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목소리로 적하가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류은채가 또 한 번 사과를 한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방 밖으로 나가는 적하의 뒷덜미를 잡았다.
“응?”
“저랑 얘기 좀 하시지요.”
“네...?”
“우린 할 얘기가 아주 많은 것 같네요.”
차가운 목소리로 류은채가 뇌까렸다.
뒷덜미를 잡힌 고양이 신세가 된 적하가 고개를 살짝 돌려 다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까딱여줬다.
쿵- 이윽고, 류은채가 적하의 뒷덜미를 붙들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운기조식이나 하자.’
마음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뭐든 무신제 끝나고 해야지.
지금은, 솔직히 혈교 하나만으로도 골치 아팠다.
다음화 보기
극동 사할린.
침식경계지대.
마수 방어의 최전선인 이곳은 불쾌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단순한 바닷냄새는 아니었다.
붉게 물든 바닷가에선 마수들의 시체가 끊임없이 떠밀려왔다. 썩은 내와 독소에 평범한 사람은 바다 근처로 접근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
콰과과과광-
하늘에서는 연신 전투기와 폭격기가 폭탄과 미사일을 투하하고, 자주포와 탱크의 포구가 끊임없이 불을 뿜어댔다.
마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몇 중으로 쳐진 방어선 뒤에는, 십만이 넘게 상주하는 거대한 군부대가 존재했다.
“캄차카반도로부터 쿠릴열도를 거쳐 홋카이도로 진입하는 경로의 방어선은 안정됐습니다. 이제 사할린뿐입니다.”
UN 인류군 태평양사령부 사할린 합동기지.
거대한 병력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아론 중장이 옆의 흑의인에게 정중하게 보고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부터 극동의 관리를 아예 포기해버린 이래, 이곳은 UN군의 관할이 되었다.
흑의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의 수백 개가 넘는 디스플레이 중 하나를 빤히 응시했다. 디스플레이 안에서 보랏빛 산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베헤모스 상륙 예상 시간은?”
흑의인, 지금껏 사할린 방위를 지원하고 있던 천마 천위강이 입을 열었다.
“지금 속도대로라면 48시간 이내에 북부 해안가 근처로 도달합니다. 저지 노력은 하고 있으나, 역장 때문에 모든 공격이 먹히지 않습니다.”
“최소 S급이니. 일반적인 공격은 의미 없다. 그만 두는 게 나을 거다.”
“예. 핵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섣불리 핵을 쓴 결과를 아프리카에서 보지 않았나?”
“...예. 저것이 레비아탄이랑 동일한 타입이라면 오히려 에너지만 공급해주는 꼴이 되겠지요.”
천위강이 묵묵히 천마검의 검파를 매만졌다. 1km에 달하는 거대한 몸길이. 저런 게 지상에 상륙한다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뻔했다. 바다에서 처리하는 게 답이었다.
“오게 두어라. 24시간 뒤, 본좌가 직접 요격하겠다.”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홱- 천위강이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사령부를 나갔다.
‘무신제라.’
홋카이도 방어선이 안정되기 전까지 워낙 급박한 상황이 이어졌기에, 천위강을 비롯한 신교 지원 병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무신제를 한가롭게 볼 여유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녀석은 잘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지금쯤 아마 8강을 시작했으리라.
늘그막에 받은 제자가 참으로 신경 쓰이게 만든다.
천위강이 속으로 혀를 차며,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
8강.
내 차례는 마지막이었기에, 이제 남은 인원은 몇 되지 않았다.
한여름이 홍은주와 혈투 끝에 승리했고, 오스카와 김용은 예상대로 4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4강의 남은 한자리를 두고 나와 서문예린이 붙기로 되어있었다.
“안녕.”
차례를 기다리던 도중, 슬쩍 내 곁으로 다가온 서문예린이 무심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왔다.
은발적안의 독특한 외모. 긴 머리칼을 올올이 휘날리는 모습이 사뭇 신비로웠다.
