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응, 주의는 할게.”
전혀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투로, 여성이 대충 뇌까렸다.
“근데 진짜 어울려?”
중요한 얘기는 건성으로 넘기고, 쓸데없는 부분에만 집중하는 여성의 말에 중년인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다음화 보기
내 침대에서 이불에 둘러싸여 뒹굴뒹굴하고 있던 한여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는 나를 지그시 보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심각한 건 아닌데. 아니 심각한가?”
“읏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한여름이 내 근처로 다가와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노트북 화면에 천비각에서 정기적으로 받는 정보가 떠 있었다.
“...신성 러시아 제국? 이런 곳이 있었나?”
“있었지. 극단적인 폐쇄 국가라 원래 비중이 공기 수준이었는데....”
게이트 사태로 시베리아를 잃고, 잘못된 대처로 정부가 반쯤 붕괴해버린 러시아는 UN을 비롯한 모든 국제기관을 탈퇴.
‘신성 러시아 제국’이라는 정신 나간 집단으로 거듭하게 된다. 세계 자체가 시궁창이다 보니 국가들도 별의별 막장 집단들이 횡행했는데, 러시아는 그중 끝판왕에 속했다. 핵을 다수 보유한 신정국가. 어딘가의 세기말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설정이다.
“레콘키스타면 스페인어잖아.”
“어. 스페인어로 재정복. 본인들이 무슨 십자군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천비각에서 보내온 주요 정보 중 하나가, 러시아가 잃어버린 시베리아를 되찾기 위해 ‘레콘키스타’를 선언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역사에서는 없던 일이다.
그렇다면 개같이 실패하고 잊혔든가, 아니면 뭔가 꼬여서 역사가 바뀌었든가.
둘 중 하나일 텐데, 러시아같이 지구 반대편 국가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러시아가 마물들 때려잡아 주면 좋은 거 아냐?”
“글쎄다.”
저 미친 국가가 유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복마전에 가까운 시베리아를 굳이 들쑤시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다.
북극으로부터 남하해 시베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든 크라켄은 노보시비르스크 인근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만일 저들이 잠든 크라켄을 자극하기라도 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순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여기까지 여파가 안 왔으면 좋겠는데.’
크라켄이 날뛰면서 마물들이 사방으로 밀려들어 오거나.
최악의 경우 아예 이쪽으로 크라켄이 올 수도 있었다. 물론 후자야 가능성이 매우 낮았지만.
이제 막 출정 준비를 마쳤다니 앞으로는 모를 일이어도, 변수가 늘어나는 건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
무신제 우승 보상.
용봉의 칭호를 내리는 것 외에도, 무신제에는 우승 보상이 있었다. 그러니까 수많은 무인이 이 먼 나라까지 찾아온 거기도 했고.
우승 보상의 경우 원래는 시상식을 통해 수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허나, 그런 일이 일어나버렸으니 시상식은 당연히 취소.
희생자가 나온 탓에 다시 시상식을 열기도 애매해졌다.
덕분에 나는 휴교령이 끝난 이후, 총장실로 직접 초대받았다. 독고패 총장이 기거하는 총장실은 말이 총장실이지, 동양풍의 저택이었다. 야트막한 담벼락과 내부에 잘 꾸며진 정원까지 존재했다. 보기만 해도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직원의 뒤를 따라, 독고패 총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차분한 눈빛의 절대자가 나를 응시했다. 경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독고패 총장이 얼마나 위대한 무인인지 실감하게 된다.
호흡 한 번,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하나에 전부 상승무공의 묘리가 담겨있었다. 경지가 저 정도가 되면 일상생활에도 무공이 묻어나오는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서 오게. 무신제 우승, 축하하네.”
독고패 총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환대했다. 나는 짧은 상념에서 벗어나 정중하게 포권하고,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자소단을 내어주신 것 역시.”
학사에서 귀한 영약인 자소단을 내어준 덕에, 후유증 없이 빠르게 내상 치료가 가능했었다. 독고패 총장이 턱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사는 내가 아니라 청하 교수와 화산파에게 하게나. 선뜻 자소단을 내어준 건 그쪽이라네.”
“예.”
설마 했더니 화산이었나. 나는 안내에 따라 근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감사는 내 쪽에서 해야지. 자네와 신교 덕에 혈교가 저지른 끔찍한 짓을 막았으니.”
