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하가 잔잔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꾸뻑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자신의 숙소로 떠나갔다.
[고생했어. 잘 쉬고. 내년에 또 같이 사부님 뵈러 가자.]
적하에게 슬쩍 전음을 보냈다. 무겁게 보였던 발걸음이 바로 가벼워졌다.
“그래서, 누가 더 좋았어?”
한여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농담이지?”
“치. 재미없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면서, 한여름이 땅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찍었다. 나는 한여름을 조용히 품에 안고 뒷머리부터 등줄기까지 나긋하게 쓸어내렸다. 한여름의 몸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지금은 백 마디 말보다, 그저 온기를 전하는 게 필요했다.
다음화 보기
사할린 북부 바다.
오호츠크해에 속하는 이곳은 사시사철 푸르렀던 과거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검붉게 물든 바다는 지옥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인간이 버티기 힘든 독기를 뿜어냈다.
칼바람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허공.
그 가운데서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손짓했다.
검은 빛줄기 수십 개가 공중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콰과과과과광-!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일어나며 바다가 연신 갈라졌다. 파도가 해일처럼 솟아올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강기로 된 묵빛 검이 한 번에 수십 개가 쏟아지고, 또 쏟아지고를 반복했다.
그야말로 천지를 갈라버릴 것처럼, 반투명한 묵빛 검의 폭격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마침내.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다 위에는 수백 개가 넘는 강기검에 갈기갈기 찢긴 마물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천위강은 긴 숨을 내쉬었다.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전투도, 드디어 끝이 났다.
“고생하셨습니다, 교주님.”
천마신교 태상호법, 단천상이 지친 음색으로 내뱉었다.
“태상호법께서도 고생하셨소.”
“참으로 지독한 놈이군요.”
단천상이 혀를 내둘렀다.
S급 마수, 베헤모스는 지독히도 강력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강해졌으면 바로 SS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무엇보다 마기로 뒤덮인 외피가 끔찍하게 단단했다.
현경의 무인 둘이 전력을 다해 며칠 내내 두들겨야 했을 정도로.
불문에 뿌리를 둔 상고시대의 무학, 단천상이 평생에 걸쳐 수련해온 대범천신공大梵天神功은 마도와 어울리지 않게 법력 무공에 속했다.
호법이란 교를 지키는 자였고, 그건 외적의 침탈을 막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호법護法.
말 그대로 법을 수호한다는 뜻처럼.
내부의 마인들이 교법을 어기고, 교를 망가뜨리는 걸 억제하는 직책이기도 했다.
법력 무공이란 마공과 상극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으니, 단천상은 한때 마인과 마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마기와 상극이라는 얘기는, 마물에게 있어서도 치명적이라는 뜻도 됐다.
법력 무공, 대범천신공으로 마기에 균열을 내고 미리 준비한 천위강이 강력한 일격을 날려 실질적인 타격을 입힌다. 그 과정을 지금껏 계속해왔다.
어찌 보면 상성이 좋았다.
상성이 좋았음에도, 이리 고생했다.
만일 천위강과 단천상이 아니었다면, 사할린부터 홋카이도까지는 쑥대밭이 되어버렸을 거다. 이것도 최소로 잡은 거였다.
아래를 지그시 응시하던 천위강이 활짝 편 손바닥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궁-
바닷속에서 거센 물보라가 일었다. 천위강의 손바닥 움직임에 따라, 오색빛깔로 영롱하게 빛나는 동그란 구슬이 떠올랐다. 그리 크지는 않았다. 사람 머리 크기 정도.
“코어군요.”
단천상이 감탄하며 둥근 구슬을 응시했다. 코어, 흔히들 마석이라 부르는 이 돌은 보통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포했다. 하물며 S급 마물의 코어다. 현경의 무인 둘과 싸우면서 그렇게 강력한 공격들은 뿜어냈음에도, 코어에 남은 기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운이 좋았소.”