“어, 안녕.”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나도 인사했다. 무인도 체험 때 좀 본 거 외에는 거의 마주할 일이 없었기에, 쟤랑은 여전히 데면데면했다. 한여름의 룸메이트라 서로 친하긴 한 거 같은데. 내 룸메이트는 아니었으니까.
“....”
“....”
서먹서먹한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입을 먼저 연 건 나였다.
“무슨 일인데?”
“...봐주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를 올려다보며 서문예린이 또박또박 내뱉었다.
“3초 양보 같은 거?”
“응.”
“널 무시하는 건 아닌데, 만일 힘 조절 안 하면 일 초식에도 끝날 텐데 괜찮아?”
“괜찮아.”
무뚝뚝한 어조로 서문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서 감정의 변화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냉랭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생각보다는 속내를 읽기 쉬운 천하연과 반대였다.
“...마실래?”
서문예린이 들고 온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캔 음료를 꺼내며 말했다. 귀족 가문 아가씨도 저런 걸 먹는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실소가 나왔다.
“고맙다.”
“응.”
퐁- 내가 음료를 받자 본인도 하나 더 꺼내서 뚜껑을 따고 들이켰다. 음료가 넘어가며 가느다란 목선이 꿀렁이는 게 꽤 뇌쇄적이다.
나도 서문예린이 건넨 음료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윽.’
혀가 아릴 정도의 충격적인 단맛이 밀려들어 왔다. 얜 뭔 이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사이다를 응축시켜서 시원하게 만들면 딱 이럴까 싶다.
“중원무공아카데미 김무공 생도님, 중원무공아카데미 서문예린 생도님. 비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표정관리를 하며 어떻게든 음료를 들이켜고 있으니, 방송이 울려 퍼졌다.
“가자. 진짜 안 봐준다?”
탁. 나는 음료를 옆에 내려놓고 말했다.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 시작 전.
서문예린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새하얀 검신에 햇살의 빛무리가 내려앉았다. 칼날에 흘러내리는 광채가 영롱했다.
그것이 은발적안의 신비로운 외모와 섞이니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임에도, 인간답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저래서 별호가 천검天劍이었나.
서문예린이 정중하게 검례를 취했다. 단순히 인사는 아니었다. 저것 자체가 일종의 기수식이라는 걸 들어본 적이 있다.
천하검법天下劍法.
서문세가 직계만 익힐 수 있는 독문무공. 천하를 검에 담으려는 오만한 검법답게, 꽤 상승의 무학으로 보였다. 특이하게 공력 운용이 중단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아쉽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고 싶었지만, 요청은 요청이니까. 서문예린의 몸에 집중하던 걸 멈추고, 나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또.
저번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마주하자 자연스럽게 심상 세계로 침잠했다.
매번 가능한 기예는 아니었지만. 나 혼자만 시간이 한없이 느려지는 경험은 사뭇 기이한 느낌이었다. 반면, 사고의 흐름은 광속처럼 빨라졌다.
아마 경지가 올라가면 평상시에도 원할 때마다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지.
천마수天魔手.
초월적인 등급과 별개로, 아직은 불완전한 무학이었다. 혈수마공의 초식을 그대로 쓸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더 완벽한 무학을 꿈꿨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쌓는다.
‘천마신공 자체가 마공이되 마공이 아니다.’
내가 창안한 천마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마를 제압하는 성화.
우연히든 필연이든 정녕 신교가 숭상하는 성화라면, 무공의 격도 그에 맞추는 게 옳으리라.
화르륵- 심장에 불꽃이 깃들었다. 천마신공의 진기가 전신을 노도와 같이 질주했다. 유형화된 묵빛 기운이 일렁이면서 들어 올린 오른손에 집중됐다.
문득, 천하연의 말이 떠올랐다.
‘시천마가 불법에 정통하였다 하였나.’
