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31)

이윽고 한여름의 승리를 알리는 비무 감독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생했어.]

나는 담담한 기색의 한여름에게 전음을 보냈다. 한여름이 내 쪽을 슬쩍 본 뒤, 뒤돌아서서 당당히 비무대를 내려왔다.

고고한 척은 다 하고 있지만, 입꼬리가 어디까지 올라간 걸 보면 꽤 기분 좋으신 모양이다.

[귀엽긴.]

“으응?”

바로 당황하며 흐트러졌다. 나를 새침하게 노려보는 한여름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슬슬 비무대회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별일 없이 끝나는 게 가장 나은데. 예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럴 리는 없겠지. 나는 저 멀리서 치열하게 맞붙기 시작한 다른 참가자들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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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그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우리 셋은 둘러앉았다.

“죄송합니다.”

류은채가 탁자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몸을 숙였다.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알려줘. 혹시 새어나가면 문제 되니까.”

신교의 이공자가 시한부 신세다. 퍼져나가서 좋을 게 없었다. 류은채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무거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걱정 없습니다. 제 지부장실에 설치되어 있던 감시 장치로 파악했던 사실이라, 진즉에 확실히 폐기했습니다.”

“어디까지 들었는데?”

“처음에 시한부와 소교주님 관련 얘기할 때까지만... 그 뒤론 아니다 싶어 바로 중단했습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 전부 들은 건 아닌 거 같다만.

“...그래, 류은채 지부장은 그렇다 치고, 적하 넌 어디서 들었는데?”

“저도 류은채 지부장님이 파일 열었을 때 우연히 근처에 있었거든요. 저 말곤 아무도 없었어요.”

“내가 부주의했네.”

물론 당시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기도 했다. 지부장실에는 당연히 감시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거란 것조차 생각 못 할 만큼.

“...죄송합니다.”

류은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냐. 어디 가서 말은 안 했지?”

“절대 안 했습니다.”

“저도요.”

“그럼 됐어. 비밀로만 해줘.”

“소녀의 목숨을 걸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류은채가 말했다.

“아니,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고. 그 정도 비밀은 아냐.”

“허나....”

“나한텐 너희 목숨이 가장 중요하니까. 위험하면 그냥 팔아먹어.”

“....”

류은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저 성격에 팔아먹어도 된다고 말해봐야, 진짜로 팔아먹을 수 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함부로 목숨을 거는 건 좀 그렇다. 몇 없는 믿을만한 수하인데 말이다.

“넌 할 말 있냐?”

적하가 아까부터 자꾸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면서 내 눈치를 봤다.

“근데 그거, 진짜예요?”

“뭐 말이냐?”

“...신녀님이랑 소교주님이랑 관계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적하의 저 소녀심 가득한 눈동자 너머로 대체 무슨 망상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생각하기도 두려웠다.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냐.”

“...우와. 우리 대장 어마어마한 능력자였구나. 역시 사람은 생기고 봐야 해.”

“이상한 오해 말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여름이랑은 소꿉친구 비슷한 관계에서 시작한 거고.”

“소꿉친구 여사친과 로맨스...! 저 그런 거 좋아해요.”

“너 도사 아냐?”

“도사는 결혼 가능한데요? 그리고 저 실은 도사 아니에요.”

되려 이상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적하가 머리를 까딱 기울였다.

“청성이잖아. 하루가 멀다고 점도 치더만. 도사 아냐?”

“이미 세속화된 지 오래니까요. 청성 무맥은 그래도 이어져 왔지만, 도맥은 끊긴 지 오래예요. 점은... 그냥 취미 같은 거지요.”

“그렇군.”

“그런 거지요.”

“그래서, 그건 왜 궁금한데?”

“신교 사람이라면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까요?”

끄덕. 무심코 옆에 있던 류은채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다가 본인도 놀라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무슨 콩트도 아니고. 나는 침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도 모르는 사실이야. 알면 나 죽을걸.”

“대장 사부님이면, 교주님 맞죠?”

“그래.”

“목숨을 건 사랑. 좋네요.”

“좋긴 뭐가 좋아.”

“낭만 있잖아요. 낭만 합격!”

“이게 확.”

“앗. 소녀는 아직 준비가 덜 됐어요. 몸단장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과장되게 움츠리며, 적하가 양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뭔 준비? 몸단장은 또 뭔 소리야.”

“원하신다면, 제 순결을 바칠....”

“적하!”

류은채가 황급히 적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면접 때부터 느꼈지만, 쟤도 정상은 아니다.

“농담하지 마.”

“푸하, 농담 아닌데요.”

가까스로 류은채의 손바닥을 벗어난 적하가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뭐?”

“농담 아녜요. 저 처녀거든요. 아시잖아요.”

가만히 듣던 류은채가 입을 떡 벌렸다. 나도 정확히 똑같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전 대장에게 모든 걸 걸었거든요. 제가 구파 출신이잖아요? 신교라고 편견이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요. 제 가치를 온전히 평가해줄 사람은 아무리 봐도 대장뿐이에요.”

“천하연도 있다만.”

“아니죠. 소교주님에게 전 수많은 신교 기재 중 하나에 불과해요. 하지만, 대장에게 전 몇 없는 수하죠. 믿을만한. 맞지요?”

