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31)

“지금 방으로 올라오고 계신답니다.”

당소소가 한숨을 푹 쉬며, 부스스했던 모습을 바로잡았다. 입가에 억지로 미소도 살짝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녹포 사내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무림맹에서 만화단을 맡은 당사음이었다.

“오랜만이어요. 숙부님.”

“그래. 잘 지냈느냐?”

“저야 잘 지냈지요.”

당사음이 자연스럽게 당소소의 맞은 편에 앉았다. 시비가 능숙하게 차를 내왔다. 당소소가 깨먹은 찻잔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당사음이 눈짓하자, 시비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다음 상대가 그놈이라 들었다.”

찬찬히 향을 음미하던 당사음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당소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네게 줄 것이 있다.”

들고 온 철제 가방을 당사음이 활짝 열었다. 유리병 안에 투명한 빛깔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이것은...?”

“신선폐神仙廢다.”

“비무에 독을 쓸 수는....”

내용물을 보며 당소소가 움찔했다.

“규정상 해독약이 없거나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즉효성 독이 아니라면 써도 된다. 이건 산공독散功毒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 않느냐.”

내공을 흩어버리는 산공독은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을 주진 않지만, 무인에게는 그보다 더 치명적일 수가 없었다.

하물며 신선폐는 원래도 초절정 이상 무인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당문구대극독唐門九大劇毒에 속했다. 원래라면 고작 비무 따위를 하는데 반출될 리가 절대 없는 물건이었다.

여전히 당소소는 망설였다. 아무리 밉다 하나, 그래도 같은 아카데미 생도를 상대로 이걸 써도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가문의 명예가 달린 일이다. 위대한 당문의 후계자가 고작 마교의 잡종에게 패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단순한 잡종은 아니지요.”

“그래서 내가 이걸 가져온 것이니라. 가문의 어른들은 이미 동의하셨다. 그리고 이게 전부가 아니다.”

당사음이 다른 가방을 꺼내 열었다. 그곳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동그란 쇳덩이가 있었다.

“안됩니다.”

당소소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것’은 비무에서 쓰면 안 되는 물건이다.

“크기 보면 알지 않느냐. 고작 대인용이다.”

“아무리 마교의 이공자라 하나, 죽을 수도 있어요.”

“정당한 비무에서 실수가 발생하는 건 흔한 일이지.”

“금용병기禁用兵器를 쓰는데 그걸 누가 실수라 인정하겠어요?”

“죽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무림맹에서 충분히 무마할 수 있어. 이건 일인용으로 위력을 조절한 거다. 절정고수 이상의 무인이라면 죽지는 않을 거다.”

당소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구는 되겠지요. 가주님께서도 동의하셨나요? 까딱했다간 신교와 전면전이에요.”

“형님께는 비밀이다. 알지 않느냐. 형님 성격에 절대 허락할 리 없다는 거.”

“만천화우비환滿天火雨飛丸이 가주님 허락도 없이 반출됐다는 말인가요?”

당가의 비기인 만천화우를 인위적으로 구현하는 만천화우비환은 그 크기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어떤 크기든 금용병기로 지정하여 엄중히 관리했다.

가주의 허가도 없이 반출되는 일은, 본디 있을 수 없었다.

“...어른의 사정이 있다고만 일러두마. 어차피 대인용 만천화우비환은 드러난 무기가 아니다. 대다수는 금용병기인 줄도 모를 터.”

“이 건은 가주님께 보고해야 할 것 같네요.”

당문은 정파였다. 당소소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허나, 얼마 전의 사건도 그렇고 오늘 일도 그렇고. 당소소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너도 알지 않느냐. 가주님께선 지금 대공을 이루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가신 것을.”

“...나중에라도 보고해야지요.”

“그건 내가 직접 보고드릴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당사음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찝찝하긴 했지만, 숙부의 태도에 당소소는 결국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말하는데도 의심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

빠르게 진행됐던 128강에 이어 64강도 곧바로 시작했다.

“내 순위 엄청 높네.”

한여름이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 폰을 들여다봤다. 한여름은 당당하게 랭킹 5위에 올라 있었다.

벌써 순위를 예측하고 돈을 걸고 하는 사이트들이 횡행하는 모양이었다.

“일 초식 컷은 좀 심했지.”

“원래 뭐든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얌.”

“넌 다음 상대 누구였지?”

“누구더라. 이름 특이했는데. 자크?”

“쟈끄?”

