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31)

혼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뒤이어서 연타가 날아왔다.

“숙련된 정보원이 필요하다면 굳이 제가 아니어도... 애초에 신교 요원들 수준은 국정원보다 훨씬 뛰어날 텐데요?”

“아니, 저한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다른 국정원 요원은 필요 없습니다.”

“남색에 취미는 없는데 말이지요.”

김무공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도는 절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인재’로서 당신을 영입하고자 하는 겁니다.”

“하하하....”

박수호가 허탈하게 웃어댔다.

김무공을 파악하러 왔다가 외려 혼란스러움만 더해졌다.

오늘 처음 본 국정원 일개 요원에게 수백억을 약속하며 영입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아마도 광인狂人이거나 타고난 승부사이리라.

어느 쪽일까.

김무공의 칠흑 같은 눈동자 너머에 뭐가 도사리고 있는지, 박수호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다른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해주시면 됩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박수호를 일깨웠다. 한숨을 푹 내쉰 박수호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제 직업이 좋습니다. 비록 힘들고, 돈은 못 벌지만. 국가와 국민을 위해,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아무래도 제 천직인가 봅니다.”

“그건 신교에서도 가능합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무림 집단을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교라 하여도 마찬가집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습니까.”

틱.

박수호가 태블릿을 꺼버렸다.

더 말해봐야 김무공은 계속 영입을 시도할 테고, 자신은 거부하는 것만 반복될 테니.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조사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요.”

“제안은 언제든지 유효합니다.”

문을 나가기 직전, 박수호의 등 뒤로 김무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무거운 음색으로 박수호가 답했다.

쿵-

“팀장님? 벌써 끝나셨습니까?”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팀원이 다급히 달려왔다.

“그러게 말이다. 너 갑자기 수백억짜리 로또에 당첨된다면, 계속 일할 거냐?”

“예?”

팀원이 멍하니 고개를 갸웃했다. 박수호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 건 처음이었다.

“나 진지하게 묻는 건데.”

“에이, 농담도 참. 수백억짜리면 당장이라도 일 때려치고 놀아야지요. 뭐하러 목숨 걸고 이 고생합니까?”

“그러냐.”

“설마, 팀장님은 계속 일 하시게요?”

“어. 난 계속하련다.”

박수호가 무심코 품 안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이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건 팀장님이 수백억이 없어서 그런 거죠. 막상 수백억 생기면 당장 일 때려치고, 뭐 하고 놀지만 하루 종일 고민할걸요?”

남의 속도 모르고, 수하 팀원은 박수호를 박박 긁어댔다.

박수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이게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겠지.

박수호가 지키고자 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은 대개 이럴 거다.

적어도 국가 기관은 감시와 견제가 어느 정도 이뤄진다.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던 국정원조차, 지금은 많은 제약이 생겨났다.

실제 조직도상에서는 독립된 부서인 무림감찰부가 국정원 산하로 들어간 이유도 견제와 감시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림 집단은 아니었다.

극소수의 명령에 따라 너무 많은 것들이 쉬이 바뀐다. 독재 국가나 다름없다. 실지로 어지간한 국가보다 더한 힘을 가진 무림 집단도 한둘이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를 등불로 삼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추구하는 박수호와.

그냥, 태생부터 맞지 않는 거다.

‘나야말로 광인狂人일지도 모르겠군.’

불현듯 든 생각에 박수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안전한 삶과 수백억을 마다하고 위험한 현장과 박봉 신세를 택했다면, 누구나 미친놈이라고 할 테니 말이다.

“팀장님?”

갑자기 피식 웃는 박수호를 보며 팀원이 말을 걸었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박수호의 상태는 명백히 이상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국밥 괜찮냐?”

박수호가 손을 탁탁 털고는 앞장섰다. 팀원이 머리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싫은데요.”

“이미 정했다.”

“아씨, 제가 수백억 생기면 팀장님 입맛부터 개조시킬 겁니다. 자유민주주의 그리 좋아하시는 분이 왜 밥 메뉴는 만날 독재입니까. 활동비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네가 먹는 모든 게 국민의 세금이니라. 네 입맛대로 갔다간 예산 낭비가 끝이 없을 터. 나로서는 어쩔 수 없구나.”

“그런 얘기를 무림인 같은 말투로 해 봐야 하나도 위엄 없습니다.”

“됐다. 가자.”

“에휴....”

한숨을 푹 내쉬는 팀원 너머.

김무공의 병실 쪽을 박수호는 힐긋 쳐다봤다.

고작 스무 살짜리 어린놈에게 된통 당했다.

박수호는 속으로 김무공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김무공. 평가 결과. 불명不明. 위험등급 최상最上.’

물론.

개인적인 부분이 아주 많이 들어간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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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오늘따라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아카데미는 일주일간 휴교를 선언했고, 내 퇴원도 이제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실은 진작 뛰쳐나가도 됐지만, 상황을 좀 더 정리해볼 필요가 있었다. 시신이 확인된 혈교 무인의 수도 어마어마했고, 이들을 분류하는 작업도 끝나갔다.

취합된 정보들을 체크하면서 키보드를 놀리던 중, 한여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오키.]

투입된 혈교 무인의 면면을 보니, 아무리 혈교라 해도 이번에는 타격이 극심했을 거다. 당장 사망이 확인된 화경의 무인만 몇인지. 삼사도는 내가 격살했고, 사사도는 독고패 총장의 분노에 시신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사망.

성남에서도 육사도, 구사도, 십사도, 십일사도가 사망한 게 확인됐다.

