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31)

이렇게 이번 세대의 용봉이 결정되는 식이었다. 적하 본인도 들어가 있는 탓에 신나서 온 모양인데....

흑룡이라니. 원래라면 김용이 가져갔어야 할 별호가 내게 와버렸다.

“하필 흑룡이냐.”

“전 흑룡 멋있어서 좋은데요.”

적하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다. 그걸 듣고는 한여름이 또 입가를 가리고 웃어댔다.

[이거 업보 아냐? 그렇게 중2검제 중2검제 놀리더니. 마왕에 이어 흑룡이라.]

웃느라 말도 하기 힘든지 채팅이 날아왔다.

[한여름 씨? 조용히 하세요.]

[웃기잖아. 업보란 게 있구나. 그래도 흑염룡은 아니잖아?]

[흑염룡이었으면 당장 학사 쳐들어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김용이랑 별호 바꾸자 할까? 천룡이 훨씬 나아 보이는데.”

“걔는 흑룡 더 좋아할 거 같긴 해. 아마 지금 주먹을 불끈 쥐고 있지 않을까. 내 흑룡이! 이러면서.”

“넌 적봉이라 좋겠다. 깔끔하고 이쁘네.”

“헤헤. 맘에 들어요.”

적하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 너라도 좋으면 됐다.

“알려줘서 고맙다.”

“뭘요. 근데 당소소가 들어가 있는 건 좀 의외네요.”

“원래 우승자랑 싸워서 먼저 떨어진 놈에게는 일종의 가산점이 붙거든.”

“우승자랑 싸웠도르 이런 건가요?”

“어. 근데 인터넷 적당히 해라. 싸웠도르가 뭐냐 싸웠도르가.”

“수련 끝나고 심심하잖아요. 대장이 놀아줄 것도 아닌데.”

“난 바쁘잖냐. 글고 보니 너 여름이랑 할 얘기 있지 않았나?”

흠칫. 적하가 한여름을 쳐다보며 몸을 떨었다.

“그러네. 할 얘기가 있었지 참. 잘 왔어.”

천천히 한여름이 몸을 일으켰다. 적하가 마치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잔뜩 움츠렸다.

“우린 여자의 대화를 좀 나누고 올게. 잘 쉬어.”

“어. 그래.”

나는 떨떠름하게 한여름이 적하를 끌고 나가는 걸 쳐다봤다. 이윽고 병실 내부에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고독을 즐기며 다시 키보드를 두들기던 중, 미세한 기척이 감지됐다. 천마신공의 공능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했다.

“오셨습니까.”

나는 느긋하게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며 인사했다. 이윽고 바람 한 줄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천마현세天魔現世.”

유부幽府에서부터 울리는듯한 음산한 저음이 정적을 깼다. 갑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복장을 착용한 사내가 나타났다.

“만마앙복萬魔仰伏.”

나는 노트북을 덮고, 정중하게 포권했다.

천마신교 내당 유령단幽靈團.

암살을 비롯하여 온갖 은밀한 일들을 처리하는 신교의 핵심 조직 중 하나였다.

내 눈앞에 있는 자도, 살왕殺王이라 불리며 음지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저번 적룡대 임무 이후 유령단과의 교류가 꽤 늘어서 어쩌다 보니 단주와도 안면을 트게 됐다.

물론, 단주가 직접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지만.

“이공자.”

유령단주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예.”

“좌에 오르고자 하나?”

“그 좌가 천마신교 유일 지배자의 위치라면, 아닙니다. 그건 천하연 소교주가 마땅히 가져가야 하지요.”

“....”

그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아마도 신교 내부에 벌써 파벌이 생긴 모양이었다. 소위 말하는 역배를 노리는 자들. 물론 난 그들의 의도대로 놀아나 줄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추구하는 건 전혀 다른 쪽이었다.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은 교주위는 방해만 될 뿐이다.

유령단주가 어떤 쪽인지는 모르겠다. 살왕이라 불리는 무인답게 겉모습만 보고선 감정 파악이 아예 불가능했다.

“...이공자의 요청은 뜻대로 처리될 것이다.”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왔던 것처럼, 유령단주의 모습이 스윽 사라졌다. 언제 봐도 신기한 무공이었다.

