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31)

***

우득, 우드득- 곳곳에 은신하고 있던 고수들이 혈광을 내뿜는 자들을 점혈하고, 목을 비틀었다.

모두가 대피하는 복잡한 상황이라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도, 대부분은 인지하지도 못하고 지나쳤다.

김무공에게 연락이 오자마자, 한여름은 곧바로 다른 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상태창을 이용한 채팅 기능은 공간격리에도 불구하고 연락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흑풍단과 마영수라대는 미리 준비한 피아식별띠를 두르고 활동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 숨어있던 혈교도들이 혈기를 내뿜으며 사람을 습격하려 시도했다.

은신하고 있을 때라면 몰라도, 정체를 드러낸 이상 흑풍단과 마영수라대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여름 역시 바쁘게 움직이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혈교도는 보이는 즉시 음기를 때려 박아 얼려버렸다.

흑풍단과 마영수라대, 그리고 고승빈이 은밀히 부른 장백검문 무인들과 일부 교수까지. 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 덕에 혈교도들은 삽시간에 수세에 몰렸다.

‘그렇구나.’

주변을 넓게 살피며 한여름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만일 자신이 살던 현실이었다면 죄다 비명을 지르며 혼란에 빠졌을 텐데,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고 질서 있게 움직였다.

죽음이 가까운 세계.

한여름은 그게 의미하는 바를 실감했다. 사람들은 이런 비상사태에 놀라우리만큼 익숙했다.

그것은 혈교도에게는 불행이었으며, 습격을 대비한 자들에게는 천운이었다. 사람들이 크게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넓은 장소로 대피한 덕에 희생이 아예 없진 않았으나, 혈교도들이 이리 날뛴 것치곤 극히 적었다.

곳곳에 숨어있던 혈교인들이 참지 못하고 넓은 장소로 뛰쳐나왔다. 흑풍단이든 마영수라대든 은신에 특화된 탓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승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적룡대.]

한여름은 나직하게 신호를 보냈다. 혈교도들이 뭉치자마자 미리 대기 중이던 적룡대가 기병처럼 돌격했다.

칼바람이 폭풍처럼 일어나며 혈교도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십마광무진十魔狂舞陣.

열 명의 절정고수가 펼치는 합격진에 넓은 장소에 모인 혈교도들이 문자 그대로 갈려버렸다.

꽈과과광-

저 멀리 공중에서는 푸르스름한 기운과 적색의 기운이 연신 부딪쳤다.

무명 교수와 혈교의 누군가가 서로 치열하게 공중전을 벌였다.

‘전력이 부족하진 않아.’

한여름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전투는 치열했지만, 승산은 이쪽으로 가져왔다.

혈교의 진법에 갇힌 김무공이 생존만 한다면.

한여름과 얘기를 하며, 김무공이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다른 게 아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적다.’

연합체인 정파 특성상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너무 모호했다. 심지어 아카데미 교수진조차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풍지해 교수 같은 사례가 또 나오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계획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독고패 총장과 고승빈 부총장은 믿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상담한 결과도 똑같았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는, 그들도 구분하기 어려워했다.

확실한 자들만 선별했다.

저기서 매화꽃을 피워내고 있는 청하 교수나 무명 교수처럼.

조금이라도 못 미더운 자들은 바로 배제했다.

결국, 이쪽은 신교 무인들이 주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흑풍단이나 마영수라대, 적룡대는 확실히 믿을 수 있었으니까.

[전신대주입니다. 이쪽은 제압이 끝났습니다.]

예상대로 성남 쪽도 동시에 습격이 있었다.

‘독고패 총장의 발을 묶으려 했던 모양이지.’

계획보다 성남 쪽 제압이 빨랐다. 한여름은 생각을 마치고 연락을 보냈다.

[이쪽도 괜찮습니다.]

[예.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네?]

[전신戰神께서 그쪽으로 가실 겁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김무공.’

한여름은 무거운 낯빛으로 붉게 물든 장벽 너머를 응시했다. 여전히 진법 장벽 내부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

행사장으로 들어오는 가장 넓은 진입로.

천하연은 검을 품에 안고 묵묵히 근처에 앉아 기다렸다.

타다다닥-

어디선가 울리는 발소리에 맞춰, 감겨있던 천하연의 속눈썹이 서서히 들렸다.

혈교가 과연 내부에만 잠입해있을까.

아니다.

분명 예비대가 있을 터. 뭔가 틀어지면 바로 다른 쪽으로 계획을 이행하려 들게 분명했다.