정작 신교 무학에서 불가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나의 천마신공이 굳이 시천마랑 같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선발제인先發制人.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기보단 기수식 단계에서, 정면에서 깨부순다. 비무가 아닌 실전을 가정한다면 그게 맞다. 내가 상정한 적들은 굳이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무초승유초無招勝有招. 정형화된 초식은 잊는다. 격식과 형식을 버린다.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뻗어내면 그만이다. 그리한다면 수천, 수만 개의 초식을 지닌 거나 다름없으니. 초식이 파해破解되어 생기는 약점도 사라진다.
무검승유검無劍勝有劍. 과거 독고패 총장이 내게 보여줬던 적이 있다. 그는 검을 쥐지 않고, 수도手刀로 하늘을 갈랐었다. 검법을 수법처럼 쓰는 게 가능하다면,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리한다면 검을 쥐지 않고도 검을 이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당연히 지금 당장 모든 걸 완벽히 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허나, 방향성은 정해졌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심의心意였다.
나의 천마수는 초식 대신 심의를 통해 구분될 것이다. 불현듯 한 가지 단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락奈落.
불교의 지옥인 나락에는 과거에 지은 악업을 벌하는 불길이 있다 들었다.
천마수天魔手 업화業火.
이것이 첫 번째다.
무공에 심의를 담자 오른손에 뭉쳐있던 묵빛 기운이 맹렬한 불꽃으로 화했다. 마치 검처럼 보이기도 했다.
쐐애애액-
불꽃이 형성되는 것에 맞춰, 상단세로부터 이어진 속공의 검식이 눈앞에 다가왔다. 어느새 서문예린이 내게 근접해서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화악-
나는 가볍게 일수를 내질렀다. 반 토막 난 서문예린의 검이 검은 불꽃에 뒤덮여 녹아내렸다.
“그만! 그만하시오!”
순식간에 두툼한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내 앞에 다가온 무명 교수가 다급히 나와 서문예린 사이를 갈라놓았다. 확실히 화경의 고수가 행하는 운룡대팔식은 천하일절이었다.
휘둥그레진 붉은 눈동자와 대부분의 검신이 한 줌의 쇳물로 변한 서문예린의 검이 시야에 들어왔다.
“승자, 김무공 생도요. 이의는 받지 않겠소.”
무명 교수가 서문예린을 보며 빠르게 내뱉었다. 그녀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표정을 보니 그냥 봐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든다.
“...내려가자.”
멀뚱멀뚱 제자리에서 자신의 검을 내려보는 서문예린을 향해 말했다.
툭. 서문예린이 들고 있던 검을 미련 없이 비무대에 던져버렸다. 묘하게 심통 가득한 느낌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화났냐?”
“화 안 났어.”
“진짜 화 안 났지?”
“안 났어.”
“검은 미안하다.”
“아니. 내가 원한 거야. 그리고.”
서문예린이 천천히 머리를 젓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검은 수련용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래?”
“응.”
어쩐지 살살 녹더라. 수련용이라 그런 거였군. 쓸데없이 화려하길래 오해했다.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학 때, 우리 가문 방문해줄 수 있어?]
탁. 귓가로 들려오는 전음에 나는 걷던 걸 멈췄다.
[서문세가?]
[응.]
[갑자기?]
[갑자기는 아냐.]
[그럼?]
[가주님이랑 대장로께서 원하셨어.]
[...서문세가 대장로면, 무림맹주님?]
[응.]
[이유는 모르고?]
[난 몰라.]
서문세가. 무림맹주를 맡을 정도니 당연히 어마어마한 세를 자랑하는 명문이었다. 그런 곳에서 천마신교 사람을 왜 초대한 건지 의뭉스러웠다.
[생각 좀 해볼게.]
[응.]
서문예린이 빤히 날 쳐다봤다.
[왜?]
[아냐.]
얘는 역시 뭔 생각을 하는지. 좀 어려운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