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31)

“천하제일, 고금제일에 근접한 재능들이 언제나 개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네 운명은 여기까지다. 안타까운 일이군.”

느긋하게 말을 하면서도 오스카의 검에는 찬란한 빛이 모여들었다. 화경을 상징하는, 짙은 검강이 형성되었다.

위기였다. 오스카의 힘은 분명 김무공의 예상보다 강했다. 온전한 화경의 무인을 상대로는 승산이 낮았다.

허나, 본디 모든 걸 예상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계획이란 언제든 쉬이 틀어지는 법이고, 위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현듯 다가온다.

위기危機.

김무공은 이 단어를 마냥 싫어하지는 않았다.

위기란 위태롭다는 뜻의 위危.

기계나 틀을 뜻하는 기機가 결합한 단어다.

그리고 기機에는, 단순히 틀이란 뜻뿐만 아니라 ‘기회’라는 의미도 있었다.

갈림길의 때는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온다.

지금은 무리해도 괜찮다. 그는 선택을 내렸다.

스윽-

검집에서 흑룡검이 뽑혀 나왔다. 오스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검은 장식인 줄 알았더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묵빛 검을 양손 역수로 잡고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김무공의 주변만 시간이 멈춘듯했다.

화악-

진법을 뒤덮은 핏빛의 운무가 회오리치며 검게 물들었다.

“무슨 사술을!”

주변에 발생한 현상을 인지하고 오스카는 기겁했다. 뒤쪽의 멍청한 놈들은 고개만 갸웃하고 있었지만, 오스카만큼은 지금 김무공이 하려는 짓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깨달았다.

오스카가 다급히 용천혈에 내공을 때려 박으며 앞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김무공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쿵-

김무공이 눈을 반개한 채, 역수로 쥐고 있던 검을 땅에 꽂았다.

그의 사부가 유일하게 가르친 검.

그러나, 천마 천위강조차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김무공이 익힌 천마신공은 원류와 사실상 동일했다. 혈수마공도 그렇고, 잘 맞는 심법이 아니라면 무공이 가진 본연의 힘을 끌어내기는 힘든 법이었지만.

천마검결은 태초부터 천마신공을 위해 탄생한 무공이었다.

‘업화.’

온전한 천마검결에 업화의 힘을 더했다.

화르르륵-!

땅에 꽂은 검을 중심으로 영묘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원형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불길이 비무대에 피어오르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불길을 가르고 다가온 오스카가 검격을 내려치기 직전.

김무공이 마지막으로 검파를 굳게 잡고, 검을 한번 비틀었다.

천마검결 天魔劍訣

봉마검형 封魔劍形

만겁윤회 萬劫輪廻

쿵. 묵직한 진동과 함께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다.

쩌저저저정-!

주변의 대기가 찢어 발겨지면서, 붉은 진법 장벽이 유리처럼 산산이 깨졌다. 깨져나간 핏빛 파편들이 검은 불길에 타오르며 꽃잎처럼 분분히 휘날렸다.

“크아아악!”

흑룡검에서 일어난 무지막지한 파동에, 검을 휘두르던 오스카가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면서 사정없이 튕겨 나갔다. 오스카는 비틀거리면서, 검에 의지해 무릎을 꿇고 상체만 겨우 일으켰다. 지독한 열기에 피부가 녹아내렸다.

“아아....”

오스카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옥.

현세에 지옥이 강림한듯했다.

쓰러진 시체들과 핏물, 살점들이 모조리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고. 뼛조각조차 허연 재가 되어 흩날렸다.

살아남은 사람은, 흑룡검을 다시 뽑아 든 김무공과 자신뿐이었다. 뒤에 서 있던 혈교도들은 이미 숯덩이가 되어 저 멀리 나뒹굴고 있었다.

“쿨럭-”

김무공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피를 울컥 뿜어냈다.

경지에 맞지 않은 힘을 억지로 끌어쓴 대가는 처참했다. 김무공의 내부는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화우火雨가 내리는 가운데.

