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31)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렵군요.”

“너도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점차 알게 될 일이다.”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나는 믿는다.”

담담한 어조로 사부가 내뱉었다.

“사할린, 언제 가십니까?”

“오늘. 식사만 마치고 떠날 생각이다.”

“제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라.”

“여전히 신교는 세상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데, 사부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받은 악플만 대체 몇 갠지.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조금은 울컥했다.

공허룡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저렇게 남들 모르게 많은 일을 했어도, 신교는 굳이 내세우지 않았다.

특히 사부가 나선 장소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이라곤 지켜볼 수도 없는 최악의 대지였으니까.

입소문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부는 또 나서겠다 했다.

“그것이”

여느 때처럼 무심한 말투로, 사부는 입을 열었다.

“우리의 긍지다.”

다음화 보기

명문名門.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무림인들이 명문의 위대함을 칭송한다.

그렇다면 명문의 저력이 왜 대단한가.

간단하다.

그들이 쌓아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천마신교는 의나 협을 추구하진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행동이 정파에서 말하는 의협이라 할지라도, 굳이 내세우지 않는다.

그렇게 천마신교는 역사를 쌓아왔으며.

그들의 올곧은 신념은 곧.

이룩한 것에 대한 자긍심으로 발현됐다.

긍지.

담담한 말투로 내뱉은 사부의 말.

무언가 통달한 기분이 들었다.

오만에 가까울 정도로 똘똘 뭉친 자긍심.

그것이야말로 천마신교였다.

수없이 많은 위기에도 천마신교가 지금껏 성세를 구가한 까닭이 저것이었다.

사마외도라 묶어 부르지만, 마도에 비해 사도가 유독 힘이 약한 이유.

마도에는 있고 사도에는 없는 것.

그들 대부분에게는 긍지가 없었다.

하물며 백도처럼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기치마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와 협, 순리와 자비 같은 백도가 추구하는 것들을 허울뿐이라며 비웃기만 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큰 재력이 있어도, 아무리 강한 무공을 얻는다 해도 그들은 명문이 될 수 없었다.

극소수의 ‘일부’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해했습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의 입꼬리가 나직한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 내가 가는 건 당연할 따름이다.”

“그래도 몸조심하십시오.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사부의 눈썹이 순간 강하게 꿈틀했다.

“아직 그런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다.”

“물론 사부님의 옥안玉顔은 제가 형님 소리 해도 될 정돕니다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나이 먹을수록 조심해야 하는 법입니다.”

“시끄럽다.”

“제자,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네 몸이나 걱정해라. 혈교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지 않느냐.”

“그래 봐야 후기지수 선 아닙니까.”

“방심은 금물이다.”

“말만 이렇게 하지, 절대 방심 안 하고 있습니다. 적룡대부터 시작해서 마영수라대까지 이미 근처에 대기 중입니다.”

슥- 살포시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와서 우리 접시를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디저트와 차를 내왔다. 프렌치가 다 별로긴 한데, 그래도 디저트는 좋다.

역시 유럽 놈들이 디저트는 잘 만든단 말이지.

온갖 악명이 자자한 영국 음식도 디저트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거든.

“독고패 총장님은 안 가십니까?”

작은 포크로 디저트를 푹 찍으며 여쭸다.

“전신이 여기 남는 대신 내가 가는 것이다.”

“그럼 걱정 없겠군요.”

“...흑풍단 일부를 남겨두마.”

“정파 영역인데 괜찮습니까?”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비상시를 대비한 것뿐이니.”

“감사드립니다, 사부님.”

“그리고, 사저 잘 보필하도록.”

천하연 얘기가 나오자 살짝 찔렸지만, 이건 불가항력이다. 나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답했다.

“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사부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슬쩍 덧붙였다.

“우승, 기대하마.”

“...네.”

어차피 사부가 말 안 해도 할 생각이긴 했지만.

조금은 묘한 심정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기대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

폭풍과도 같았던 식사 이후.

천하연과 한여름을 한 번씩 짧게 만난 사부는 곧장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가셨네.”

한여름이 사부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멍하게 읊조렸다. 오는 것도 그랬지만, 가는 것도 바람 같았다.

“슬슬 들어가자. 내일 만전 상태로 싸워야지.”

“움.”

무언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냥, 같이 놀고 싶긴 한데. 안 되겠지.”

“오냐. 나는 몰라도 넌 안 돼.”

“칫.”

[혈교 놈들이 언제 수작 부릴지 모르니까, 무신제 기간에는 주의하자.]

슬쩍 보낸 채팅에 한여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잠은 같이 잘래.]