“어, 맞다. 그런 발음이었어.”

“프랑스 ARC 출신인가 본데. 넌 다음 상대가 누군지 관심도 없냐?”

인터넷을 찾아보니 느끼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한 국가의 대표답게, 한국식으로 따져도 절정 초입은 되는 모양이다.

“오, 이 사람이야? 꽤 생겼네.”

한여름이 내 폰을 슬쩍 들여다보며 말했다.

“말을 말자.”

“어차피 내가 이길 건데 뭐.”

“뭔 자신감이야.”

“나 128강 영상은 다 봤거든. 너 말고는 딱히 무서운 사람 없든데.”

“...그건 맞는데. 힘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어.”

“아닌 거 같은뎀.”

아이스크림을 한입 크게 베어물며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타깝게도 나도 저 점은 동의하는 바였다. 아마 숨겨진 힘이 있어도 한여름을 꺾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차라리 적룡대가 한여름을 이길 가능성이 더 높지.

“대장! 다녀오겠습니다!”

우리 곁을 후다닥 지나가며 적하가 인사했다.

[잘 하고 와라. 믿는다.]

반쯤 사부에 빙의해서 근엄한 말투로 적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적하가 하늘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요란하게 비무대 위까지 올라갔다.

“동갑인데 쟨 왜 저리 귀엽지.”

“너도 귀여운데?”

“...응?”

“오, 시작한다.”

“방금 뭐라 했어?”

“자자, 여기 팝콘.”

나는 손에 든 팝콘을 한여름에게 건넸다. 새침하게 나를 흘겨본 한여름이 팝콘을 입에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적룡대에서 가장 강한 건 적하가 아니었지만, 가장 이슈 몰이를 하는 건 적하였다.

아무래도 명문 구파의 후예가 신교에 투신했다는 점이 뭇 세간들의 호기심과 충격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게다가 적하의 청운적하검은 화려함만큼은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에 결코 뒤지지 않기에, 일반인들 역시 즐겁게 구경했다.

이번에는 적하검만 뽑고 상대를 몰아붙인 적하가 순식간에 항복을 받아냈다.

[잘했다.]

가볍게 칭찬을 하자 적하가 씨익 볼을 끌어올리며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사부가 나를 볼 때 저런 느낌일까. 명문의 후예치고는 진중함이 상당히 떨어졌다.

“슬슬 네 차례네.”

한여름이 저 멀리서 몸을 풀고 있는 당소소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느긋하게 달달한 카라멜 팝콘을 입에 집어넣고, 콜라까지 한 모금 마셨다.

물끄러미 당소소를 관찰하니,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뭔 일 있나?’

이전과 다르게 오히려 내 쪽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당소소가 독 쓸까?]

한여름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 쓸걸? 모든 독이 금지는 아니거든. 어쩌면 실수를 가장하고 나를 죽이려 들 수도 있지.]

[명색이 정판데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아직도 당문이 단순한 정파 같냐. 독만 쓰면 양반이고, 창고에서 금용병기라도 잔뜩 꺼내오는 게 아닐까 싶은데.]

[당문 금용병기는 스케일이 너무 크지 않아?]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장 이득이 본 집단이 누구냐. 그중에서 당문은 무조건 들어간다. 신교의 기괴한 기술력만큼이나, 당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당문의 심처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고. 핵무기가 들어있어도 사실 그냥 그러려니 할 거다.

[대인용도 있겠지. 나 간다.]

[응. 그래도 조심해.]

[오냐.]

슬슬 내 차례였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안내에 따라 비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섰다. 녹색 무복을 입고, 손에는 연편軟鞭을 든 당소소가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김무공.”

비무대 위에서 우리는 마주 봤다. 먼저 입을 연 건 당소소였다.

“할 말 있냐?”

“...조심해.”

의외였다. 설마 당소소가 저런 걸 경고할 줄이야.

[난 독이든 금용병기든 다 써도 상관없으니. 최선을 다해 봐라.]

당소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는 손에 돌돌 말려있던 연편(채찍)을 휘둘러 땅에 한 번 내리찍었다.

쾅-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돌바닥에 실금이 쫙 갔다. 확실히, 명문의 자제답게 대단한 내공이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비무를 시작했다.

나는 여유롭게 당소소의 행동을 관찰했다.

당소소의 연편과 옷소매로부터 강렬한 독기가 느껴졌다. 일반적인 독과는 조금 달랐다. 호흡과 피부를 통해 순식간에 스며든 독이 내공까지 침투하려 시도했다.

