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악-
갑자기 베아트리체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일어나더니, 낭왕의 몸을 덮쳤다.
콰드득- 콰드득-
한동안 짐승이 무언가를 씹어먹는 소리가 이어지다, 이내 소름 끼치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약간의 소독약 냄새. 새하얀 병동이 눈부셨다. 열린 창문으로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이 몹시도 청명했다. 한동안 누워서 구름 흘러가는 걸 멍하니 쳐다봤다.
이리 편하게 누워있던 적이 얼마 만인가 싶다. 날짜를 보니 벌써 혈교 습격 사건으로부터 이틀이나 지났다. 시간으로 따지면 24시간을 넘게 자버렸다. 하루에 내 수면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인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며칠 잠을 몰아 잔 느낌이다.
스윽. 나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이불이 몸을 스치는 감촉은 그리 나쁘진 않았다. 문득, 흐드러진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작은 숨소리. 나는 무심코 엎드려 자는 한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여름이 얕은 신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일어났냐?”
“우웅.”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한여름이 길게 하품을 내뱉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한여름의 눈가에 붙은 눈곱을 떼줬다.
“...내가 할 거야.”
홱 고개를 돌린 한여름이 다급히 거울을 꺼내 여기저기 만지작거렸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러냐.”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원래 볼 거 다 본 사이일수록 조심해야 해. 실수하기 쉽거든.”
한여름이 주머니에서 동그란 파우더를 꺼내더니, 얼굴은 물론이고 앞머리까지 팡팡 두드려 발라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맞는 말이긴 한데, 오랜만에 보네 그거.”
자세히 보니 한여름이 학생 때부터 맨날 들고 다니던 작은 파우더였다.
“여기도 있더라고. 바로 샀지.”
“내공으로 다 가능하지 않나?”
“그거랑은 또 느낌이 달라.”
“잘 모르겠던데.”
“아무튼 달라. 됐고, 몸은 이제 괜찮아?”
“괜찮아. 내상 좀 있긴 한데, 거의 나은 듯.”
혼원단까지는 아니더라도, 학사에서 내어준 자소단은 내상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다만, 아쉽게도 내공 자체는 그리 늘어나지 않았다. 내 하단전은 한계에 가까웠으니까. 당연히 경지가 상승하는 일도 없었다.
어차피 영약만으로는 이제 효과를 보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이리 실감하니 아쉬움이 커졌다.
“과일 먹을래?”
한여름이 냉장고에서 한라봉을 하나 꺼냈다.
“한라봉?”
“신교 특산품, 천마봉이래. 이름 웃기지 않아?”
“...예전부터 느꼈는데 말이지. 천마 이름 아무렇게나 붙여도 되는 거 맞나?”
“몰라. 하나 먹어.”
상큼달달한 맛에 정신이 확 드는 느낌이다.
“뒷정리는 잘 되어가고 있대?”
“응. 거의 끝났다고 하더라.”
대규모 테러 사태였지만, 희생자가 적은 덕에 생각보다 쉽게 넘어간 듯했다. 물론 이것저것 따지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갈 길이 구만리였지만. 적어도 내가 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고생했다.”
부리나케 뛰어다닌 것 치곤, 한여름은 다친 곳이 없었다. 걱정했었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응. 너도.”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한여름이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똑똑.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성. 이인二人.’
“들어오세요.”
나는 경계를 끌어올리고 말했다.
저벅저벅.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둘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야?]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설마 ‘저 사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등장할 거라곤, 전혀 예상 못 했다.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보다 훨씬 젊었지만, 확실했다.
“안녕하십니까. 국정원 무림감찰부 박수호 팀장입니다.”
내 눈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 남자는, 미래에 무림말살지계武林抹殺之計를 실행한 희대의 모략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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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말살지계武林抹殺之計.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저건 무인武人말살지계가 아니었다. 고작 대한민국의 힘으로 무인까지 전부 없애버리는 게 가능할 리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되면 게이트 사태를 막지 못한다.
무인武人이 아닌 무림武林.
무림은 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박수호가 말살하고자 했던 ‘한국무림’ 역시 정부의 통제에서 아득히 벗어난 존재였다. 게이트 사태가 터지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사천이나 제주만 봐도 그랬으니까.
