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당문을 상대로 그런 오만하고, 건방진 소리를...! 멸문지화? 당문이 우스워?”
김무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당장은 대화가 통할 거로 생각하진 않았다. 당문의 미래를 안다 해도 그걸 누가 순순히 믿어주겠는가.
아까 봤던 무림맹 인사들 근처, 당문 사내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무언가 수작질을 계획했다는 거겠지. 김무공은 그게 무엇이든, 정면에서 박살을 내버릴 생각이었다.
[무언가 지시받은 게 있으면 꺼내는 게 좋을 거다. 아니면 바로 끝내도록 하지.]
계속된 도발에 당소소도 더는 참기 힘들었다. 이쯤이면 자업자득 아니겠는가.
“크게 다쳐도 난 몰라.”
당소소가 품 안에 있던, 주먹만 한 쇠 구슬을 꺼냈다. 김무공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당소소가 거리를 벌리고 구슬에 내공을 잔뜩 불어넣기 시작했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슬이 강하게 진동했다. 구슬의 표면에 기이한 문양이 일렁거렸다.
김무공은 흥미롭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내공을 이용한 기물. 신교에서도 흔히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거의 비무대 끝까지 거리를 벌린 당소소가 입안을 깨물었다.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피하는 걸 추천할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구슬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김무공이 있는 근처까지 다가간 구슬이 환한 빛을 발했다.
꽝- 이윽고 굉음과 함께 구슬이 폭발했다. 김무공은 그 과정을 하나하나 보았다. 구슬이 발했던 밝은 빛도 김무공의 시야를 가리는 건 불가능했다.
‘흥미롭네.’
단순히 화약을 이용한 게 아니었다. 미국이나 유럽 쪽은 게이트 부산물을 이용한 연구가 활발하다더니, 당문도 그런듯했다. 구슬이 폭발하며 작은 알갱이 같은 것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햇볕을 받아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모습이 일견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수백 개는 가볍게 넘어가는 저 알갱이 하나하나가 평범한 사람의 목숨은 충분히 앗아갈 만큼, 치명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단순 수류탄보다는 집속탄에 가까웠다. 구체 하나하나가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현실 상식대로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당문은 본인들만의 기술로 구현해냈다.
‘호신강기. 아니.’
찰나의 순간 판단을 마쳤다. 여기서 호신강기를 썼다간 자신이 초절정이라는 걸 드러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벌써 대놓고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당문의 암기는 확실히 명불허전이었다. 포탄처럼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공격들은 인간의 반응 속도로는 대응할 수 없어야 맞았다.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게 의념의 힘이었으니. 김무공의 전신에서 붉은 기운이 아롱거렸다. 비처럼 쏟아지는 빛의 구체를 향해 김무공은 오른 손바닥을 하늘로 뻗어 올렸다.
혈수마공血手魔功
화룡승천火龍昇天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퍼버버버벙- 어마어마한 경파가 주변 모든 것을 지워버릴 기세로 하늘 높이 뻗어 나갔다. 빛의 구체가 열기에 녹아내리며, 그야말로 온 하늘에 불꽃 비가 내리는듯했다.
그 아래서, 김무공의 양팔이 원을 그렸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던 광염이 실처럼 이어져 김무공의 손바닥 사이로 모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당소소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만천화우를 저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도, 하늘에서 내리는 불비가 한 곳에 모이는 신비로운 모습도.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신지기를 일으켜 억지로 버틸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보통은 그게 맞았다. 그리 한다면 많이 다치겠지만, 죽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 김무공은 상처는 물론이고 그을음 하나 없었다. 양손에 모았던 불꽃을 김무공이 오른손 위에 둥둥 띄워 올려놓았다. 그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구체를 관찰했다.
[이게 끝이냐?]
태양처럼 환한 빛을 발하는 구체를 손에 올려놓고, 김무공이 전음을 보내왔다. 당소소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구대극독에 금용병기까지 쓰고도 졌다. 변명할 수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자신 하나만이 아닌, 당소소는 마치 당문 전체가 김무공에게 무릎을 꿇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억지로 덤벼봐야 의미가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평온한 김무공과 반대로 당소소는 저 막대한 열기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가 졌어.”
결국, 당소소는 항복을 선언했다. 동시에 김무공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 위에 강림했던 태양이 사라졌다. 주변을 달구던 열기도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당문제약. 네가 당문의 어둠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당문의 어둠을 파헤칠 생각이 있다면 그쪽을 주시해라.]
등 뒤로 들려오는 김무공의 전음을 들으며, 당소소는 비무대를 내려갔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김무공이 비무 중에 보내왔던 얘기는 당소소의 뇌리에 화인처럼 박혀 들었다.
‘당문제약.’
가문에 흐르던 이상한 기류도 그렇고, 당문이 진정 김무공의 말대로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면.