천위강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들과 싸우면서 온전한 코어를 확보하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저건 약점이기도 해서, 보통 중점적으로 노려지는 탓에 전투가 끝나면 대부분 파편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신교 과학기술부에서 좋아하겠군요.”
“흠, 이건 태상호법께 맡기겠소이다.”
“영광입니다, 교주님.”
단천상이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코어를 받아들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기술개발에 관련된 부서만큼은 단천상이 아직까지도 직접 챙겼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단천상을 보며 천위강이 입꼬리를 살살 올렸다.
“돌아갑시다.”
천위강이 뒷짐을 진 채, 공중에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수평선 너머로부터 월계수 가운데 5대륙 지도가 그려진 새하얀 마크와 UN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외벽에 박힌 항모전단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다 위쪽으로 드러난 길이만 1km가 훌쩍 넘는 거대한 크기의 마물은, 죽고 나서도 해양을 엄청나게 오염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마물들을 꾀어내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뒤처리도 꽤 중요했다.
허나, 그건 천위강의 일은 아니었다.
‘지금쯤 무신제도 끝났겠군.’
조금은 지친 얼굴로, 천위강이 바다 너머를 응시했다.
***
휴교령이 끝나기 하루 전.
[우승 축하한다. 더욱 정진하도록.]
사부에게서 짤막한 메시지가 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여간, 보면 볼수록 감정 표현이 서툰 분이다. 그냥 딱 저 나잇대 아저씨라 봐야 할지. 가만 보면 사부도 은근 귀여운 성격이다.
무신제 상황까지 확인하고 연락을 보낼 정도면, 다행히 사할린 쪽 상황도 많이 나아진 듯했다.
똑똑.
조용한 기척. 누군지는 뻔했다.
“들어와.”
“쉬고 있었나?”
천하연이 빙긋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이제 쉬려고 했지. 커피 마실래?”
끄덕.
나는 자연스럽게 천하연의 취향대로 커피를 타서 탁자에 내려놓았다. 우아한 자세로 향을 음미한 천하연이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탁. 천하연이 커피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일전에 그대가 말한 베아트리체라는 여성의 행적 말이다.”
“뭐 나온 거 있어?”
“없다고 하더구나. 신교의 정보력으로도 파악하지 못했어.”
“우리 부회장님은 그 난리가 났는데 어디서 대체 뭘 하고 다니셨을까. 아무도 모르게.”
“행적을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게 더 수상한 법이지.”
나는 동의의 고갯짓을 했다. 무신제를 관리해야 할 부회장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베아트리체가 제갈혜라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누가 봐도 수상한 움직임이었다.
물론 워낙 난리통이었던지라, 그 사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우리 말고 없는듯했지만.
“...잡아서 심문해 보는 게 낫지 않겠나?”
“증거도 없이 다짜고짜 그럴 수는 없지. 나름 도움받기도 했으니까. 무슨 속내인지, 그냥 내가 떠볼게. 이젠 확실해졌잖아?”
“위험할 수도 있다.”
“아카데미 안이라면 안전해. 오히려 정체가 들통나면 저쪽이 더 위험하지.”
“그렇겠구나. 이제 그대도 화경에 근접하고 있으니.”
“이미 화경 찍으신 분도 있는데 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예비로 혹시나 해서 보내놨더니, 혈교 무인 백을 넘게 썰어버리고 화경까지 찍은 다음에 내 앞에 나타났을 때는.
그야말로 기절할뻔했다.
나이 스물에 화경이라니. 무림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리 많지 않을 거다.
“그대가 얼마 전에는 의념조차 사용하지 못했다는 걸 망각한 모양이구나.”
“...아무튼. 대체 무슨 속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베아트리체 경고 없었으면 훨씬 일이 복잡해졌을 거 같은데 굳이 왜 그랬을까?”
“원래 요녀妖女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야. 어쩌면 진짜 그대에게 반했을 수도 있고.”
