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31)

“그래서 적하赤霞. 사부는 제가 사문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길 바라셨어요. 형태가 없는 노을처럼요. 도사가 되길 원하지도, 청성의 무거운 업을 물려받길 원하지도 않으셨지요.”

그래서 도사가 아니라 했던 건가. 이제야 적하가 했던 말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심심하면 사부 얘기를 꺼냈던 까닭도.

“문제는. 사부가 우연히 했던 고아 가챠에서 짜잔 하면서 나온 게, 알고 보니 SSR 등급이었던 거지요. 어깨너머로 몇 번 봤던 상승무공을 따라 해버릴 만큼. 원래는 무공도 가르치지 않을 생각이었다나. 너무하지 않아요?”

“너무한 건 모르겠다만. 고아 가챠가 뭐냐 고아 가챠가.”

“누가 그러던데요.”

“나쁜 말이야.”

“싸울 때는 욕도 사정없이 하는데요 뭘.”

“쓰지 마.”

“옙.”

걷다 보니 길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앞장선 적하가 묵묵히 가는 걸 보니, 애초에 목적지가 일반적인 등산로는 아닌듯했다. 평범한 사람은 오가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길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평지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숲을 한참 뚫고 가다 보니 탁 트인 장소가 나왔다. 적하의 발걸음이 돌탑 앞에 멈췄다. 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적하가 예를 올렸다. 나도 그 옆에서 정중하게 따라 했다.

“오늘, 사부 기일이었거든요. 시신은 화장했어요. 사부는 도사였는데도 그러길 원하시더라고요. 사부는 여기를 좋아하셨거든요. 입버릇처럼 죽으면 화장해서 여기에 뿌려달라 하셨어요.”

아까부터 짐작은 했었다. 사부 얘기를 계속 꺼내는 것도 그렇고, 어제부터 맹한 상태도 그렇고.

시원한 풍경 덕에, 아래로는 북한강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햇볕도 잘 드는 게, 묫자리로는 꽤 훌륭했다.

“명당이네.”

“그렇지요? 아마도 사부 상상 속에서는, 청성에서 내려다보는 민강의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돌탑을 등지고, 우리는 사이좋게 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적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가 제 시작이었으니까.”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적하가 내 쪽으로 머리를 기댔다. 시작. 부모와 같던 사부를 여의고 홀로 돌탑을 쌓았을 적하의 심정이 어땠을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감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왜 함께 오길 원했는지, 궁금하셨죠?”

“사부 기일 때문이면 미리 말하지. 다 같이 오면 더 좋잖아.”

대충 의문은 풀렸다. 적하에게 있어서 사부의 기일에 같이 올 사람이라 해봐야, 몇이나 되겠는가. 적룡대나 내가 전부겠지.

“아뇨.”

적하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제 시작이 여기였듯이. 저는, 대장이 제 끝이었으면 해요. 그러니까, 단둘이어야만 했어요.”

평소 적하가 입버릇처럼 하던 소리와 비슷했지만.

장소가 장소라 그런지 저 말이 가진 무게감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

조금은 복잡한 심경에 나는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내려앉은 붉은 노을이, 서서히 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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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붉어진 노을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낮 동안 데워졌던 공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으면서 부는 산바람이 꽤 쌀쌀하다.

“내려가요.”

내 어깨에 한참을 기대고 있던 적하가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춥진 않냐? 생각보다 늦었네.”

적하는 산행에 어울리지 않는, 여름에나 입을법한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추워요. 그러니까.”

“응?”

“손잡아줘요.”

“안 춥네.”

“춥거든요. 제가 대장처럼 한서불침은 아니잖아요.”

“내공 돌려.”

절정 고수 정도 되면 당연히 내공의 힘으로 추위와 더위 정도는 가볍게 해결 가능했다. 하물며 겨울도 아니고, 고작 가을 산바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싫어요.”

적하가 내 손을 꼭 잡아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큼은 장단에 맞춰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좋네요.”

“뭐가?”

“대장 손. 따뜻해서 좋아요.”

“태양지체라. 겨울에도 뜨끈해.”

“오... 인간 난로라니. 대장 옆에 있으면 얼어 죽을 걱정은 없겠네요.”

“앞 조심해라.”

“옙.”

안 그래도 좁은 산길을 손까지 잡고 걸어가려니 계속해서 발걸음이 늦춰졌다. 빨리 가려면 당연히 갈 수 있겠으나, 애초에 적하는 그럴 생각이 단 하나도 없어 보였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불빛 하나 없는 산야에는 이름 모를 산새 소리만 요란했다.

“제대로 가는 거 맞냐? 아까랑 길이 좀 다른데.”

“맞아요.”

칠흑 같은 산길이었지만, 나나 적하나 그런 것에 구애받진 않았다. 문제는 지금 적하가 가는 길이 분명 아까와 다르다는 점이었다. 저렇게 단호히 답한 걸 보면 맞긴 맞을 텐데, 일말의 의심이 싹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아까 말 말이다.”

저벅. 적하가 오도카니 서서 내 쪽을 올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적하의 주홍빛 눈만 반짝였다.

“왜요?”

“그런 말 하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 해서. 아직 살 날이 창창한데. 꼭 청혼 멘트 같잖냐.”

“대장, 그거 알아요?”

“뭔데.”

“가끔 보면 대장 너무 애늙은이 꼰대 같아.”

“뭐?”

“그렇잖아요. 배려심이 많은 건 알겠는데, 너무 과해요. 쓸데없는 잡생각도 많고. 천재들 특징인가? 스무 살 같지가 않잖아요.”

숨결 닿는 거리에서 적하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꾸욱 눌렀다.