김무공이 검을 쥐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김무공은 오연한 자세를 견지했다. 다가오는 그를 보며, 오스카는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끌어모아 소리쳤다. 공간격리가 풀렸다는 얘기는 다른 혈교도 역시 개입할 수 있다는 뜻도 됐다.

이 대계에 참여한 모든 혈교도를 희생시키더라도 김무공은 죽여야 했다. 최후의 기회였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혈교도는 들으라! 삼사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수단 가리지 말고 교의 대적 김무공을 참살하라!”

서걱- 전광처럼 검격이 번뜩였다.

오스카의 목에 기다란 실금이 그어졌다. 그가 목을 부여잡고, 가래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푸흐흐... 네놈도...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툭. 오스카의 몸이 허물어지며 잘린 목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싸움을 피해가며 아직까지도 남아있던 혈교도가 오스카의 명에 따라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혈교도들을 보며, 김무공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잘려나간 오스카의 머리를 지그시 쳐다봤다.

‘네놈들은 모른다.’

꽝-!

일순, 굉음과 함께 하늘이 열렸다. 진기의 유동만으로 구름이 전부 사라졌다. 김무공의 머리 위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 펼쳐졌다.

‘현경의 무인이 어떤 존재인지.’

콰과과과광!

새하얀 빛으로 된 검이 벼락처럼 쏟아져 내렸다.

김무공을 향해 뛰던 혈교도들은 허공에서 내리꽂히는 강기검에 형체도 없이 스러졌다.

“감히.”

드높은 천공으로부터 노기 섞인 음성이 울려 퍼졌다.

“사교의 잡것들이.”

공중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절대자가 선언했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리거라.”

이윽고.

전신戰神의 분노가 지상에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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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궁-

철원의 우거진 산속, 땅바닥이 들썩였다. 온몸이 흉터투성이인 거구의 사내가 흙바닥을 뚫고 겨우 빠져나왔다.

“쿨럭, 쿨럭!”

연신 메마른 기침을 토해낸 사내는 한쪽 팔이 없었다.

“퉤!”

사내가 침을 뱉으면서 몸에 묻어있던 흙을 털어냈다. 사내의 시선이 허전해진 오른팔로 향했다. 옷감을 가지고 임시로 감싼 절단면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늙은이.”

혀를 차면서 사내, 낭왕은 근육을 조여 출혈을 막고 어깨 혈도를 점했다. 감각이 사라지며 피가 다시금 멎었다. 이 모든 건 임시조치에 불과했다. 치료가 필요했다.

‘대체 어쩌다 이리된 건지.’

낭왕의 이마에 내천자가 그려졌다.

이번 일에는 혈교 십삼사도 중 이미 사망한 오사도, 그리고 일사도와 이사도를 제외하면 전원이 투입됐다.

게다가 성혈단의 일부, 사대마전의 정예들까지 차출되었다.

이 모든 전력은 오로지 신교 이공자, 김무공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니. 차고 넘치는 전력이었다.

계산대로라면.

허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교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인 삼사도는 사망, 사도 중 대부분이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낭왕 자신도 죽을뻔한 걸, 오른팔을 희생해가며 겨우겨우 빠져나왔다. 무명 교수와 싸우던 사사도에 이목이 끌렸기에 가능했다. 아마 사사도도 죽었겠지.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부상도 처참했지만, 내상도 심각했다. 걷는 것만으로도 한계가 다가왔다. 만일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 이후는 뻔했다.

결국에는 들켜서 처단당하겠지.

괴물 같은 늙은이, 독고패 총장의 시야를 벗어나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낭왕은 비틀거리면서도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간 끝에, 낭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찾았다.’

깊은 산 속.

혈교 고위직들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는 환영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뜻도 됐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숲처럼 보이지만, 이 너머에는 혈교의 안가가 존재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면서 숨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서서히 낭왕의 모습이 진법 안으로 사라졌다.

***

어둠이 내려앉은 실내.