“계기도 없이?”
“사랑에 계기가 필요하다 믿나? 그대는 의외로 순진하구나.”
“나도 알긴 알지.”
벌써 몇 번째 들은 얘긴데 말이다.
그냥, 일종의 현실부정이다.
만화 속에서나 미친년들에게 집착 당하는 걸 즐기지, 막상 현실에서는 공포도 그런 공포가 없다.
하물며 평범한 미친년도 아니고 무공을 익힌 미친년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는 내가 지킬 테니.”
천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폭 감싸 안았다. 뒷머리에 닿는 말랑말랑한 느낌이 꽤 기분 좋다. 나는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대사가 바뀐 거 아냐?”
“무림에서는 강자와 약자뿐이지. 남녀는 중요하지 않아.”
나를 명백한 약자로 보는 태도였지만, 화경의 무인이 그러시는데 차마 부정할 수도 없었다.
조금 따라갔다 싶었더니 다시 어디까지 멀어졌다.
참, 쉽지 않은 상대다.
***
예언자 길드.
무력을 파는 대부분 길드와 다르게, 이곳은 이름처럼 ‘정보’를 팔았다. 물론 모든 정보를 취급하는 건 아니고, 일부에 국한됐지만. 이런 세상이니만큼 그것만으로도 꽤 많은 부를 쌓아 올렸다.
그리고 대한민국 서울, 예언자 길드 본사는 100층짜리 초고층 빌딩이었다.
99층의 길드장실.
100층의 출입 금지 구역.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대부분은 100층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 누군가는 비밀스러운 데이터가 보관되어 있을 거라 했고, 누군가는 길드장 개인 생활 공간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그건 반만 맞았다. 도심지와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앞 소파. 거대한 층 전체가 누군가를 위해 마련된 생활 공간이었다.
비스듬하게 앉은 여성이 손가락으로 분홍빛 머리칼 끝단을 살살 꼬았다. 그리고는 뒤에 기립해 있던 중년인에게 물었다.
“궁에서 얘기가 나왔다고?”
중년인, 예언자 길드 길드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날, 왜 명을 따르지 않았는지.”
여성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미려한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그거, 혈천령血天令이야?”
“혈천령은 아닙니다.”
“그러겠지. 교주도 아닌 소교주가 혈천령을 발동시킬 수 있을 리가.”
“허나....”
중년인이 머뭇거리며 말을 망설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혈천령 아니잖아? 알아서 생각하라 해. 귀찮게 왜 집착질이야.”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여성이 창가 쪽으로 움직였다. 명랑한 발걸음에 요요한 기운이 물결쳤다. 희뿌연한 피부가 햇볕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중년인의 눈동자가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성취가 있으셨군요.”
살포시 짓는 미소에 고혹적인 자태가 묻어나왔다. 여성이 피처럼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응, 좋은 걸 먹었거든.”
“축하드립니다.”
“됐어, 천리안이 날 주시했다고?”
“예. 천리안의 추적은 차단했습니다만, 비마대를 따돌리느라 타격이 컸습니다.”
“생각보다 이른데.”
“앞으로는 주의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마교 고위직에서 관여한 것 같습니다.”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이미 들킨 거 같아.”
“연결 고리는 전부 끊었습니다만. 의심은 하더라도 확신하진 못할 겁니다.”
“아냐. 확신했을 거야.”
여성이 달뜬 숨결을 내뱉었다. 감정 변화에 따라 그림자가 일렁였다. 남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여성이 입꼬리를 올리며 양팔을 올리고, 머리를 모았다.
“나도 이렇게 해볼까?”
“갑자기 말입니까?”
“포니테일이라 하던가? 이런 머리 좋아하는 거 같던데.”
“...취향까지 조사하진 않았습니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머리 스타일을 요리조리 바꿔보던 여성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안 어울리네.”
“어울리십니다만.”
“아냐, 역시 안 어울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