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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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은 김에 혼자 보기 아까워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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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순간,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여름에게는 말 안 했는데. 적하랑 있는 걸 얘기해도 되나? 아니, 얘기를 안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왜 미리 말을 안 했을까. 실수했다. 류은채에게 연락할 게 아니라 한여름에게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다급히 다른 메시지도 확인했다. 다행히, 연락은 한 통에 그쳤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한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정면돌파뿐이다.
[적하랑 같이 있어. 춘천 쪽....]
[뭐?]
1초 만에 답변이 왔다.
[그게 말이다.]
[했구나.]
[어....]
[야!!!!!!]
[아니, 미안하다. 어쩌다 보니 말이다.]
[농담이야.]
[...?]
[솔직히 빡치긴 해도. 내가 허락한 거니까.]
[알고 있었어?]
[그럼 몰랐을까? 연락 안 한 게 좀 괘씸하긴 한데. 원래 남자 놈들이 그렇지 뭐. 머리에 피 쏠리면 직진밖에 모르잖아.]
[정확하네.]
[우리 무공이 내가 하루 이틀 봤을까. 막상 이성적인 척은 다 하면서 결정적일 때는 매번 이러잖아.]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누구랑 일일이 잤다까지는 보고할 필요 없는데. 그래도 어디 가는지는 알려줘. 혹시 무슨 일 생길 수 있으니까.]
[응.]
[...적하 잘 챙겨 주고. 따지고 보면 우리랑 비슷한 신세잖아.]
하여간, 얘도 속이 너무 여리다. 본인 속도 썩어 문드러질 텐데, 적하 걱정부터 하는 걸 보면. 괜히 마음 한편이 저렸다. 이놈의 양심출타 특성. 아무리 봐도 특성 이름 바꿔야 한다. 전혀 효과가 없잖아. 나는 심신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도 그렇네.]
적하를 볼 때마다 괜히 마음이 가는 이유가 있었다.
적룡대 다른 대원들이 다들 어디 가문, 어디 장로 등.
휘황찬란한 뒷배를 자랑하는 것에 비해, 적하만큼은 천애고아 신세였으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밝기만 했지만, 그런 것 자체가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로 인해 형성된 성격일 수도 있었다.
나나 한여름이야 서로 의지하면서 지내는 거라도 가능했지, 적하는 홀로 이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버텨야 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훨씬 힘든 조건이었다.
“왜 또 혼자 궁상떨고 있어요?”
어느새 샤워를 마친 적하가 머리를 탈탈 털면서 다가왔다. 출렁이는 가슴이 시선을 자극하면서, 진한 샴푸향이 코끝을 스쳤다. 어제 워낙 격하게 해서 그런지, 이제 알몸을 보이는 것 정도야 그리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연락 좀 했어.”
“누구랑요?”
“한여름.”
“헉.”
적하가 과장되게 뒷걸음질 쳤다.
“괜찮아. 알고 있더라.”
“...그랬군요.”
“다 씻었어?”
“네. 씻으시게요?”
우드둑. 온몸을 한번 꺾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야지. 슬슬 가야 하니.”
“아쉽네요.”
“오늘만 날은 아니잖냐.”
내 말에 적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요?”
“그럼 내가, 처녀 가져갔으니 넌 필요 없어 이럴까?”
“하긴, 괜한 걱정이었네요. 저....”
적하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망설였다.
“왜?”
“...효과는 있었어요?”
“충분히. 고맙다.”
“다행이네요.”
싱긋 웃고는 적하가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씻고 올 테니 준비하고 있어.”
“넵.”
***
욕실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적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온종일 껴안고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
허나, 그래선 안 된다. 여유를 부리기엔, 둘 모두에게 놓인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시한부를 해소하기 위해 끝없이 달려야 하는 그와 아무 기반도 없이 자립해야 하는 자신.
오늘 같은 순간이 그리 자주 오지는 않으리라.
그래도 시한부만 벗어난다면, 분명 기회는 또 올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년에 또다시 사부의 앞에 함께 설 수 있겠지.
적하는 머리를 내공으로 한 번 더 말리고는, 단정하게 옆으로 묶어 넘겼다. 저번보다 확실히 길어졌다. 김무공의 취향이 아무리 봐도 장발임이 확실했기에, 적하는 계속해서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번거롭네.’
머리가 길어진 건 좋은데, 관리하는 게 너무 힘들다. 조금만 신경 안 쓰면 끝부분이 죄다 갈라져서 난리가 나질 않나, 수련이나 비무 때도 신경 써야 하고, 꾸준히 머릿결에 좋은 제품을 발라주지 않으면 바로 개털 되기 일쑤였다.
‘맞겠지?’
가벼운 화장까지 마친 적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막상 직접 들은 적은 없으니까. 적하는 작은 결심을 마치고, 샤워를 마친 김무공을 쳐다봤다.
“저, 대장.”