“하아암-”

수십 명이 파티를 벌여도 충분할 정도로 넓은 거실에서, 베아트리체는 따분하게 기지개를 켰다. 한동안 소파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던 베아트리체가 시계를 한 번 힐긋 보고 TV를 켰다.

띡-

그곳에선 연신 무신제 테러에 관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민들이 능숙히 대피하는 것부터 혈교도들이 사냥당하는 장면까지 적나라하게 비쳤다.

마지막으로 한 노인의 등장과 함께, 모든 영상이 끊겼다. 진기의 유동만으로 주변 하늘의 드론들이 전부 추락해 영상 송출이 불가능했다.

베아트리체가 정지시킨 화면에는, 삼사도와 혈교의 정예를 격살한 김무공의 모습이 비쳤다.

‘역시.’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에, 베아트리체가 몸을 배배 꼬았다. 강렬한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던 도중.

“응?”

주변을 감시하는 CCTV 화면 중 하나에 흐린 빛무리가 유동했다. 누군가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몸에 딱 달라붙은, 피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은 베아트리체가 몸을 일으켰다. 입매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가슴 언저리를 단단히 여몄다. 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몸을 한 번 가다듬고, 마지막으로는 위에 장포를 걸쳤다. 혈교 십삼사도를 상징하는 혈포血袍였다.

쾅-

거세게 문이 열리고, 피투성이의 사내가 비틀거리면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팔사도님.”

정중한 인사에, 낭왕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십삼사도, 베아트리체는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인물이었다.

TV가 내뿜는 희미한 청광만이 비치는 어두운 실내에서.

노란 눈동자를 빛내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에 낭왕은 짙은 이질감을 느꼈다.

“...십삼사도, 어찌하여 이곳에? 자네는 성남을 습격하기로 했던 거 아니었나...?”

낭왕이 쥐어 짜낸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제가 말인가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묘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였다.

“소교주께서 분명 명하셨을 터. 설마... 소교주의 명을 어긴 것인가...!”

“아하하하하!”

갑자기 베아트리체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십삼사도...?”

“사도들은 독립적인 존재이죠. 교주님도 아니고 소교주의 명을 따를 의무는 없답니다.”

“지금 교의 교주님은 사실상 소교주님이라는 걸 모르는가!”

“하지만 교주님은 아니지요.”

단호한 대답에 낭왕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또각. 또각. 또각.

기다란 다리를 쭉쭉 뻗으며 베아트리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베아트리체의 노란 눈동자에 실린 건, 명백한 살의였다. 셀 수 없는 사선을 넘어온 낭왕이기에 확신했다.

“지금 생각하는 게 뭐든, 하려는 게 뭐든, 당장 멈추게.”

“제가 왜 그래야 할까요?”

다시 한번 베아트리체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낭왕은 베아트리체의 등 뒤에서 꼬리가 살랑거리는 환영을 보았다. 살갗을 저미는듯한 음기가 베아트리체의 몸 주변을 감돌았다. 낭왕의 온몸에 닭살이 오도독 돋아났다.

“이익...! 배신자 년이!”

남은 힘을 모두 모아 낭왕이 기습적으로 출수했다.

파직-

불꽃이 한 번 튄 자리에, 낭왕의 목이 나뒹굴었다. 잘린 단면으로부터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우리 팔사도님은 왜 이리 멍청하실까.”

베아트리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쭈그려 앉아 낭왕의 잘린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바닥에 쓸린 혈포로 낭왕의 피가 스며들면서, 더욱 불길한 색으로 변했다.

“그런 몸으로. 제가 여기 있는 걸 아셨으면 당장 도망가셨어야지요. 아니, 도망도 불가능했으려나? 그럼 애초에 이런 곳은 오지 말았어야지요? 눈치는 좋으신 편인데 참으로 안타깝네요.”

톡톡. 베아트리체가 낭왕의 머리를 다시 한번 두드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시체가 말을 할 리는 없으니.

지루한 표정으로 베아트리체가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홱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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