백주대낮에 사람을 죽여도 무림인이라면 국가가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현대 무기로 제압이 가능한 흑도 무인 수준이라면 별문제 될 게 없었으나, 무림맹에 소속된 인원이거나 상대가 너무 강할 경우.
특히 이번의 혈교처럼.
그렇다면 결국 무림맹이나 신교의 협력을 얻어 처벌을 시도하는 게 고작이었다. 상대가 악인이라면 그나마 낫다. 정파 무인들은 무슨 짓을 하든 아예 건드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무인들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귀족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 세계는, 무인보다 무인이 아닌 자가 훨씬 많았다. 그나마 게이트 사태를 일선에서 막는 협객들이 많기에 문제가 덜한 거지.
이기적인 자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고, 그건 무인이라 해서 크게 다르진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다. 자연스레 무인이 아닌 자들의 분노가 축적되기 쉬운 구조였다.
그런 세계에서.
여기, 한 남자가 있었다.
비록 무에 대한 재능은 아예 없는 수준이라, 기氣를 느끼지도 못하여 간단한 삼류 심법조차 입문이 불가능했지만.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국가에 소속되어 난세를 발판삼아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다방면으로 인정받아, 조직 내에서도 승승장구하게 된다.
무인이 아닌 자들 중에서는 꽤 고위직이라 볼 수 있을법한, 그런 위치에 오른 순간.
가족들이 무인에게 전부 살해당했다. 흉수를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무림맹에서는 앵무새처럼 ‘조사해 보겠다’만 반복했다.
크게 무슨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단,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다.
이 세계에선 아주 흔한 일이다.
아주 흔한 일이었지만.
흔하다 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고 그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제대로 이겨내지 못했다.
절망에 휩싸인 채, 극단적으로 나아간 생각은 마침내 이 ‘무림’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쪽으로 미치게 되었고.
그 천재적인 두뇌를 오로지 무림말살을 위해 쓰기로 결심한다. 그가 무림감찰부장의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얻은 수많은 정보를 이용하여 무림인들의 분열을 획책하고, 무림의 힘을 깎기 위해 시도했다.
무림의 힘을 억제하여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무인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놓는다. 그것이 박수호가 추구한 궁극적인 목표였다.
예전에 내가 인상 깊게 봤던 영화 하나가 있었다.
초인들의 세계에서 평범한 사람이 본연의 능력만으로 복수극을 벌이는.
물론 영화상에서 복수극을 벌이는 자의 역할은 빌런이라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했었다.
박수호 역시, 게임 내에서는 당연히 음모가 발각되어 패배하는 루트로 가게 되나.
그가 내뱉은 무인을 향한 저주 섞인 대사들과 처절한 스토리 때문에 나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초인들의 세계에서 ‘비능력자’의 설움을 대변하는 게 박수호라는 캐릭터였고, 게임 내의 세계가 마냥 꽃밭은 아니라는 걸 암시하는 장치기도 했다.
게임 스토리라면 비극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허나, 현실에서 비극은 절대 유쾌하게 바라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부터, 그가 복수귀로 전락하지 않도록 막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무림 말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부족한 인류의 힘을 그런 식으로 깎아 먹는 건 자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긴 해도.
설마 이렇게 이른 시기에,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아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혈교부터 좀 쳐내고 내년쯤부터 탐색해볼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반갑습니다. 김무공입니다.”
나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인사를 건넸다.
“제가 국정원 직원이라는 걸 의심하진 않으십니까?”
“예. 여기까지 들어오셨으면. 확인 절차는 끝냈겠지요. 상대가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면, 진실이라 생각하는 편이 편합니다.”
박수호에 대해 몰랐다 해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근처에 느껴지는 기척만 해도 꽤 많았고, 당장 적룡대도 주변에 상주 중이다.
신원이 불확실한 자가 내 병실에 접근하게 둘 리가.
“음. 이해했습니다.”
“조사차 나오신 겁니까?”
“예. 허락해주신다면 말입니다. 그냥 별 거 아닌 질문 몇 가지 드리고자 왔습니다. 아무래도 민간인이 엮여 버렸으니 말입니다. 저희로선 골치 아프지요. 아시다시피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합니다. 말이 ‘무림’ 감찰부지 신교나 무림맹 분들을 겁박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물며 하늘 같은 신교의 이공자님께 저따위가 무례를 범할 수는 없지요.”
