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31)

다음화 보기

“무초無招의 묘妙라. 어려운 길을 가는구나.”

천하연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녀가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러게 말이다. 이젠 낙장 불입이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천하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라면 가능할 것도 같구나. 천부적인 감각이 있으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선천적이라기보단, 무혼으로 얻은 후천적인 감각이지만 말이다. 아직도 무혼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 상단전에 위치하여 자연스럽게 나를 보조해주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 정도야 알 수 있을 뿐.

“너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난 힘들 것 같구나.”

“응?”

“그대는 지금 본인이 쓰는 무공이 얼마나 초월적인 건지, 잘 자각을 못 하는 듯해.”

“이제 막 탄생했으니까. 혈수마공 기반이라곤 하지만....”

“내가 그걸 익히려면, 심즉동心卽動을 완벽히 체화한 경지에 이르러야 할 터. 당장은 가는 길이 달라.”

“아, 그런 거군.”

이해했다.

무학의 갈래는 수없이 많고, 모두가 똑같은 걸 추구하진 않았다. 무초라 해서 유초有招보다 무조건 우월한 것이 아니었고,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만류귀종이라 하여, 최종점에 가까워지면 다들 비슷해지긴 했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지는 알 수 없는 법이었다.

“마영수라대 준비는 끝났어?”

“물론. 그대가 요청한 대로 배치했다.”

“항상 고맙다.”

천하연에게는 받은 게 너무 많다. 당장 그녀가 아니었으면 신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 외의 것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하나가 기연과도 같았다.

“그럼.”

내 앞까지 다가온 천하연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휘어진 눈매가 사뭇 수려했다.

“왜?”

“잠시만.”

천하연이 내 가슴팍에 안겨 왔다. 나는 부드럽게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이제 됐다.”

한동안 안겨있던 천하연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묵묵히 모습을 바꿨다. 기존과도 다르게, 아름다운 금발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볼법한 평범한 외형이었다.

“...신교의 비술도 꽤 신기하단 말이지.”

“혈교의 원류니 말이다.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는 법이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천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여름이 기다리겠다.”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하였으니,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끝냈다.

***

결승.

예상대로긴 했지만, 결국 여기까지 올라왔다. 반대편의 상대가 전혀 예상 못 한 자였지만. 어떤 면에선 들어맞긴 했다. 이런 대축제야말로 테러를 벌이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되니까 말이다.

게다가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렸기에, 전력을 집중할 수도 없었다.

당장 독고패 총장만 해도 철원이 아닌 아카데미 쪽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성남에서 대기했다. 이쪽은 대신 고승빈 부총장이 있었지만, 전력 분산은 필연이었다.

[힘내, ‘마왕’ 김무공!]

약간의 대기 시간. 한여름으로부터 채팅이 날아왔다.

[그놈의 마왕은 좀.]

[왜, 잘 어울리고 좋잖아.]

[김용이라면 용사보단 마왕을 더 좋아했을 거 같긴 한데 난 사실 영.]

[걔 알고 보면 타고난 스타 아닐까? 이런 세계가 아니었으면 김용은 연예인 하고 있었을 거야. 인방이라든지.]

[그럴지도. 우리 빙의하기 전에 그 마왕 놈 생각나네.]

[음. 어차피 진지한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랬다. 무림의 별호와 다르게, 마왕이라는 명칭은 오로지 축제의 흥행을 위해 내게 붙인 거니까.

굳이 따지면 격투기 선수들의 링네임과 비슷했다. 현실에서 내가 알던 선수들도 꽤 화려한 링네임을 쓰긴 했었다. 좀비라든지 쇼군이라든지. 지금 보면 별호도 좀 비슷한 느낌인 거 같기도 하고. 현대에 와서까지 별호를 쓰는 걸 보면 말이다.

[오냐. 너야말로 조심해. 혹시라도 계획 틀어지는 것 같으면 몸부터 빼내고. 알지? 얼굴도 모르는 수천수만의 목숨보다 네 목숨이 나한텐 더 중요해.]

[...응.]

[다녀올게.]

결승 전 있었던 몇 가지 행사가 끝나고, 나는 비무대 위로 바로 올라섰다.

축제의 피날레인 결승에 걸맞게 탁 트인 비무대는 엄청난 면적을 자랑했다. 설사 초절정 고수끼리 전력으로 붙더라도 전혀 상관없을 정도로.

이전에 나눠놨던 비무대를 하나로 전부 합쳐버렸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저벅저벅.

무거운 발소리가 울렸다. 내 반대편에서부터 누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금발벽안. 우리가 서양인을 연상할 때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해놓은 듯한 남성이었다.

오스카 폰 샤움베르크.