‘산공독.’

작용기전으로 보아 곧바로 무슨 독인지 파악됐다. 당소소가 차분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귓가로 전음이 들려왔다.

[신선폐를 그렇게 무방비로 들이켜면, 화경의 고수라도 내공을 쓰기 힘들어. 항복해. 억지로 내공을 끌어올려 봐야 고통만 더해질 뿐이야.]

“아니.”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소용없다.”

만마萬魔의 종주宗主.

천마신공이 고작 독기 따위에 기운이 흐트러질 리가 없다. 내부에 들어왔던 신선폐는 모조리 천마신공의 먹잇감이 된 지 오래였다. 이윽고, 막대한 독기를 잡아먹은 천마신공의 기운이 들불처럼 일어나 주변을 뒤덮었다.

다음화 보기

‘허세야.’

산공독은 살상 능력이 없는 대신, 막기는 일반 독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독을 막으려면 애초에 하독하는 걸 감지하고 빠르게 범위 밖으로 물러서거나, 짙은 내공의 방벽을 둘러야 했으나.

김무공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호흡을 했다. 마치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신선폐를 들이켤 것처럼.

산공독 중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신선폐를 저리 들이마시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김무공이 강한 건 알고 있으나, 그래 봐야 후기지수다. 절정 극 정도의 실력으로는 신선폐를 감당할 수 없어야 맞다.

쿠궁- 갑자기 김무공의 몸으로부터 묵빛 기운이 번져나갔다. 짙은 운무에 휩싸인 김무공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뭐...?’

당소소는 질긴 가죽으로 뒤덮인 연편을 꽉 쥐었다. 묵빛 기운이 발하는 위압감에, 당소소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순식간에 운무를 다시 갈무리한 김무공이 기다란 숨을 내쉬었다.

‘거짓말.’

당문구대극독은 하나하나가 당문 독공의 정수였다. 그것은 곧 당문의 역사이자, 자존심이었다. 분명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린 것이다. 당소소는 그리 판단하며, 김무공에게 근접한 뒤 연편을 휘둘렀다.

쐐애애액-

허공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었다. 채찍이 살아있는 것처럼 물결치며 김무공에게 쇄도했다. 채찍을 따라 황금빛 진기가 흐리게 이지러졌다. 당문 직계만 익힐 수 있는, 금룡편법金龍鞭法이었다.

김무공의 손이 가벼운 원을 그렸다. 당소소는 손에 쥔 연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기이한 현상을 느꼈다.

“큭...!”

당소소의 입가로 거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온힘을 다했는데도 제어가 불가능했다.

명백히 내공이 실린 반격이었다.

꽝- 제멋대로 투로를 벗어난 연편이 바닥을 거세게 내리쳤다. 산산히 부서진 돌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돌 먼지를 뚫고 인지하지도 못할 새에 다가온 김무공의 손가락이 당소소의 이마로 향했다.

[고작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전음과 동시에 김무공이 손가락을 튕겼다.

빠악- 머리가 뒤로 강하게 젖혀졌다. 당소소는 이마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뇌가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당소소를 김무공은 무심하게 응시했다.

‘또 저 눈.’

마치 자신을 아래로 내려보는 듯한.

지극히 오만한 시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리 천마신교의 이공자라 하나, 당문도 그에 못지않은 명문이었다. 딱밤을 맞은 이마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너.”

으르렁거리는 당소소의 말에도, 김무공의 시선은 순간 다른 쪽으로 향했다. 당사음이 있는 쪽이었다.

[금용병기, 가져오지 않았나?]

이번엔 당소소가 흠칫했다. 숙부의 강요로 ‘가져는’ 왔다. 하지만 눈치가 보여 가져만 왔을 뿐, 그녀는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명문 정파의 후계자가 어찌 비무에서 금용병기를 쓴단 말인가. 그것도 같은 아카데미 생도를 상대로. 역시 안 될 일이라 생각했었다.

“....”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당가주가 고작 비무에서 금용병기 사용을 허락했을까?]

“시끄러워. 가문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아니지. 당문에서는 분명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너는 그걸 파악할 의무가 있고. 당문의 직계 아니었나?]

“네가 뭘 안다고...!”

당소소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보아하니 하나도 모르고 있군. 나는 당문이 저지른 죄악을 보았다. 이건 기회를 주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당문은 결국 멸문지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