당소소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
너털거리며 비무대를 내려가는 당소소를 나는 가만히 응시했다.
비무 전에는 최대한 빨리 끝내버릴 생각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당소소를 마주한 순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무거운 발걸음과 이상할 정도로 위축된 태도. 이전까지 보여줬던 당당한 적의와는 상반된 태도였다. 거기에 경고까지. 반면 무림맹 쪽에 있던 당문 사내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가득했다.
당문은 혈족 중심이었다. 아무리 당소소가 당문의 직계에 사실상 후계자 위치라 하나, 연배 차이가 있는 가문 어른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을 거다. 무언가 수작질을 했을 거라 판단했고, 그건 정답이었다.
마지막의 그것.
내가 ‘평범한’ 절정고수 수준이었다면 죽을 수도 있었다. 당소소도 그렇고, 사내조차 극도로 당황한 걸 보면 당문에서도 흔한 병기는 아니었을 거다. 애초에 저런 걸 쉽게 양산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도 않았다.
전음으로 떠봤을 때, 당소소는 당문의 어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듯했다. 그녀가 당문의 치부를 알아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둠을 극복하고 원래의 미래와 다른 길을 갈지.
아니면 본인들의 어둠에 기존 역사대로 잡아먹힐지.
‘씨앗은 심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발아할지는, 내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본래 역사와는 이미 너무도 뒤틀렸다. 정확한 예측이 불가했다.
만일 옳은 방향으로 뻗질 않는다면... 당문 전체를 쳐낼 수밖에 없겠지.
다음화 보기
몽환적인 모습에 군중들은 홀린 듯이 멍한 표정으로 비무대를 지켜봤다. 시야를 가려버린,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김무공의 손바닥 사이에 모이는 광경은 마치 마법이라도 보는듯했다.
숨죽인 대다수 군중과 반대로, 무림맹 인사 측에서는 만천화우비환이 터질 때부터 소란이 일었다.
“저것, 금용병기 아니오?”
독고패 총장 대신 철원 비무대 관리를 위해 나온 고승빈이 차갑게 물었다. 당사음은 고개를 홱 돌리며 답변을 거부했다. 당소소의 공격이 막힌 이후부터, 당사음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실시간으로 급변했다.
“설마 당문이 비무에 금용병기를 썼겠소? 착각일 거요. 실제로 간단히 막지 않았소.”
대답은 옆에 있던 다른 사내에게서 들려왔다.
“...간단히라니. 저 무공이 무엇인지 모르오?”
“마교의 이공자가 쓴 무공이면 당연히 마공이겠지요.”
“건곤대나이요.”
고승빈이 짧게 내뱉었다.
“마교의 호교신공!”
방어에 특화된 워낙 독특한 성격 탓에, 건곤대나이는 정파 인물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교주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특성상 실제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소이다. 단순한 무공이 아니외다.”
“교주가 벌써 건곤대나이를 전수했단 말이오.”
“전수뿐만 아니라, 사용 자체가 능숙하오. 마치 십 년은 수련한 것 같소이다.”
“이거 무신제 우승을 마교가 하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구려.”
“어허! 아직 모르는 일 아니겠소. 이런 비무에서 당문은 좀... 일반 무공만으로는 처지는 게 사실 아니겠소.”
“그렇긴 하오. 아무래도 비무에서는 구대극독이나 금용병기 사용이 제약되니 말이오.”
옆에서 무림맹 인사들이 아무렇게나 속닥이는 말에, 당사음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목소리를 낮췄다 하나, 이곳에서 저 정도 음성을 못 들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건방진...!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그렇다고 여기서 날뛰었다간, 당문이 구대극독과 금용병기를 비무에 모두 사용한 게 대놓고 까발려지게 된다. 아는 자들이 늘어나면 당연히 무마하기도 더 힘들어진다.
당사음은 이를 악물고 현실을 외면했다. 비무를 마친 당소소는 당사음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멍청한 년.’
그는 당소소의 손속에서 망설임을 보았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승리를 추구해도 모자랄 판에, 마교의 잡종을 상대로 망설임이라니.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당사음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당문의 후계자가 저런 유약한 년이어선 안 된다. 은혜는 두 배로, 원수는 열 배로 갚아주는 게 당문의 정신 아니었는가.
팔짱을 끼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런 당사음의 모습을, 고승빈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괜찮아?”
한여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가볍게 한여름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보면 모르겠냐. 예상 범주 내였음.”
“다행이다. 제대로 못 막았으면 난리 났을 거 같은데.”
한여름의 말대로, 나와 당소소가 싸웠던 비무대는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내가 화룡승천으로 공중에서 처리해버리지 않았다면, 아예 바닥이 갈아엎어졌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작은 병기에 실린 기운의 양이 막대했다.