“가끔은 여기로 생각도 좀 해요.”

“그러고 싶다만.”

타고난 성격이라 그러는 게 쉽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게임 플레이조차 그런 식이었겠는가. 나는 변수를 차단하고 안전한 방향을 택하는 쪽이지, 한여름처럼 일단 가슴으로 들이박고 보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적하의 지적대로 난 마냥 스무 살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실제 나이 따지면 조금이나마 나이를 더 먹긴 했다. 그래 봐야 애와 애어른 정도의 차이겠지만, 대학생도 신입생과 3학년은 조금 다른 느낌 아니겠는가.

“그리고.”

적하가 여우같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까치발을 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청혼 맞아요.”

“요 녀석이.”

손바닥을 들어 적하의 머리를 한번 주물렀다.

“진짠데.”

적하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샐쭉거렸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좋지. 근데 지금 가는 길도 마음대로 아니지? 여기 길 맞긴 해?”

아무리 봐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길이다. 밤이라 해서 못 알아볼 리가.

흠칫. 적하가 한번 몸을 떨었다.

“너 길 잃었냐?”

“아닌데요.”

당당하게 나를 바라보는 적하의 눈동자.

똘망똘망한 눈빛이 딱히 거짓을 말하는 거 같진 않았다. 기감을 넓혀 살펴봐도, 밤이니 당연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물이나 벌레 따위의 작은 기척들로만 가득할 뿐.

“진짜 아냐?”

“제가 밤이고 낮이고 이 산을 얼마나 타고 다녔는데요. 샛길 하나하나까지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어요. 사부님 계시는 곳인데 그것도 모르겠어요?”

“그럼 가자. 늦었다.”

저렇게 말하니 태클 거는 것 자체가 탈룰라처럼 느껴져서 할 말이 없었다.

“네. 얼른 가요.”

적하가 발랄한 어조로 답했다.

***

“뭐? 얼른 가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뱉었다.

“아차. 막차를 놓치고야 말았네요. 이거 어쩌죠?”

적하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배배 꼬아댔다. 거의 국어책 읽는듯한 말투였다. 저걸 지금 연기라고 하는 건지 원.

“어쩐지 비슷한 장소를 도는 것 같더니.”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고 하는 거지요.”

“실수 맞아?”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무튼, 막차는 끊겨버렸네요.”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면서, 별생각 없이 적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시간이 한참 지체되어버렸다. 결국, 역에 도착했을 때는 막차 시간이 지나버렸다. 경춘선 탈 일이 없었던지라 막차 시간 같은 걸 미리 알아보지 않았던 내 패착이었다.

“택시 같은 거라도 탈까? 아니면 근처 신교 지부에 연락이라도 해야 하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적하가 양팔을 뒤로 모아 깍지끼고, 턱짓으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건물을 가리켰다.

“진심이냐?”

“진심인데요.”

당당하게 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물이란, 여기에도 존재하는 모텔을 뜻했다. 관광지답게 모텔들이 모여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자고 가자고?”

“하룻밤 정도야, 괜찮지 않아요?”

묘한 눈웃음. 입가를 살짝 가리며 하는 말에 들뜬 기색이 완연했다.

“모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저는 궁금해요. 한 번도 안 가봤거든요. 근처에 호텔도 없잖아요. 가요.”

적하가 내 팔을 붙들고 모텔로 끌고 갔다.

“잠시, 류은채한테 연락 좀 보내고.”

“아, 굳이 안 보내도 상관없어요.”

“뭐?”

“오늘 둘 다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놨거든요. 안 들어가면 그냥 그런가보다- 할 거예요.”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이 계획된 거다?

저 순진무구한 얼굴로 내 뒤통수를 칠 줄이야.

심지어 사부의 기일을 명분으로.

순진한 건 나였다. 기차 여행에 낭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하는 생각에 수락한 거였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다.

그렇게.

단둘이 모텔 방까지 잡고 들어와 버렸다.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이 세계에 와서, 지금껏 지냈던 곳들이 너무 초월적이라 그렇지.

둘이 자기엔 충분했다.

침대가 하나인 걸 빼면 말이다.

“이런 곳이구나.”

적하가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작은 냉장고를 열더니, 무언가 발견한 듯 손을 쭉 뻗었다.

“마실 거 있는데 드실래요?”

“어. 하나 줘.”

제주 감귤이라 적힌 작은 캔을 건네받았다.

우리는 사이좋게 침대에 걸터앉아 음료를 들이켰다.

“침대, 하나네요.”

“모텔은 대부분 그렇지.”

“대장은 와 봤어요?”

“많이는 아니고 몇 번.”

“확실히, 대장은 경험 많으니까. 호텔이랑 비교하면 그래도 많이 부족하긴 하네요.”

“다 돈이 말하는 거지. 그리고 나도 경험 얼마 없다.”

“음. 제 첫경험 장소로는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는 없지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니.”

“...뭐?”

“네?”

되려 적하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방금.”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한 거 아녜요? 설마 손만 잡고 잘 생각이었어요?”

“손도 안 잡고 잘 생각이었다만.”

“에이, 거짓말. 전 대장이 이미 알고 따라온 줄 알았는데요.”

나는 눈가를 한번 쓸어내렸다. 설마설마했건만, 진짜 목적이 그쪽이었나.

“아니, 설마 했지.”

“짜잔. 그 설마가 진짜였네요. 허락도 받았겠다, 거리낄 게 없지요.”

“...허락받았어?”

“예. 머리 몇 대 쥐어박히고 받았어요. 그 정도면 싼 대가지요. 글고 소교주님은 쿨하게 고개만 끄덕이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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