“아닙니다. 그보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내 질문에, 독고패 총장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자네 사부에게서 들었나 보군.”
“외람되오나. 그렇습니다.”
“이 저주라는 건 알기 어려워서 말일세. 분명 내 수명이 줄어든 건 맞으나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어. 아무래도 공허룡 같은 괴물이 남긴 저주니 말일세.”
독고패 총장이 선뜻 답했다.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괜한 걸 물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나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독고패 총장이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나와 달리 아예 답이 없는듯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어차피 자네가 어디 가서 함부로 말했을 거 같진 않으니.”
“예.”
“이거 보게나.”
독고패 총장이 자신의 소매를 쭉 걷어 올렸다. 상완근 근처에 보랏빛 줄이 몇 가닥 튀어나왔다. 경로를 추정해 보면, 아마 발원지는 심장일 가능성이 컸다.
“저주라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이 모양이지.”
마음 같아선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으나, 이 이상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
“해주 방법을 다각도로 찾아봤으나 쉽지는 않더구나. 너무 걱정하진 말게. 자네들이 성장할 때까진 의지로 버틸 테니. 그보다.”
독고패 총장이 에둘러 말하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금빛 카드 하나와 손바닥 크기의 나무 상자였다.
“이건...?”
“원래 무신제 보상이 뭔지는 알고 있나?”
“영약이었지요.”
그래서 난 크게 우승 보상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자소단 같은 영약을 먹어도 내게는 쥐꼬리만 한 내공 상승효과밖에 없었으니까.
차라리 적하와 잤던 게 훨씬 효과가 강력했다.
“그렇다네. 멸문한 무당의 비전, 태청단이지. 세가에서 보관되어 있던 걸 가져왔다네.”
“...귀물이군요.”
전설의 대환단보다는 못해도, 소환단보다는 낫다는 평가를 듣는 게 무당의 태청단이었다. 하물며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영약이니.
나는 양손으로 정중하게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태청단이야 당연한 보상이라네. 중요한 건 이거지.”
독고패 총장이 슬쩍 웃으며 금빛 카드를 들었다. 조금은 익살스러운 모양새였다.
“그건...?”
“혈교를 막아준 것에 대한 공은 따로 따져야 하지 않겠는가.”
“딱히 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만.”
“그렇겠지. 자네는 협사이니. 허나, 책임자로서 마냥 입 씻고 넘어갈 수는 없다네. 받게나.”
나는 무심코 금빛 카드를 받아들었다. 일반적인 재질은 아닌 듯, 표면이 기이한 문양으로 일렁였다.
“뭔지 모르겠다는 눈치로군.”
“예. 본 적 없는 것이라....”
“별거 아니라네. 나를 상징하는 증표지.”
“예?”
“자네는 지금부터 독고세가의 은인으로 취급될 것이며. 독고세가 산하의 어딜 가든 귀빈으로 대접받을 것이라네. 또한, 필요하면 일 회에 한정하여 전신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네. 백도에 속한 그 누구도 그걸 보고 경거망동하지는 못할 거네. 설사 자네가 백주대낮에 백도 무인을 죽여도 말일세. 물론 이유도 없이 자네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독고패 총장이 ‘별거 아니다’라고 대충 말한 것 치곤, 효과가 자못 강렬했다. 일 회라곤 하지만, 전신대 지원은 절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신교의 무인에게 이런 걸 주셔도 되는 겁니까?”
“신교의 무인이기에 준 거네. 자네도 알겠지만, 백도는 사분오열하여 ‘정파’라는 이름을 달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지.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려 드니까.”
“....”
“자네는 믿을 수 있다. 그리 판단했을 뿐이네. 그리고 말일세.”
그가 투명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눈빛에 잔잔한 호감이 담겼다.
“나는 자네의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 어쩌면 자네보다 훨씬 더. 그가 자네를 믿었다면, 자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그뿐이라네.”
대체 사부와 독고패 총장 사이에 과거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백도와 마도, 복잡한 무림 세력들의 역학 구도를 뛰어넘을 만큼 신뢰가 쌓인 건 확실해 보였다.
어쩐지 내 무례한 질문에도 선뜻 답해주더니, 이런 배경이 있는듯했다.
“이건... 좋은 데 쓰겠습니다.”
“그래야지.”
독고패 총장이 빙긋 웃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해주 방법이라.’
총장실을 나오면서 나는 묵묵히 상념을 계속했다.