무슨 방법을 쓴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마지막 그 병기, 만천화우 같더구나.”
천하연이 머리카락 끝을 살살 꼬며 말했다.
“당문 비기?”
“아마도. 천비각에게 저런 게 있다고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구나.”
“비무 때 쓸 물건은 절대 아닌 거 같은데 말이지.”
“천비각의 정보가 확실하다면. 저건 금용병기가 맞아.”
“미친놈들이네.”
만일 내가 저걸 막지 못했다면? 어딘가 좋지 않은 곳이라도 맞아서 이승을 하직했다면.
천마신교가 가만히 있었을까?
도발한 것은 나였지만, 분명 당문 윗선에서는 당소소에게 금용병기 사용을 강요했을 거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그대가 만일 죽기라도 한다면. 신교에서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나?”
“오히려 그게 바라는 바였다면?”
“가문이 망하는데 말이냐?”
당문이 신교와 대적하는 순간, 멸문은 확정이었다. 아무리 당가타가 강력한 요새라 해도, 신교의 주력이 들이치는 순간 그날로 끝이다.
“아니면 내게 그 정도 가치가 없다 생각했을 수도 있지.”
“멍청한 소리야. 몰랐다면 무능한 거고, 알았다면 미친 거겠지.”
한여름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다. 그대가 죽는다면, 그것도 당문에 의해 죽기라도 한다면. 우리 둘의 일생 목표가 바뀔 것이니.”
천하연이 서늘한 눈빛으로 한여름과 시선을 교환했다.
“...설마 복수냐?”
나는 조금 뜨악한 심정으로 물었다.
“당연하지 않겠나. 만일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십 년, 수십 년이 걸리든. 내가 교주 위에 오른 뒤 당문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야.”
투명한 녹안에 실린 의지가 결연했다. 조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막을 치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다행히 우리 근처에 사람은 없었다.
“목숨 좀 소중히 여겨야겠네.”
둘에게 수십 년에 걸친 복수행을 걷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은원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 강호무림의 생리라지만, 그래도 복수할 일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알면 됐구나.”
천하연이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
128강부터 시작해서 64강 32강까지 쏜살같이 진행됐다. 내 32강 상대는 3학년 생도인 곽자산이라는 자였다.
실력만 놓고 보면 당소소보다도 훨씬 떨어졌다.
순수 무공 실력만 봐도 그랬다.
하물며 절정고수도 까딱했다간 격살시켜버릴 수 있는 극독과 금용병기까지 포함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순식간에 낙승.
그리고 16강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지금부터는 사실 한 명 한 명이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실제로 적룡대 중에서도 떨어진 사람이 꽤 나와서 적하, 홍은주, 위지연, 상관설.
이 넷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10명이 참가했는데 16강에 4명이 올라선 건 절대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심지어 한 명은 내전으로 떨어졌으니.
게다가 16강에서도 홍은주와 위지연 대진표가 완성되면서, 내전이 또 발생했다. 좀 아쉽긴 했다.
다만 이 정도만으로도 정파 사람들이 겪는 충격은 어마어마한듯했다.
적룡대 넷에 나까지. 사실 한여름까지 포함한다면 16강의 거의 절반이 신교로 채워져 버린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그건 그거고.
“...저는 왜 이리 운이 없을까요.”
적하는 내 앞에서 땅이 꺼져가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16강도 대비할 겸 적룡대 수련을 도와주고 쉬는 중이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해라.”
“좋은 기회는 무슨!”
그녀가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탁 내려치면서 항변했다.
“어허.”
사부님 빙의해서 짐짓 근엄한 척을 했다.
“죄송합니다.”
적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는 것도 잠시. 또 울분이 치솟는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 왜 하필 그 많은 사람 중에 대장이랑 16강에서 맞붙냐고오. 억울하잖아요. 다른 사람이면 할만했는데.”
“진짜 할만해 보여?”
“...아뇨.”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16강에 만만한 사람은 없다.”
오히려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말이지요. 저는 막,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명승부를 기대했는데. 대장 상대로는 아예 각이 안 보이잖아요.”
“봐 줄 테니 너무 그러지 마라.”
“진짜 봐 줄 거죠?”
눈을 똘망똘망 빛내면서 양손을 깍지낀 적하를 보니.
딱-
나는 꿀밤을 참기 힘들었다. 바로 손가락을 튕겨 이마에 작은 혹을 만들어줬다. 당소소를 때렸을 때도 그랬지만, 타격감이 꽤 쏠쏠하다. 그때와 비교하면 위력은 천양지차였지만.
“아얏.”
적하가 과장되게 이마를 부여잡고 나를 새침하게 쏘아봤다.
“딱 그 정도로 할 테니. 힘들면 항복해라.”
“...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