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131)

‘함정을 파놨나?’

나는 바로 흑룡검을 뽑아 들 준비를 했으나.

“잠깐, 잠깐!”

베아트리체가 다급히 검을 뽑으려던 내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흑룡검을 꽉 쥔 채,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허튼짓하면 바로 출수할 수 있게.

“왜 이리 성격이 급해. 얼마 전에 삼사도 죽였던 그 검 쓰려고 했지? 그거 맞으면 진법 철거는 물론이고, 나도 죽어. 연약한 여자를 상대로 그걸 쓰는 건 너무하지 않아?”

“설명.”

“그냥, 단둘이 있을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야.”

다시금 거리를 살짝 벌리고, 툴툴거리면서 베아트리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도 단둘이었습니다만.”

“혹시 모르잖아. 여긴 전신의 영지니까. 어디에 시선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아.”

“....”

마냥 믿을 수는 없었다.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공기에 미세하게 독기가 어려있다. 게다가, 진법 자체가 내부에 있는 자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내게 간섭하려 시도했다.

물론, 이 모든 건 화르륵 일어난 천마신공에 모조리 차단당했다. 오히려 나를 중심으로 진법 일부가 침식되었다. 내 주변이 검은빛으로 물들어 일렁거렸다.

“...역시.”

베아트리체가 감탄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에 양손을 얹고, 다소곳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소개할게. 혈교 십삼사도. 그게 나야.”

“...혈교는 십이사도뿐일 텐데?”

“생각보다 우리에 관해 아는 게 많구나? 나는 어디까지나 예외니까.”

“....”

“오해하진 마. 예외라 해도 정식 사도는 맞아.”

내 생각보다 훨씬 고위직이었다. 직위로만 따지면 사도들은 소교주와 동급 취급이니. 물론 교주가 될 자라는 강점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은 소교주가 훨씬 강했으나.

원칙적으로 사도들은 교주 직계. 교주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였다.

“기존 사도들을 제거하여 상위직을 노린 겁니까? 아니면 소교주 파벌의 힘을 깎아 소교주직을 노린 겁니까? 이해하기 어렵군요. 사도 씩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하아....”

베아트리체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배님 머리는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이 안 돼?”

“저와 부회장님은 명백한 적입니다만. 제게 혈교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지금 날 죽일 거야?”

“생각 중입니다.”

“그래도 내 덕에 꽤 살리지 않았어?”

“그래서 지금 검을 뽑지 않은 겁니다. 원래 혈교도라면 문답무용으로 처단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이해해.”

“...?”

베아트리체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움이 가중됐다.

“우리 애들 중에 멀쩡한 애들이 몇 없긴 하지.”

“그 혈교 놈들에 부회장님도 포함됩니다만.”

“나도 포함이야. 자기객관화는 중요한 법이야.”

“...그럴 바엔 그냥 자살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자살도 쉽게 못 하는걸. 굳이 자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나를 지그시 보던 베아트리체가 피식 웃었다. 아까와 달리 요기는 옅어지고, 허탈함이 엿보였다.

“후배님은 우리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는 것 같네.”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대답 대신, 갑자기 베아트리체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안에는 가슴골이 다 드러난 민소매 티만 하나 입은 채였다. 베아트리체가 내 쪽으로 살풋 다가왔다. 한여름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 시선을 자극했다.

“만져볼래?”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말입니까?”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가슴 위쪽. 여기.”

베아트리체가 자신의 가슴골 사이를 미려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답답하네.”

갑자기 베아트리체가 양손으로 내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 쪽에 댔다. 이대로 진기를 때려 박으면 베아트리체는 즉사일 텐데도. 행동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살짝 기운을 흘려보내 내부를 관조했다. 그녀는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낱낱이 보라는 듯, 자신의 진기를 오히려 억눌렀다.

“이건....”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과 별개로. 베아트리체의 상태는 몹시도 기이했다.

“역시, 후배님은 바로 파악하네. 감이 좋아.”

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간이라기보단, 마물들이 가지고 있는 코어와 오히려 유사했다. 게다가 그걸 중심으로 뻗어 나간 기운이 이 진법을 구성하고 있었다.

박수 한 번에 어떻게 진법을 발동시켰는지 의아했는데, 이런 식이면 말이 되긴 했다. 진법의 축이 본인이라는 얘기니. 진법을 발동하는데 필요한 자연지기 역시 돌덩어리의 기운으로 대체하고. 당연히 매개체가 필요 없을 수밖에. 무공보다는 마법에 가까운 신기였다.

베아트리체의 본래 성이 ‘제갈’이라는 걸 고려하면 그쪽 방면의 기예일 수도 있었다.

“이런 게 가능했군요.”

“아마, 전 세계에서 나만 가능할걸?”

“...보통 사람은 몸 안에 그런 걸 박아넣고 살진 않으니 말입니다.”

저것의 단점은, 진법을 ‘상시 유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막대한 진기가 필요하다는 점이었으나. 베아트리체의 몸속에 있는 돌 같은 것이 충분히 기운을 공급하는듯했다.

“거기까지 파악했구나. 역시 대단해.”

“...제갈가의 기술입니까?”

“어...?”

돌연 묻는 말에 베아트리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가문의 후예인지.”

“...어떻게?”

이번에는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비밀입니다.”

