“사할린 쪽에도 그런 게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렇진 않다. 공허룡은 여러 의미에서 특별했다.”

지금까지 말을 종합해보면, 사부는 사할린 쪽으로 갈 생각인듯했다.

“그럼 굳이 사부님께서 가시지 않아도....”

“네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나도 고민했겠지.”

“...고작 초절정에 불과합니다만.”

“가능성을 보았다.”

“제 가능성 말입니까?”

“그렇다. 혹자는 천명天命이라 부르는 것이 네게 함께하고 있다.”

“그것도 상단전의 예지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