저 멀리서부터 대놓고 붉은 피풍의를 걸친 자들이 달려왔다. 숫자만 백에 달했다.

그러나 예비로 전력을 빼둔 건 혈교만이 아니었다. 김무공 역시 이런 일이 발생할 건 예상했다.

그가 가진 최강의 카드 중 하나이자 혈교가 모르는 비수가 있었으니, ‘천하연’의 존재였다.

그렇게 습격 경로로 가장 유력한 장소에 대기하던 천하연이 혈교 무사들을 막아섰다.

혈교도들이 눈짓으로 신호하며 천하연 쪽으로 일부가 달려왔다.

‘그대의 말대로 됐구나.’

스륵- 검집에서 천하연의 검, 백련白蓮이 뽑혀 나옴과 동시에.

달려오던 사내들의 목에 붉은 실금이 그어졌다.

투두둑- 몸과 분리된 머리가 땅을 굴렀다.

“보통 년이 아니다! 합공하라!”

그제야 놈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명령을 내렸다. 혈교도들이 우르르 천하연을 둘러쌌다.

김무공과 잠자리를 가지며, 불완전한 천마신공의 구결을 보완하고, 그의 성장세를 지켜보는 것.

이 모든 일은 천하연에게 깊은 영감을 남겼다.

그야말로 홀로 했던 수년의 적공에 비견될 정도였다.

천하연 정도의 천재에게 수년의 적공이란 말은, 다른 자들의 수십, 수백 년에 비견된다는 얘기기도 했다.

김무공을 만났을 때부터 천하연은 화경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으니.

짧은 호흡 한 번 사이.

눈꽃 같은 검신에 찬란한 별빛이 모여들었다. 빛으로 이뤄진 실이 그물처럼 짜이더니 이내 온전한 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검기성강劍氣成罡.

밤하늘의 달을 깎아 검으로 만들면 이러할까.

혈교도들이 동시에 달려드는 것에 맞춰, 천하연이 검을 들고 부드럽게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금빛 머리칼과 별빛으로 둘러싸인 새하얀 검신이 하늘하늘 나부꼈다.

천마검결 天魔劍訣

월광검형 月光劍形

만월만천 滿月滿天

그건 마치, 아름다운 춤사위와도 같았다. 천하연을 중심으로 둥근 검격이 뻗어 나갔다.

푸화아악-

사위에.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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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거대한 발로 밟아버린 것처럼, 사방에 머리가 짓이겨진 시체가 가득했다. 선홍색 핏물과 투명한 뇌수가 뒤섞여 흘러내렸다.

‘어찌 이런...!’

혈도 삼사도, 오스카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머리가 으깨어지고 목이 꺾여나간, 선연한 시체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만을 말했다.

사십에 달했던 혈교 무인 중, 초절정 열을 제외하면 고작 상대가 내디딘 진각 경파 한 번에 즉사했다.

삼십의 절정 고수.

절정 하나를 키워내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나름 날고 긴다는 자들을 모아, 영약과 뛰어난 비급까지 제공해야 그 정도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수련해도 넘을 수 없는 경지가 절정의 벽이었다.

평범과 불범不凡을 가르는 경지가 절정이었으니까.

전 세계에서 모으고 모아 키워낸, 그런 자들 서른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괴물 놈이.”

까드득- 악귀 같은 표정으로 오스카는 이를 갈았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도 김무공이 내가중수법으로 몸에 침투시킨 업화의 불꽃은 착실하게 오스카를 갉아먹고 있었다.

‘여기서 무조건 죽여야 한다.’

나이 스물. 천마신교의 이공자.

신분만 봐도 위험한 놈인데, 벌써 저 나이에 화경의 무인과 대적할 실력까지 갖추었다.

‘무공 자체가 위험하군. 지독한 무공이다.’

상당수의 진기가 내부에 스며든 불꽃을 억제하고, 몸을 회복시키는 데 쓰였다. 혈교 무공 특유의 재생능조차 저 불꽃에는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혈공 진기가 영성이라도 지닌 것처럼, 불꽃에 대적하는 걸 꺼렸다. 혈공에 힘을 더하는 사사구혈진四死覯血陣의 범위 내인데도 그랬다.

의념까지 써가며 억지로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상극이라는 법력 무공도 이 정도는 아닐 터.

저자가 성장한다면 혈교는 그날로 지워질 게 분명했다.

‘과연, 소교주의 혜안은 놀랍구나.’

이 일을 계획한 건 혈교 소교주, 혁리악이었다.