[그건 좋지.]

어차피 방 안의 킹사이즈 침대에는 둘이 아니라 셋이 누워도 충분했다. 호텔 안은 무신제를 준비하는 인원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그사이를 조심히 지나, 방 안까지 도달했다.

“근데 말이다.”

방 안에 들어온 나는 옆을 보며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왜 그러지?”

천하연이 자연스럽게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도 같이 자게?”

한여름과 천하연이 잠시 눈을 마주쳤다. 한숨을 푹 내쉰 한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둘이 무슨 합의를 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미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듯했다.

“맘대로 해라.”

결국, 내가 먼저 항복했다. 천하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어차피 난 잠을 많이 자는 편도 아니었다.

“나는 먼저 씻으마.”

“그래.”

어느새 짐까지 챙겨온 천하연이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거 먹을래?”

한여름이 테이블에 있던 웰컴 디저트를 꺼내 우물거렸다.

“쌀과자라니. 꽤나 전통적이네.”

나도 하나 까서 입에 물었다.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근처에 농사짓는 곳 많던뎀. 철원산 쌀로 만들었대.”

“먹고는 살아야 하니 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 중요하지.”

“그건 그래. 식품 수입도 잘 안 될 때 많다드라.”

테이블 앞에 앉아 열심히 과자를 볼에 집어넣는 한여름을 보며, 슬쩍 채팅을 보냈다.

[넌 괜찮냐?]

[웅? 뭐가?]

[천하연 여기서 잘 생각이던데.]

[내가 그러라고 한 거야. 그냥, 천하연도 안쓰럽잖아.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 매번 죄인처럼 기죽어 있는 것도 보기 좀 그래.]

[천산신녀공이 불교 무공이었나? 왜 이리 자비가 넘치냐.]

[그래서 싫어?]

나는 한여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 이래서 내가 한여름 씨를 좋아하지.”

한여름이 배시시 웃으며 머리로 내 배를 톡 한 번 쳤다. 하여간, 착해빠져선.

***

새근새근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한 귀가 아니라 양쪽에서.

아늑하고 포실포실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마치 누군가의 애착 인형이 된 느낌이다.

아니, 애착 인형 신세가 맞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좌우에서 내 몸을 감싸 안은 두 명의 미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남성이라면 꿈에도 바라마지않을 상황이었지만, 묘하게 심란한 기분이다. 평생을 현대인으로서 살아온 내 도덕이 속삭였다.

‘이래도 되나?’

물론 이곳은 평범한 현대는 아니니까.

이래도 되긴 할 거다.

강력한 자기합리화를 하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보들보들한 살결의 느낌이 무지막지하게 자극적이다. 이미 할 거 다 한 사이임에도, 아랫도리가 미쳐 날뛰려 하고 있었다.

애초에 할 거 다 한 사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나는 저 둘의 몸 구석구석까지 무슨 느낌인지 생생하게 아니까. 상상되니까 더 문제였다.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발상이군.’

잠시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가 일어난 걸 인지한 천하연이 먼저 눈을 뜨고, 이어서 한여름까지 깨버렸다.

“일찍 일어났네.”

한여름이 눈을 비비며 창밖을 쳐다봤다. 아직 밖은 어둑어둑했다.

“운기조식 좀 하려고. 더 자.”

“으응, 한 시간만 더 잘게.”

이불을 끌어 올린 한여름과 반대로, 천하연은 자세를 바로 했다.

“같이 할래?”

천하연이 머리를 주억거리고 내 옆으로 왔다.

뭘 하냐면, 당연히 ‘운기조식’을 말하는 거다.

초절정에 오르며 이제는 육체적 단련보다는 심법 수련이 더 필요했다. 오묘한 동양의 신비는 앉아서 운기조식만 해도,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승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확실히 초절정에 오르면서 무언가 달라지긴 했다.

만일 화경에 도달하여 환골탈태를 이루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슬슬 짐작됐다. 불균형했던 모든 능력치가 화경에 걸맞게 바뀌겠지.

나는 화마정까지 있으니 정확한 건 미지수였지만.

“후우....”

전신 세맥까지 진기를 순환시킨 후, 다시 갈무리하며 크게 호흡을 내뱉었다. 막 일어나 찌뿌둥했던 몸이 대번에 가벼워졌다. 천하연은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진기가 유동하며 밝은 금발이 휘날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비로웠다.

천하연에게 시선을 떼고, 나는 여전히 드러누워 있는 한여름에게 가서 찬찬히 이마를 쓸어내렸다.

“우웅....”

무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침잠이 많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