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다.]
[응.]
전음을 끝내고 나는 한여름과 천하연이 기다리는 쪽으로 이동했다.
***
평온하게 움직이는 김무공의 뒷모습을 서문예린은 가만히 서서 응시했다.
‘제천검制天劍이 이리 허무하게.’
김무공에게는 그냥 수련용이라 둘러댔지만, 방금 파괴된 건 절대 평범한 검은 아니었다. 서문세가의 직계가 일반적인 검을 들고 다닐 리가.
당연히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다른 세가였으면 가보로 대대손손 떠받들만한 검이었다. 그것이 가볍게 내지른 일수에 복구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녹아버렸다.
게다가 검을 쇳물로 만들어버린 열기에도, 서문예린에게는 그 어떠한 타격도 오지 않았다. 아마도 의념의 힘을 다뤘기에 그런 거겠지.
‘초절정 고수 이상.’
가물가물했던 게, 확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단순 경지를 떠나, 김무공이 익힌 무공 자체가 특별했다.
자신이 익힌 천하검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
입술을 살짝 깨물며, 서문예린은 스멀스멀 밀려드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가라앉혔다. 친구의 남자에게 과한 관심을 품는 건 좋지 않다는 것 정도야, 만사에 무감한 서문예린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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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강이야.”
한여름이 내 베개를 꼭 안고 뒹굴뒹굴하며 말했다. 나도 그렇고 한여름도 그렇고, 이목이 너무 집중되는 탓에 어디 쏘다니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지금 방도 그런 연유로, 학사에서 따로 배려해준 장소였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정신없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며 대꾸했다.
“엄청 바쁜가 부네.”
조금은 뚱한 말투로, 한여름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알잖냐. 나 뭐 준비하는지.”
“진짜 혈교가 습격할까?”
탁- 마침 하던 일이 끝났기에, 나는 노트북을 덮고 의자를 끌고 가서 한여름의 정면에 가 앉았다.
“모르지. 근데 이런 준비는 조금 과할 정도로 하는 게 좋아.”
“맞아. 사람 너무 많아. 아무 데도 못 가겠어. 나가자마자 막 시선이 수백 개씩 꽂히더라.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야.”
“역시 미소녀는 그림이 되는 법이지.”
“내가 미소녀야?”
한여름이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살살 꼬면서 물었다.
“당연한 소리를.”
“알아. 그냥 해본 말이야.”
으쓱으쓱 입꼬리를 올리는 게 묘하게 얄밉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폰을 보며 스크롤을 슥슥 내렸다.
“모해?”
“오스카. 아무리 봐도 이새끼 좀 미심쩍어.”
“천비각에서 정보 안 왔어?”
“판단 불가. 내당 비마대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총장님 직속 전신대戰神隊도 의심 가는 부분은 없다 하는데, 이 직감이 말이지. 거슬려.”
“내가 꺾어버리면 그만 아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그것 관련해서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왜?”
“힘을 숨기고 있는 거 같단 말이지. 만일 그렇다면 네 목숨이 위험해.”
“상대가 초절정 정도면 몸 빼낼 수 있지 않을까?”
한여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판단이 안 돼. 혈교 비술이 워낙 음습해서. 현경은 아니겠지만, 내가 만일 혈교주라면. 사고를 칠 예정이라면 화경을 잠입시켜 넣었겠지.”
그제야 한여름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혈교가 일을 저지르는 게 4강일지, 결승일지도 미지수였다.
“...어쩌지.”
“진짜 미안한 얘긴데.”
한여름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는 일이라 입이 잘 떨어지진 않았다.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나게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도박보다는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답이라는 생각만 강해졌다.
“뭔데?”
띠링- 갑자기 알림음이 울렸다.
“잠시. 상태창에 뭐 떴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파일이 새로 떴다. 이제는 대충 파일이 어떤 조건에서 뜨는지 감이 잡혔다. 내가 어떠한 선택을 내렸을 때.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뜨는 모양이다.