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명분은 좋군.’
민간인이 엮인 이상 국가 기관이 형식적으로라도 나설 수밖에 없다. 이건 표면적인 이유고, 저자가 여기 나온 가장 큰 목적은 ‘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내가 어떤 인물인지, 뭘 목적으로 하는지, 위험한지, 위험하다면 얼마나 위험한지.
게임 내에서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박수호는 정보를 수집해댔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짧은 상념에서 벗어나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대신,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한여름에겐 따로 채팅을 건넸다.
[이따 자세한 건 말해줄게. 미래 무림감찰부장이다.]
[어, 이 사람이 그 사람이야?]
[오냐.]
[어쩐지. 어디서 봤다 했더니.]
박수호가 옆의 국정원 직원에게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얘기 잘 해.”
한여름이 손을 한 번 흔들고 국정원 직원과 병실 밖으로 나갔다.
“자 그럼 몇 가지 가벼운 질문을 좀....”
박수호가 기록을 위한 터치펜을 들고 내 앞쪽 의자에 앉았다.
우웅- 곧바로 기막부터 쳤다. 애초에 ‘기’라는 걸 느끼지 못하는 박수호는 내가 병실 전체에 기막을 둘러버렸음에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듯했다.
“박수호 팀장, 형식적인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박수호 팀장의 눈에 아주 잠깐이지만 이채가 스쳤다.
***
『김무공金武功.
천마신교天魔神敎 이공자二公子.
출신 : 대한민국(정확한 행적 불명. 게이트 사태로 인해 기록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됨.)
성별 : 남男
경지 : 초절정~화경(추정)
무공 종류 : 불명不明(수법과 검법에 통달한 것으로 추정)
천마무학天魔武學을 이미 계승한 것으로 판단됨.
건장한 체구와 남자답게 잘생긴 외양을 지님.
신교의 이공자답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 오만한 성격으로 추정....』
스윽-
각 잡힌 자세로, 박수호는 터치펜을 화면에 대고 지익 그었다. 일부 문장에 취소선이 죽죽 그려졌다.
‘훨씬 복잡한 타입이다.’
박수호는 새하얀 여백으로 가득한 페이지로 화면을 넘겼다. 기존에 추정했던 정보는 크게 의미가 없다 판단했다.
‘실제로 만나보길 잘했군.’
그는 감정을 숨기고, 차분하게 물었다.
“형식적인 이야기 말입니까?”
“예. 어차피 제가 아는 건 학사를 통해 얘기했습니다. 더 할 얘기도 없습니다.”
“그래도 절차가 있으니 말입니다.”
“사건이 아닌 저에 대해 궁금하시겠지요.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 신교의 이공자가 무슨 존재인지. 그것이 궁금해서 오신 것 아닙니까?”
김무공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의도를 바로 파악 당했다. 숨겨 봐야 득보다 실이 많다. 찰나의 순간 박수호는 결단을 내리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예. 공자님의 말이 맞습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그렇습니까. 지금 받는 연봉이 얼마 정도 되지요?”
되려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농인가 해서 김무공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는 한없이 진지했다.
“공무원이라 말입니다.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정확한 연봉은 아무래도 좀....”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겠지요. 대부분 공무원들은 박봉으로 고생하니 말입니다.”
“신교의 이공자께서는 아랫것들 생활에도 꽤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박수호가 차갑게 말했다. 대부분 국정원 직원들은 연봉 묻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국정원에는 단순 돈 때문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자부심을 가진 직원이 꽤 많았다.
“원화로 100억. 일시불로 즉시 드리겠습니다. 아니,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신교로 오십시오.”
“예?”
산전수전 다 겪은 박수호조차 방금 말에는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신교의 이공자가, 자신의 뭘 안다고 저러는 것인가.
“가족들은 신교에서 철저하게 보호해드리겠습니다. 크진 않아도, 정보집단 하나도 바로 꾸려드릴 수 있습니다. 규모는 찬찬히 키워가시면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국정원 못지않게 될 겁니다. 몇몇 부분에선 오히려 뛰어날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