팔사도, 낭왕은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팔이 잘린 것까진 나왔으니. 아마 당분간은 제대로 활동이 불가능할 거다.

멀쩡한 자라고는 모습도 비치지 않은 일사도와 이사도, 그리고 칠사도와 십이사도뿐이다.

혈교 대외 활동의 핵심이 사도들을 주축으로 하는 유기적인 움직임이라는 걸 고려하면, 사실상 손발이 잘린 수준이었다. 고작 단 한 번의 실패로.

‘혁리악이 미쳐 날뛰겠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벌써부터 일을 벌였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전력을 회복하느라 정신없을 거다. 사도들이 이끌고 온 전력만 해도 꽤 정예였으니까.

“나 왔어.”

“감사감사.”

한여름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고 쭈욱 들이켰다.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박수호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돈보다 강한 신념. 있다고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영입하는 데 성공했으면, 최고의 참모 하나를 얻게 되는 거였는데 말이다.

‘그랬군.’

애초에 박수호가 무림말살지계를 시행한 것이 단순 분노 때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림 집단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으니.

하긴, 내가 봐도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폭력배와 무림 집단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국가에 충성하는 자는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기도 했다. 국가란 본디 폭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으, 뭐야 이거? 커피 마시면서 볼 건 아닌 거 같은데.”

한여름이 내 노트북 화면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기겁하면서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게 말이다. 죽은 혈교 애들이긴 한데....”

나는 다시 한번 커피를 들이켰다. 한여름의 말대로 커피 마시면서 볼 건 아니긴 했다.

화면에는 혈교 무인들의 시신 사진이 가득했다. 당연히 온전한 시신보다는 온전하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았다.

“성남 쪽도 장난 아니었나 보네.”

다시 고개를 빼꼼 내민 한여름이 내 노트북을 쳐다봤다.

“사도 넷이 투입됐으니까. 독고패 총장이랑 전신대가 확실히 일 처리는 깔끔해. 전부 죽였더라.”

“이러면 더 음지로 숨어드는 거 아냐?”

“이번에 사도들 피해가 워낙 커서 괜찮아. 팔다리 전부 잘라놓고 혁리세가를 쳐야지.”

“본가가 지금은 대만에 있었던가?”

“대만 정부랑 사실상 한 몸이지. 그것 때문에 쉽게 못 건드렸던 거고.”

한국무림보단 훨씬 못했지만, 대만 역시 중국 붕괴의 수혜를 제대로 입은 국가 중 하나였다. 대륙으로부터 온갖 종류의 무인들이 몰려들었으니까.

혁리세가는 그런 대만을 암중에서 장악하고, 마침내 대만 정부 수반까지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렸다.

신교가 아무리 강대하다 하나, 당장은 혁리세가 본가를 쉽게 건들지 못하는 이유도 그에 있었다.

혁리세가 본가를 치려면 대만 정부와 싸울 각오를 해야 했으니까.

대만에서 힘을 키워 기반을 한국으로 서서히 옮기고, 결국 혈교 혈사를 일으키게 되나.

현시점에서는 대만에 웅크리고 있었다.

지금 혈교의 활동이 혈마궁과 사대마전이 아닌 사도들이 주축인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뭔가, 새삼스레 느끼는 건데 말야.”

한여름이 내 병상에 걸터앉아 입술을 달싹였다.

“음?”

“우리 많이 컸구나 해서. 원래는 살아남기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러게 말이다. 운이 좋았지.”

만일 신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작은 스케일에서 놀 수밖에 없었으리라.

쾅-

갑자기 거세게 문이 열렸다.

“대장! 어? 신녀님?”

적하가 다급히 들어오다 한여름을 보고 몸이 굳어버렸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타박했다.

“넌 노크 좀 하고 다녀라.”

“죄송합니다아....”

“죄송할 건 없고, 앞으로 주의 좀 해.”

“옙.”

“그래서, 뭔 일인데?”

“이거. 방금 나왔어요.”

가슴에 꼭 안고 있던 태블릿 화면을 적하가 내밀었다. 그걸 본 한여름이 고개를 살짝 돌리고 쿡쿡 웃기 시작했다.

“너 웃지 마라.”

“풋...!”

싸늘하게 말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눈가에 작은 눈물까지 맺혔다. 한참을 배를 잡고 웃던 한여름이 눈가를 한번 비비고는 입꼬리를 살살 올렸다.

“이야, 우리 무공이. 딱 어울리는 별호 하나 얻었네.”

“너도 만만치 않거든. 빙봉이 뭐냐 빙봉이.”

“난 만족하는데? 그리고 빙봉이 아니라 빙백봉이지.”

한여름의 표정이 상당히 얄밉다.

“대장?”

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내 반응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적하가 내민 태블릿에는, 무신제 결과에 대한 발표가 나와 있었다. 습격 사건 때문에 늦춰졌던 무신제 결과가 이제야 나온 모양이다.

우승은 당연히 나였다.

우승도 우승이지만 무신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아카데미의 이름으로 별호를 수여하는 것에 있었다.

대충 무신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이하 후기지수들에게 용봉의 별호를 하사한다- 이런 느낌이다.

요약하면.

『흑룡黑龍 김무공

천룡天龍 김용

창천검룡蒼天劍龍 남궁철

벽력도룡霹靂刀龍 팽호영

철룡鐵龍 아레스

빙백봉氷白鳳 한여름

검봉劍鳳 서문예린

혈봉血鳳 홍은주

적봉赤鳳 적하

난화봉亂花鳳 위지연

성광검봉聖光劍鳳 앨리스

독봉毒鳳 당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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