『무림맹 특급수배서
혈교血敎 삼사도三使徒.
(사진입수실패)
이름 : 불명不明
성별 : 남男
나이 : 불명不明
경지 : 불명不明
신장 : 180cm 가량
체중 : 90kg 가량
특이사항 :
게르만족(독일인)으로 추정됨.
INTERPOL-UN 안보리 특별수배.
수천 명에 달하는 비인도적 생체실험에 대한 책임이 있음.
수백 명이 사망한 테러 행위 수십 건을 담당함.
천 이상의 살인 사건에 연루됨.
국제테러조직 ‘혈교血敎’의 핵심간부.
국제테러조직 ‘혈교血敎’에 대한 자금 마련을 책임지고 있음.
현상금 : 2500만 USD.』
나는 곧바로 한여름에게 파일을 공유했다.
파일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한여름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갔다.
“삼사도...?”
“혈교 습격은 확실해진 거 같다.”
“파일만 뜨고 아무 일도 없을 일은... 없겠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론, 이거 그냥 퀘스트 창이야. 파일로 돌려 말하는 거지. ‘혈교의 개짓을 막으세요.’ 이런 느낌?”
“삼사도면, 혈교에서도 꽤 고위직이지?”
“어.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데. 혈교 사도 중에 일사도부터 삼사도까지는 좀 특별하다 듣긴 했어.”
그 말인즉슨, 삼사도는 화경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였다.
“...오스카가 삼사도일 수도 있을까?”
“모르지. 그래서 말이다만.”
나는 아까 하려던 얘기를 다시 꺼냈다.
“4강, 기권해줄 수 있겠냐? 미안하다.”
한여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안해할 건 없고. 솔직히 관심 너무 쏟아져서 피곤하기도 했어. 변명이 문제네.”
“그러게. 갑자기 기권한다 하면 난리 날 거 같은데.”
“내가 미리 싸워보는 건 별로일까?”
나는 옆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생각했다. 한여름이 한 번 더 테스트를 해봤을 때와 아닐 때.
‘너무 위험하다.’
아직 한여름의 경지는 모자람이 있었다. 상대가 화경이라면 까딱했다간 즉사다.
“이번만큼은 조심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알았어. 대충 생리통이 심해서 도저히 비무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라고 둘러대면 될까?”
컥.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커피가 역류할뻔했다.
“...그냥 아프다 하는 게 낫지 않아?”
“무인이 아플 일이 별로 없잖아. 내가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대외적으로는 주최 측이 알아서 좋은 변명 꾸려서 내보내 주겠지.”
뭔가 아니다 싶다가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한여름이 기권한다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만 지금은 무신제를 우승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 기권하는 거로 하고, 대신 나랑 같이 일 하나 하자.”
“응? 무슨 일?”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
한여름이 기권을 선언하면서 오스카는 부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수많은 억측이 오갔지만, 학사에서 어찌어찌 무마는 시킨 모양이다.
사실, 저쪽보다는 이쪽이 워낙 큰 이슈를 몰고 다녀서 자연스레 묻힌 감도 있었다.
마왕을 꺾으려는 용사의 출사표. 무신제 흥행을 위해서인지 과장되게 구도를 잡은 면도 조금은 있었다. 4강 티저 영상 보고 어안이 벙벙했을 정도니까. 게다가 칩거한 나와 다르게 김용은 마치 그런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적극적으로 밖을 쏘다녔다. 오죽하면 인터넷 켤 때마다 김용 사진이 보였을까.
어찌 됐든. 드디어 김용과의 4강이 시작됐다.
무신제의 끝이 머지않았다.
온갖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김용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흥, 이전이랑 같을 거로 생각하지 마라.”
비무 시작 직전. 김용이 그야말로 만화 속에나 나올법한 대사를 외쳤다.