미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박수호 영입은 실패했다.

아마 당분간은 쉽지 않을 거다.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고.

다만, 몰랐다면 모를까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아버린 이상 마냥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여름의 말대로 내가 신교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일개 야인이었던 때와 차원이 다른 규모의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기억하는 미래의 정보를 토대로, 뛰어난 인재들을 감시하고 보호하며, 가능하면 영입하는 것.

박수호는,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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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내가 가볍게 날린 지풍이 적하의 이마를 강타했다.

“아얏!”

적하가 이마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여기 머무는 김에 적룡대 수련을 계속 도와주고 있었고, 당연히 적하는 그 대상 중 하나에 포함됐다.

문제는.

애가 좀 이상하다. 나를 보며 의미 모를 한숨을 푸욱 내쉬질 않나. 슬금슬금 다가오다 홱 도망가질 않나.

한여름과 대화 때문인가 싶었는데, 막상 떠올려 보면 그건 아닌듯했다. 어제저녁부터 갑자기 맹한 상태였으니까.

“방금은 막으라고 날린 건데. 너 뭔 일 있냐? 왜 집중을 못 해.”

나는 주저앉은 적하의 앞까지 다가갔다. 양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적하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주홍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게 말이지요.”

말을 하다 말고 적하가 손가락으로 애꿎은 연무장만 푹푹 찔러댄다. 단단한 돌바닥에 구멍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평소에는 후진 없이 돌진만 하던 애가 왜 그래. 안 어울리게.”

“저 대장.”

“왜.”

“저랑 같이 어디 좀 가실래요?”

“나랑?”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야 할 거 같아요.”

탁탁. 적하가 다시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었다. 아까보단 상태가 괜찮아진 느낌이다.

“둘이서만?”

“네. 둘이서만.”

“....”

의심의 눈초리로 대해봤지만, 적하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언제?”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산 좀 타도 상관없어요?”

“상관없다만. 어디 가게?”

“춘천, 삼악산이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춘천이면 여기서 그리 멀진 않았다. 지금 출발하면 당일치기로도 다녀올 수 있을 만한 거리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바로 가자. 준비해.”

수하의 멘탈 케어는 상관의 역할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하루 정도야 충분히 투자해줄 수 있다. 딱 봐도 뭔가 일이 있어 보이니까.

“네.”

적하가 선선한 미소와 함께 뒤돌아섰다.

***

삼악산三岳山,

산 이름에 ‘악岳’자가 붙은 것들은 대부분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악산도 예외는 아니라, 깎아지른 높은 기암절벽과 폭포로 유명하다고 한다. 게이트 사태로 인해 많은 산이 출입금지로 바뀌었지만, 삼악산 쪽은 일반인도 들어갈 수 있는 안전 구역에 속했다.

“근데 말이다.”

나는 입안 가득 도시락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는 적하를 보며 말했다. 볼이 빵빵한 게 꼭 다람쥐 같다.

“으예?”

“먹고 말해라.”

“움.”

꿀꺽. 크게 한 입 삼킨 적하가 물까지 시원하게 들이켜고 나를 쳐다봤다.

“굳이 기차를 타고 갈 이유가 있냐?”

우리는 지금 기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적하가 바득바득 그러고 싶다며 부탁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창밖으로 스치는 경춘선의 풍경을 보는 것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지만. 뭘 숨기고 있는 건지 얜 아직도 말을 안 했다.

그냥 가 보면 안다는 소리만 반복할 뿐.

“대장은 뭐 안 드세요?”

머리카락을 붙잡고 꼼지락거리면서 적하가 시선을 피했다.

“말 돌리지 말고.”

“그냥요.”

“그냥?”

“...여자의 비밀을 자꾸 캐려는 건 못된 습관이에요.”

“네가 비밀도 있었냐?”

“있거든요.”

“으이구.”

나는 적하의 머리통을 붙잡고 주물럭거렸다. 적하가 몸을 움츠리면서 엄살을 피웠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적하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창밖을 바라봤다. 다행히 산을 타기 딱 좋게,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드실래요?”

적하가 작은 푸딩 하나를 내게 건넸다.

“어.”