폰(von)은 주로 독일에서 귀족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달고 있는 이름이다. 확실히 한눈에 봐도 어딘가의 귀족 자제가 연상되는 몸가짐이긴 했다.

외형만 보고는 도저히 혈교의 쓰레기들을 연상키 힘들었다.

“잘 부탁하지.”

능숙한 한국어. 반짝이는 금발 사이로 강건한 눈빛이 엿보였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거리를 벌렸다.

“시작하시오.”

무명 교수의 선언과 동시에, 고막을 울릴 정도로 요란한 함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비무대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들릴 정도니, 결승답게 엄청난 인파가 밀집했다. 나와 시선을 한 번 교환한 무명 교수가 저 멀리 사라졌다.

여기까진 예상대로였다.

오스카가 한 손 직검을 뽑아 들고 가슴에 모았다. 기사들이 하는 정중한 검례에 가까웠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고 오로지 눈앞의 상대에게만 집중했다.

‘...부정할 수는 없겠네.’

저자는 혈교의 주구가 확실하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근거는 다른 게 아니었다.

온몸에 충만한, 폭발적인 진기가 느껴졌으니까.

굳이 상태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협인지로와 천마신공이 둘 다 발동됐다. 그 말인즉슨, 저자를 격살하는 건 협의 범위 안에 든다는 얘기였다.

평범한 자라면 협인지로가 터질 리는 없었다. 아닐 가능성. 지금은 배제한다.

스윽- 기수식을 취하기 시작한 상대의 검에 은빛이 아롱졌다. 그랬던 것이, 어느새 휘황한 광채로 변했다. 검강에 가까운 검기였다.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죽인다.’

상대가 화경의 고수라면, 정체를 숨기고 힘을 억제한 지금이 기회였다. 의지를 품자 천마신공의 기운이 노도와 같이 혈도를 질주하며 전신 근육을 강화했다.

꽝- 천둥 같은 폭음이 울려 퍼졌다. 용천혈로부터 뿜어진 진각 경파가 비무대 바닥을 박살 냈다. 구름처럼 번지는 돌먼지 사이를 가르고 순식간에 오스카의 목전까지 다가갔다.

우우웅-

투명한 막이 오스카의 몸 주변을 둘러쌌다. 온갖 버프를 받아 화경의 끝자락에 이른 능력치를 아낌없이 쏟아부어 접근한 것임에도, 상대는 그 잠깐 사이 몸에 호신강기를 둘렀다.

[혈교 삼사도.]

전음과 동시에 놈이 움찔했다. 나는 손바닥에서 몰아치는 불꽃을 그대로 내질렀다.

꽈과과광-

태풍 같은 경파가 회오리치며 사방을 휩쓸었다. 막대한 열기에 반경 백 미터 이상이 녹아내려 유리화됐다. 그야말로 지옥불이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았다.

“쿨럭...!”

뒤로 다급히 물러난 놈이 피를 한 움큼 뿜어냈다. 즉사까지는 무리였다. 그래도, 이걸로 확실해졌다.

놈은 혈교 삼사도. 아니면 그에 준하는 자가 맞다.

“...정보가 새어나갔구나.”

이글거리는 열기 사이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듯한 울림이 들려왔다.

“어, 혈교 내부에도 간자가 있더라.”

사실이든 아니든 블러핑을 쳤다. 사실 ‘간자’라기보단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베아트리체의 역할이 컸지만.

“...어차피 이걸로 끝이다.”

쿵- 오스카가 갑자기 검을 들어 땅에 내려찍었다. 검을 중심으로 붉은 빛무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무인도에서 겪었던 현상과 비슷했다.

‘공간격리.’

비무대 전체에 일시적인 공간격리가 걸렸다. 혈교 특유의 사이한 진법이었다. 독고패 총장과 고승빈 부총장까지 경계했던 일이었으나,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대기가 일그러지며 핏빛 운무가 피어나 감각을 교란하려 시도했다.

쿵- 자연스럽게 일어난 천마신공이 모든 간섭을 차단했다.

“큭...! 놀랍구나. 과연 소교주께서 경계하실만하다.”

다시 한번 피를 뿜어낸 오스카가 작게 뇌까렸다. 짙은 호신강기에도 불구하고, 천마수 업화는 오스카의 내부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한 번 피어오른 지옥불은 쉬이 꺼지지 않는 법이다. 더는 숨길 생각도 없는지, 오스카의 눈에서는 혈광이 번뜩거렸다.

법력 무공이 마기와 상극이라면, 나의 천마신공은 마기를 복종시킨다. 차라리 정종 무공을 익힌 화경의 무인이었다면 훨씬 까다로웠으리라. 하지만 오스카는 분명, 마기를 이용하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도 업화의 불길은 오스카의 전신을 갉아먹고 있을 거다. 그나마 고절한 경지로 억누르고 있는 거지.