“그건 그렇다만.”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얘기지요. 물론 앞으로 대장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모이겠지만, 이 선점 효과라는 걸 무시할 수 없거든요.”

적하가 조금은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하여간. 맹해 보이면서도 이럴 때는 또 영악하다. 설마 전음을 보냈을 때, 이런 것까지 계산한 걸까? 저 순진무구한 얼굴에 속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진심이다?”

“예. 실은 그리고....”

살짝 뜸을 들인 적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 방중술도 익히고 있거든요.”

“어...?”

내 표정을 보고 적하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실제로 해봤다는 건 아니고요. 방중술이라는 게 말이지요. 남녀 간의 음양합일을 통해 조화를 이루고 건강을 유지하는 비술인데....”

적하가 횡설수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아니, 방중술은 나도 알아. 그런 건 또 어디서 익힌 거야.”

“때는 질풍노도의 시기, 우연히 비급에 섞여 있던 걸 봤거든요. 사부님이 폐기하는 걸 깜빡하셨나 봐요. 워낙 쓸데없는 비급 사이에 섞여 있던 거라. 제가 기억력은 좋거든요. 호기심에 다 외워뒀어요. 언젠간 써먹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저 처녀는 맞아요. 기는 모르겠고 심체는 확실해요...!”

굳이 저렇게 강조 안 해도, 유니콘 신공의 절대적인 판정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니, 아니까 굳이 강조 안 해도 돼. 심기체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은 건데?”

“인터넷이요.”

대화하면 할수록 뇌가 손상되는 기분이다. 현대 무림의 명암이란 게 이런 건지. 신구의 조화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가 아닐까.

“부끄러움이 없냐.”

“원래 이런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배웠어요.”

“어디서?”

“방중술 비급에서요.”

“...그 비급 당장 불태워라.”

“당연히 증거는 철저히 인멸했죠. 틀린 얘기는 아니잖아요?”

적하가 당당하게 허리를 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 대화가 이 지경까지 온 걸까. 류은채는 말리는 것도 포기한 듯,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틀린 얘기는 아니긴 한데. 효과 있는 건 맞아?”

“아마도요? 핵심 구결 알려드려요?”

“말해봐.”

나직한 목소리로 적하가 구결을 읊었다. 나는 천천히 머릿속으로 구결을 뜯어봤다.

“...멀쩡하네.”

심지어 꽤 상승에 속했다. 술術이라지만, 원리는 무공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방중술 관련은 실제로 응용해 먹을 여지가 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득을 얻었다.

“청성 역사가 얼만데요. 잡스러운 민간의 방중술이 아니라, 도사들이 오랜 기간 연구해온 진짜랍니다.”

“이런 거 막 알려줘도 되나? 아무리 방중술이라지만.”

“사부님도 어차피 폐기할 생각이셨던 거 같아요. 어차피 혼자만 남은 문파기도 하니까요. 굳이 재건하기도 귀찮고. 말년에 제자 몇 받는 수준에서 끝낼 거예요.”

“뭔 벌써 말년 얘기를 하냐. 나이가 몇인데.”

“노후 대비는 원래 젊을 때부터 해야 한다 들었어요. 그러니까 제 편안한 말년을 위해, 대장이 잘 나가야 한다는 얘기지요.”

팔짱을 끼고 적하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음.”

“저 없이도 대장은 알아서 강해지실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수하 된 자로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잖아요?”

“수단이 좀 껄끄럽다는 얘기지. 아무래도 수하랑 그런 관계는 좀 그렇잖아.”

“전 좋아요. 제가 믿는 건 대장의 인간성이거든요.”

“갑자기?”

“순결만 가져가고 헌신짝처럼 버리진 않겠구나. 그런 확신은 있어요.”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냐. 오히려 그러니까 다른 적룡대원이랑 관계도 있고 하니 복잡한 거지.”

“하긴. 몸정이 무섭긴 하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를 평등하게...!”

적하가 양 주먹을 꽉 쥐면서 소리쳤다.

“적룡대 상당수가 장로님들이랑 관계있는 건 알지?”

“당연히 알죠. 그래서 저도 지금껏 철저히 숨겨왔거든요.”

“아는 녀석이 그러냐.”

“농담이었어요.”

“요녀석이.”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적하의 이마에 작은 혹을 만들어줬다.

“아얏. 처음은 이것보단 아프겠죠?”

눈살을 잔뜩 찌푸린 적하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거기서 또 왜 그런 발상을 하냐.”

“궁금하잖아요.”

“혼자만 궁금해해라, 제발.”

“저도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진 않거든요. 대장 앞이니까 하는 얘기지. 대장, 그거 알아요?”

“또 뭐.”

“남녀 간에 서로 야한 얘기를 자주 하면 저지를 가능성이 커진대요.”

“또 그놈의 방중술 비급이야?”

“아뇨. 인터넷이요.”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일단 알았어.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니까.”

“맞네요. 신녀님이랑 소교주님 허락은 받아야지요.”

“알면 됐어. 둘 다 나가봐. 무신제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에 나는 축객령을 내렸다. 기 빨린다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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