한 입 거리의 작은 크기. 사이좋게 푸딩을 까먹고 있으니, 모양새가 자못 우습다. 그래도 적절한 수준의 단맛이 내 취향이었다.

어느덧 기차가 멈추고, 목적지인 강촌역에 도착했다.

“가요.”

적하가 내 손을 붙들고 능숙하게 앞장섰다. 한두 번 와본 게 아니라는 듯. 버스까지 갈아타면서 우리는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안내 표지판을 보니 주요 봉우리가 용화봉, 등선봉, 청운봉 세 개라 삼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보다.

경공을 써서 달려도 됐지만, 적하는 굳이 그럴 생각이 없는지 천천히 걸었다. 나는 적하의 옆에 서서 느긋하게 보폭을 맞춰 걸었다.

“이국적이지 않아요?”

“그러게.”

뒤쪽으로 너른 북한강이 보이고, 앞으로는 기암괴석과 단풍에 물든 산의 모습이 사뭇 기이했다. 이름부터 등선봉이었으니. 어느 도인이 수련하다 등선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다. 옆에서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등선폭포라 했던가. 험한 산세에 걸맞게 이곳저곳에 폭포가 있었다.

“사천에 도강언이라고 아세요?”

“중국 사천?”

“예.”

“삼국지에 나온 거기 아냐?”

제갈량이 대대적으로 보수했다는 시설의 이름이 분명 도강언이었다.

“맞아요. 우리 사부가 맨날 얘기했거든요. 아참, 도강언은 민강岷江에 설치된 제방 이름이에요. 엄청 오래됐다나.”

“알지.”

“민강 바로 옆에 청성산이 있대요. 저도 잘 모르지만요.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들었어요.”

“청성 얘기?”

“네. 청성천하유靑城天下幽. 사시사철 푸른 청성산의 모습이라든지, 산에서 내려다봤을 때 고요히 흐르는 민강의 풍경이라든지.”

“...사부께서 사천 출신이었나?”

적하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사천은 가 본 적도 없대요.”

“그랬겠지.”

사천은 게이트 사태로 인해 중국에서 가장 빠르게 붕괴한 지역 중 하나였다. 폐쇄적인 지형으로 인해 유독 피해가 컸다 들었다.

“웃기지 않아요? 지금은 마물 천지가 되어버린, 가 본 적도 없는 장소를 그리워한다는 게. 사부도 그저 당신의 사부에게 들었을 뿐인데. 청성 문인들에게는 그게 한이 되어버린 모양이지요.”

묘하게 어두운 얘기였다. 수하로 뽑긴 했지만, 적하가 무슨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른다. 게임 내였다면 그저 몇 줄 글귀로 처리되는 부분들이었겠지. 나는 묵묵히 적하의 말을 들었다.

“사부는 그런 게 싫었나 봐요. 불가능한 목표에 언제까지고 매달리는 행위가. 뛰어난 무학을 지니고도, 한없이 불가능하면서도 의미 없는 목표를 추구한 순간 몰락은 예정되어 있었던 거지요. 사부는 본인 대에서 청성의 문을 닫을 예정이셨나 봐요. 아마 지친 거겠죠.”

미래에 청성의 이름이 사라진 이유. 적하가 지금 말하는 것들은 시나리오 바깥에 해당할 거다.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은, 설정에도 없는 얘기들.

“그렇게 사부가 침식 지대를 전전하던 중, 게이트 사태로 부모를 잃은 저를 발견한 거지요. 저야 기억에도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지만요. 이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죠.”

“....”

“얼떨결에 저를 거뒀지만, 평생 무도만 수련한 노인이 뭘 알았겠어요. 본인이 겪은 대로, 당신의 사부가 자신에게 했던 대로. 기억을 되살려가며 저를 키운 거지요.”

적하가 나를 한 번 물끄러미 보더니 피식 웃었다.

“우울해지라고 한 얘기 아닌데.”

“딱히 우울한 건 아니다만.”

“분위기가 그렇잖아요, 분위기가. 아무튼.”

재잘재잘 촉새처럼 적하가 말을 이어나갔다.

“구름은 대개 어렴풋이라도 형태가 있지만, 노을은 형태가 없잖아요?”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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