“보통 그런 걸 패배 플래그라고 하는데, 알아?”
“패배 플래그? 그게 뭐지?”
김용이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봤다. ‘패배’라는 단어가 심히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꼭 패배하는 애들이 승부 전에 그런 말을 하더라고.”
“날 놀리는 것이냐!”
“아니, 그냥 알려주는 거야.”
“패배 플래그건 뭐건 다 박살 내주마. 나는 강해졌다. 각오해라, 김무공.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용의 입매가 비틀렸다. 자신감이라도 풀충전하신 모양이다.
본인의 말대로긴 했다. 김용의 기도는 이전과 달리 훨씬 출중했다. 벌써 초절정의 벽을 두드리고 있는듯했다. 무엇보다 오만한 자세와 반대로 눈빛에는 전혀 방심이 없었다.
‘성장했구나, 김용.’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중2병이 좀 심해서 그렇지, 김용은 미래에도 ‘대협’이라 불릴만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관심이 좋아서 사람들을 그리 구하고 다니는 걸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키우면 밥값은 톡톡히 할 거다.
애초에 실력을 갖추면 그건 단순한 중2병은 아니니까. 어쩌면 내가 쟤를 너무 비하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역시 다시 봐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저 탁월한 무재를 멋 부리는 곳에 쓰고 있다. 재능이 워낙 좋다 보니 폼이란 폼은 다 잡고도 남들을 이겨왔지만, 냉정히 보면 비효율적이다. 내가 아는 김씨 가문 검술은 저렇지 않았다. 훨씬 실전적이었다.
‘안 되겠다. 빨리 끝내야지.’
다시 한번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수밖에.
이건 다 김용 너를 위해서다.
‘...음.’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세계 제일- 이라는 김씨 가문의 무학에도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놈의 혈교 때문에 심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꽈아앙-!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김용이 벼락을 뿜듯 발검하며 쇄도해왔다. 인상적인 검격이긴 했다. 서문예린이었다면 아마 좋은 승부가 됐을 거다.
‘천마수까지도 필요 없다.’
찰나에 판단을 마치고, 천마신공의 기운만 적당히 손에 모았다. 정기신 합일, 삼화취정의 공력 운용 덕에 순식간에 준비를 끝마쳤다.
쿵-
묵직한 천마군림보의 경파가 원형으로 뻗어 나갔다. 그 범위에 들어오자마자, 김용이 몸을 움찔거렸다. 검을 뻗는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지 차이가 나는 상대에게 천마군림보는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김용의 낯빛에 당황이 가득했다. 나는 처음 김용과 대련했을 때처럼, 그의 복부를 향해 장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반쯤 허리가 꺾인 김용이 비명을 지르면서 날아갔다.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졌지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성장 방법이 있는 법이다. 김용은 이런 식이 더 어울렸다.
“크윽, 쿠웨에엑!”
김용이 울컥 피를 뿜어내며 비틀거렸다.
나는 미련 없이 손을 털었다. 승부는 이미 끝났다. 막무가내로 내질렀던 이전과 다르게, 한 일주일 정도만 누워서 요양해야 할 정도로 정교하게 조절했다. 후유증은 남지 않을만한 수준으로.
이번에도 장백검군이 직접 달려와 김용을 부축했다. 장백검군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사방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쉽게도, 수많은 기대를 등에 업은 용사가 마왕에 승리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느긋하게 오스카가 있는 쪽을 힐긋 쳐다봤다.
오스카의 무심한 표정 너머로, 붉은 혈기가 느껴졌다.
그저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연일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천마신공이기에 나는 확신했다. 삼사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저자는 혈교 쪽이다.
‘혈교라.’
문득 파일에 적혀 있던, 그저 숫자에 불과한 죽음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방금 누군가 그랬다.
지금부터는 마왕의 시간이라고.
마왕. 김용이나 좋아할 법한 표현이었지만.
혈교에 한정해서라면, 그리되어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