“왜?”
“저 단발 하면 어떨까요?”
“...단발?”
김무공이 살짝 망설였다.
이 순간, 적하는 확신했다. 김무공은 단발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녜요.”
“단발도 예쁠 거 같긴 한데.”
“아아, 됐어요. 대장의 취향, 확실히 파악했답니다.”
“그건 왜?”
“궁금하잖아요. 대장 주변은 죄다 머리 긴 여성들밖에 없으니까.”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그래서, 짧은 게 좋아요 긴 게 좋아요?”
“당연히 긴 게 좋지.”
“그래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적하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적하를 보며 김무공이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여심은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래 걸리는 여성의 준비에 비해, 남성 대부분의 외출 준비는 놀랍도록 간단하고 짧다. 샤워 마치고 스킨이나 로션 바른 뒤 옷 입고 끝.
심지어 아예 민얼굴로 나가는 사람도 꽤 많았다.
이 세계에 온 이후, 전자였던 김무공은 후자로 변했다.
굳이 안 발라도 됐으니까. 애초에 효과도 없다. 그 모습을 보며 적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건 사기야.”
“갑자기 왜 심통이 나셨어?”
“꺅...!”
김무공이 적하의 등 뒤에서 살짝 끌어안아 들어 올렸다.
“아니이... 아무것도 안 바르고 다니는데 왜 반질반질한 건데요.”
“태양지체 때문에 노폐물이 안 쌓여.”
“...아하.”
태양지체 얘기를 하니까 차마 더는 얘기를 꺼내기 힘들었다. 목숨을 대가로 얻은 공능이라면, 사기라 말하기 힘들었으니까.
향긋한 체향을 즐기다가, 김무공이 적하를 다시 내려놓았다.
“저 애착인형 아니거든요.”
“알아.”
“애완동물도 아니에요.”
“아는데.”
“그래도, 방금처럼 안아주는 거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
김무공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적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잔뜩 헝클었다.
“귀엽긴.”
“아앗. 머리 건드리지 마요.”
손바닥으로 머리를 문지르던 적하는, 문득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화들짝 놀랐다.
“왜?”
“잠시만요.”
눈을 반개하고 내부를 관조하던 적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저, 내공 늘었네요.”
“응?”
“이유는 모르겠는데. 늘었어요. 그것도 꽤 많이.”
어젯밤 격한 밤을 보내던 도중 무언가 맞아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영약이라도 먹은듯했다. 영약 대신 다른 걸 먹기는 했는데.
‘...이럴 수 있나?’
적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적인 사례는 절대 아니었다. 시험 삼아 썼던 방중술 효과인지.
‘그럴 리가 없는데.’
방중술은 이 정도로 드라마틱한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랬다면 죄다 익히려 들겠지. 일반적으로 무공을 증진하는 데 크게 도움은 안 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적하의 사부도 대충 폐기할 비급 꾸러미 쪽에 던져놨던 것이기도 하고. 최근까지 이어져 내려온 방중술이 거의 없는 이유기도 했다.
“방중술인가?”
“설마요. 이건 단순히 조금 늘었다 수준이 아니거든요.”
“궁합이 잘 맞았나 보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다음에 시험해 봐요.”
“지금도 상관없다만.”
“...진심이에요?”
“빨리하면 되지 않을까.”
“으으음... 하고 싶긴 한데. 일단 소화부터 해야 할 거 같아요.”
영약과 마찬가지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내공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쉽지만 지금은 접어야 할 때였다.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은 남겨두는 편이 나았다. 나중을 위한 기대감으로 작용할 테니까.
***
왔던 것처럼 기차로 서울까지 이동한 후, 류은채가 보내준 차를 타고 비밀 지부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적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기절해버렸다. 아무래도 첫경험의 여파가 뒤늦게 밀려온 모양이다.
“일어나.”
나는 부드럽게 적하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깨웠다. 적하가 나른한 하품을 내쉬었다.
“...도착했어요?”
“오냐. 도착했다. 내리자.”
차에서 내리자마자,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서 와.”
내가 오는 걸 인지하고, 한여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다녀왔어.”
“안녕하세요, 신녀님.”
적하가 내 뒤쪽에서 소심하게 인사했다. 한여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둘 다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뭘 그리 눈치를 보고 그래? 이미 끝난 얘기를 가지고. 그래서, 성과는 있었어?”
“있었지.”
“그럼 됐어. 들어와. 천하연도 기다리고 있더라.”
한여름이 홱 뒤돌아섰다. 아무래도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는듯했다. 한여름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숙소로 가는 갈림길에서, 적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몸조리 잘해. 딱 보니까 힘들어 보이는데.”
한여름이 적하의 위아래를 한번 훑더니 피식 웃었다.
“감사해요.”
“내가 더 고맙지. 덕분에 우리 무공이 수명 조금이라도 늘었겠네.”
“그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