스으윽-

옷깃 스치는 소리가 전방위에서 울렸다. 공간을 격리하는 종류의 진법임에도, 핏빛 운무를 가르고 혈교도로 추정되는 자들이 나를 둘러쌌다.

대부분은 절정, 군데군데 초절정도 섞인듯했다.

숫자는 대략 사십여 명.

많기도 하다. 이번 일에 혈교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법했다.

허나, 화경은 내 눈앞의 오스카뿐이었다.

그거면 됐다.

입꼬리에 자연스레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시작하자.]

한여름에게 연락을 보내고.

나는 뒷짐을 진 채, 지금껏 극한까지 끌어올린 의념을 한 번의 진각에 담았다.

天魔君臨步.

천마의 걸음은 만마 위에 군림하노니.

쿵-

묵직한 굉음이 퍼져나가며, 주변을 에워싼 혈교도들의 머리가 으깨진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다음화 보기

콰과과광- 귓전을 때려 부술 듯한 굉음이 비무대를 중심으로 울렸다. 붉은 벽이 솟아오르며 정사각형의 비무대를 에워쌌다. 내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리됐는가.’

아카데미 부총장, 장백검군 고승빈은 무림맹 인사들이 모여있는 상석에 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수없이 점검했건만. 분명 비무대에 이상은 없었다. 대체 언제 저런 진법을 깔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김무공이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반신반의했으나 준비는 해놨었다. 신교의 정보력은 유명했으니까.

“이게 무슨 일이오!”

“진법?”

“테러! 테러인 것 같소!”

“당장 내가 나서겠...!”

팔목에 찬 간이 디바이스에 한여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고승빈은 내공을 실어 묵직하게 소리쳤다.

“사교의 테러요. 모두 안내에 따라 피하시오. 도와줄 필요는 없소.”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띠를 두른 자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대피를 유도했다. 화경의 무인이 내뿜는 기세에 다들 숨죽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무림맹 인사들이 대피하느라 허둥대던 사이.

찰나의 순간, 고승빈의 뒤쪽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승빈의 눈동자가 옆으로 스윽 향했다.

깡-

섬전처럼 고승빈이 출수한 검과 등 뒤에서 내려친 검이 서로 부딪쳤다.

“...낭왕. 자네까지 혈교의 주구였는가.”

전 세계 낭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는, 낭인들의 왕조차 혈교의 주구였다. 평소에 바쁘게 쏘다니던 낭왕이 무슨 일로 무신제 구경을 왔나 했더니, 이런 연유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혈교가 퍼져있는지 고승빈은 우려스러웠다.

“들켰군. 감이 좋소?”

드러난 몸의 모든 부분이 흉터로 가득한 사내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고승빈과 대치했다.

‘좋지 않다.’

고승빈은 출수하려던 걸 멈췄다. 낭왕보다 자신의 실력이 조금 낫다 하나, 화경의 무인 둘이 전력을 다해 싸우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뻔했다.

관람석에서 대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휘말릴 터.

‘영악하군.’

애초에 낭왕은 자신과 진지하게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저 붙잡아두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여기 온 듯했다.

“낭왕, 자네도 사도인가 뭔가 하는 게 된 건가?”

오랜 세월, 숱한 싸움을 거쳐온 고승빈은 낭왕과도 안면이 있었다. 그래서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전에 봤던 낭왕의 성정은 공명정대에 가까웠으니까.

“팔사도라네. 생각보다 우리에 대해 잘 아나 보군? 이제 와서 알아도 별 건 없겠지만.”

“...자네가 이런 자인 줄은 몰랐군. 혈교 같은 쓰레기와 결탁하다니.”

“서 있는 장소가 달라지면 보는 것도 달라지는 법 아니겠나? 아, 거기서 움직이진 마시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내 공격이 어딜 향할지는 모르겠으니. 나도 장백검군 자네와는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아.”

“....”

대화하며 기회를 엿본 게 바로 들통났다.

‘까다롭다.’

확실히 어마어마한 사선을 헤쳐온 자답게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의도가 간파당했다. 적어도 눈치 하나만큼은 천하일절이었다.

‘김무공, 자네의 말대로 됐군.’

김무공이 말했다. 분명 자신은 못 움직이게 될 거라고. 어떤 식으로든 혈교가 수를 쓸 거라고. 바꿔 말하면, 여기까지는 충분히 상정한 범위 내였다. 고승빈은 차분하게 눈앞의 낭왕에게만 의식을 집중했다.

다시 말해, 고승빈 자신을 억제할 낭왕만 붙잡아두면 이쪽도 계획대로라는 얘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