그는 김무공이 장차 혈교의 대적이 될 거라 예상했다.

그리하여 오로지, 김무공 하나만을 죽이기 위한 계획을 짰다. 다행히 천재 특유의 오만한 성격 때문인지, 김무공은 순순히 여기까진 올라왔다. 비록 희생자가 많이 생기고 자신조차 생사를 장담키 힘들겠지만.

‘저자만 죽이면 상관없다.’

하잘것없는 몰락 귀족을 남 부럽지 않게 만들어준 게 혈교였다. 그간 많이도 받았다.

한 번쯤은 갚아도 되지 않겠는가.

온갖 추악한 짓을 저질렀어도, 오스카의 근본은 귀족이었다. 그리고 오스카는 자신이 귀족 출신이라는 것에 나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은이든 원이든 받은 건 갚는다. 명예로운 귀족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드득우득-

오스카의 얼굴이 중년 사내의 그것으로 변했다. 외형을 바꾸고 있던 진기조차 지금은 아껴야 할 때라 판단했다.

쾅-

오스카가 짧은 상념을 마치자, 다시금 돌먼지가 비산했다.

“크아아아악!”

바로 근처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김무공이 가장 가까운 자의 머리통을 붙잡고 쥐어짰다.

마치 잘 익은 토마토가 깨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검은 불꽃에 머리가 으깨진 시체의 전신 피부가 녹아내리며 허연 뼈가 드러났다.

“이놈!”

오스카는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외형을 바꾸는 잠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쿵-

진각 경파가 울렸다. 어마어마한 내공량이었다. 그것이 강대한 의념과 결합하니, 화경의 무인조차 잠시간 멈칫하게 했다.

‘크윽...!’

목구멍으로 핏물이 울컥 올라왔다. 내상이 점점 심해졌다. 불꽃을 억제하느라 제대로 의념을 가다듬기 힘들었다.

화경의 무인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인, 검강을 형성할 정도로 극한에 이른 의념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말은.

사실상 내공 좀 많은 초절정 고수와 큰 차이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공량은 오스카 자신이 밀렸다.

“으아아악!”

또다시,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렸다. 김무공은 정면에서 오스카를 상대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오스카의 검격을 피해가며 숫자를 줄이는 데 집중했다.

대체 무슨 초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초절정 고수들조차 일격 하나를 제대로 막는 게 불가능했다.

방어하면 방어하는 대로.

방어하지 않으면 방어하지 않는 대로.

낭비 없이 일격에 끝났다.

“내 뒤로 오라!”

오스카가 다급히 소리쳤다. 김무공을 둘러쌌던 남은 혈교도들이 오스카의 뒤에 섰다. 김무공을 공격하기보단, 넓게 퍼져있던 남은 혈교도들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움직임을 제약하는 진각 경파는 마구 난사할 수 없는지, 점차 횟수가 줄어갔다.

덕분에 여섯은 살렸다.

“흡!”

강한 기합성과 함께 오스카가 발을 내려찍었다. 붉은 진기의 파편들이 휘날렸다. 검격의 잔영들이 비무대 전체를 뒤덮었다.

김무공은 넓게 불꽃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화경은 역시 화경인가.’

대기에 새겨지는 현란한 검로를 눈에 담으며, 김무공이 생각했다.

검격을 쳐낸 손이 얼얼했다. 오스카가 일으킨 검격은 이내 진기의 폭풍으로 화해 잠깐이나마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처음 방심했을 때 타격을 입히지 못했으면, 아마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안하다.”

휘몰아치는 진기의 폭풍 뒤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무공에게 건네는 말은 아니었다.

‘...미친놈들.’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김무공은 진기 폭풍 너머를 응시했다. 오스카가 혈교도 하나의 목을 붙잡았다. 목이 붙잡힌 혈교도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진 목내이가 되어버렸다. 남의 진원진기를 취하여, 일시적으로 자신의 힘을 증폭시키는 흡정공이었다.

이래서 혈교 놈들은 혐오할 수밖에 없다. 수하의 생명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갈취하는 놈들. 수하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는 김무공과 그야말로 상극 그 자체였다.

“이리될 줄은 몰랐군.”

오스카가 이전과 달리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뿜는 기세가 달라졌다.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은듯했다.

‘...더 이상 흡정을 하게 둬선 안 된다.’

김무공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인간이 가진 생명력은 가장 강대한 힘 중 하나였다. 업화의 불꽃조차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힘 앞에서는 제대로 맥을 못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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