현경의 무인 하나.
고작 한 명이 가진 존재감은 전 세계를 아우를 정도로 거대했다. 만일 저주를 풀 수만 있다면, 수만 명의 무인을 키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낳겠지.
‘내 코가 석 자다만.’
나는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은 내 시한부도 해결 못 하는 주제에, 너무 주제넘은 생각이었다.
화악-
가을이 끝나감을 느끼며 기숙사로 향하던 길.
날카로운 공력 파동이 내게 쏘아졌다. 사박. 동시에 명랑하고 경쾌한 발소리가 울렸다.
“안녕, 후배님. 오랜만이야.”
싱긋 웃는 미소가 상당히 요사스럽다. 방금 독고패 총장의 기운을 겪고 와서 그런지 확연히 비교됐다. 정종 무공과는 거의 상극에 가까웠다.
인세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분홍빛 머리칼, 요요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나를 ‘후배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이 아카데미 내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베아트리체.
내가 찾아가려 했던 그녀가, 어쩐 일인지 먼저 다가왔다.
다음화 보기
이전에 봤던 것과 확연히 달라진 기세가 느껴졌다. 내가 강해진 탓인지, 아니면 베아트리체의 경지가 상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단순 강약 문제만은 아니었다. 베아트리체의 몸에서 느껴지는 건 내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기운이었다. 염기艷氣 또는 요기妖氣. 그렇게 부르는 편이 맞으리라.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청순할 뿐이니,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했다. 나도 천마신공의 기운이 자연스레 반응하지 않았다면 아마 몰랐을 거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차분하게 베아트리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그녀의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저의를 판단하고자 눈동자를 마주했으나, 베아트리체는 나를 보며 싱긋 웃을 뿐이었다.
“자리 좀 옮기지요.”
나는 먼저 발걸음을 뗐다. 예정과 달라졌지만, 빨라서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며칠 내에 찾아갈 생각이었으므로. 베아트리체가 콧노래를 부르며 한 발짝 뒤쪽에서 따라왔다.
“너무 경계하는 거 아냐? 앞을 보는데도 살기가 여기까지 느껴지잖아.”
“....”
무시하고 이동한 끝에, 학사 외곽의 텅 빈 지역에 도착했다. 여기라면 설사 전투가 벌어져도 충분히 감당 가능했다.
흙먼지가 아롱지는 공터를 건너, 일자로 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베아트리체가 몸을 옆으로 살짝 틀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옆에서 꽂히는 시선이 꽤 따갑다.
“경고 감사했습니다.”
적의는 적의고, 도움받은 부분은 있었으니까. 나는 나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할 건 없어. 내 선물이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응.”
그녀가 명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일반적인 성격은 절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진중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혈교도가, 무슨 의도로 그러신 겁니까? 혈교의 피해를 감수하고 경고까지 해가면서. 부회장님이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훨씬 피해가 컸을 텐데요.”
내가 ‘혈교도’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베아트리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역시 알았구나? 언제부터 알았어?”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얘기하기 힘듭니다만.”
“어쩐지. 나 같은 미녀가 들이대는데 너무 철벽친다 싶었지.”
“부회장님이 혈교 사람이 아니라도, 그렇게 막 들이대면 거절했을 겁니다.”
“너무하네. 나 나름 예쁘지 않아?”
베아트리체가 머리 끝단을 살살 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예쁜 걸 무기로 이용하는 여성은 그리 취향이 아닙니다.”
“그런 것 치곤 후배님 주변엔 죄다 여자에, 전부 미녀들이던데? 나 다 알고 있어. 후배님이 뽑은 적룡대 하나하나까지. 말이랑 행동이 너무 다른 거 아냐?”
“...정보 통제를 더 열심히 해야겠군요.”
“소용없어. 난 생각보다 후배님한테 관심이 아주 많거든.”
배시시 웃으며 베아트리체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대체 얘기가 왜 이런 쪽으로 흘러갔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흐응.”
베아트리체가 자리에서 살포시 일어나더니, 내 정면에 섰다.
짝-
박수 한 번. 베아트리체가 손뼉을 마주치자마자, 풍경이 뒤바뀌었다. 삭막한 대지에서 푸른 초원으로. 하늘은 붉디붉었다. 그것이 초원과 대비되니, 지독히도 강한 이질감을 선사했다.
진법.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손뼉을 한 번 친 것만으로 진법을 발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