잠시 멈춰 있던 베아트리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배님은 언제나 내 예상보다 한발 앞서가네. 진법 자체는 제갈세가의 비전인 천문금쇄진天門禁鎖陣이 맞아. 다만, 구현방식이 혈공을 통해 이뤄지는 것뿐이야. 원래 천문금쇄진 내부는 이렇지 않거든. 좀 더 아름답고, 인간의 생기를 잡아먹지도 않지.”

“이해했습니다만. 그거랑 부회장님이 자살조차 쉬이 못 하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좀 더 들여다봐. 겉만 보지 말고 구석구석 속까지.”

장난기 섞인 음성이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의 말대로, 코어같이 생긴 돌 내부에 천마신공의 기운을 흘려보냈다.

“읏...!”

베아트리체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나도 내부의 그것이 뿜어낸 반탄지력에, 손아귀가 얼얼했다. 잠시 숨을 헐떡이던 베아트리체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뭡니까 이건?”

단순히 돌덩어리라 생각했던 건, 전혀 다른 존재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악의를 응축해놓으면 그런 느낌일까 싶다. 게다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건... 무인도에서 봤던 것과 꽤 유사했다.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불길함이 느껴지는 붉은 문자들이 돌덩어리 표면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저주.”

그녀가 호흡을 고르고,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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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혈교가 사이한 대법에 통달한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설마 사도급 인물에게 저주를 걸어놨을 줄은 몰랐다. 몸 안에 저런 걸 넣고 다니는데 제정신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인간의 정신은 생각 이상으로 신체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었다. 어쩌면 베아트리체의 변덕이 저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건 그거고, 아직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많았다. 제대로 확인할 필요도 있었고.

“혈교가 건 겁니까?”

“그럼 누가 걸었을까? 이런 거 할 줄 아는 게 우리 말고 있을 리가. 아, 마교도 가능은 하겠다. 이제 와서 굳이 할 리는 없겠지만.”

“무슨 저주길래 그럽니까?”

베아트리체의 웃음이 짙어졌다. 만면에 기뻐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이제야 관심이 좀 들어?”

“...이성적인 관심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난 이성적인 관심을 원하는 건데.”

언제나 그랬듯이, 진심인지 농인지 알기 어려웠다.

“자꾸 말이 새어나갑니다만.”

“치, 재미없어.”

입술을 샐쭉거리면서, 베아트리체가 바닥에 풀썩 앉았다.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일자로 갈라진 눈이 꼭 고양이처럼 보였다.

“마교에 천마령이 있듯이, 우리한테는 혈천령이 있거든. 교주만 쓸 수 있다는 점도 같아. ‘저주’라곤 했지만, 일종의 구속구야 이건. 인간의 의지를 강제로 꺾어버린다는 점에서, 이보다 저주스러운 술법이 또 있을까?”

“혈천령에 강제로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겁니까?”

“정확해. 천마령이 그저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있다면, 혈천령은 훨씬 실전적이야. 단순 권위의 상징에 그치지 않았지. 짝퉁이 원래 더 매운 법이거든.”

언행에 거침이 없다. 혈교의 신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짝퉁이라 부른다. 감정에 일관성도 없었다. 혈교에 호의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것으로 보였으나, 적의도 섞여 있었다.

“왜 자살도 쉽게 못 하냐고?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게 명령받았으니까. 물론 만능은 아냐. 인간의 의지란 생각보다 강한 법이라, 혈천령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횟수는 정해져 있거든. 앞으로 많아야 한두 번?”

“이번 일은 혈천령으로 내려온 명령이 아니었나 보군요.”

“으으음....”

갑자기 베아트리체가 침음성을 흘렸다. 원체 혼돈 같은 인물이지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해 보니까 나만 답하고 있잖아.”

“....”

“삼문답. 서로 주고받기로 하자. 나는 뭐든지 세 개까진 답해줄게. 넌 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저부터 하면 됩니까?”

“응.”

“혁리악, 어딨습니까?”

베아트리체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다짜고짜 내가 소교주에 관해 물어올 줄은 예상 못 한 듯했다. 그녀가 입을 우물거렸다.

“혈천령에 배신하지 말라 같은 것도 있습니까?”

“그건 질문이야?”

“...실언했습니다. 질문이 아니니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이건 서비스로 알려줄게. 내게 배신하지 말라 같은 건 걸려있지 않아. 그런 포괄적인 명령은 효과가 떨어지거든. 우회하기도 쉽고. 명령이 없으면 자살하지 마라. 이건 직관적이잖아. 근데 배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배신인지 판단이 어렵잖아. 내 마음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배신이 아니라고 자기 세뇌하면 그만인걸. 온갖 깽판은 다 쳐놓고 ‘이건 아무튼 혈교를 위해서였다’ 하면 저주는 발동 안 하니까.”

“....”

조금은 입맛이 썼다. 횟수가 정해져 있는 혈천령으로 ‘명령이 없으면 자살하지 말라’는 구속을 걸어놨다는 얘기는, 이전에 수없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뜻도 됐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저런 명령을 아깝게 내렸을 리는 없을 테니까. 꽤 복잡한 인물이었다.

“자살은 아무래도 본능의 영역이라 그런지 명령이 유독 강하게 듣더라고. 아예 그쪽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막아버리는 느낌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리고 혁리악... 소교주는 한국에 없어.”

본래라면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어야 할 혁리악이 한국에 없다. 무언가 꼬였다.

“그럼...?”

“대체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네. 마교 정보력이 그리 좋았나? 좋은 건 맞는데, 우리 소교주를 파악할 정도면 가만있진 않았을 텐데? 후배님이 숨기고 있는 게 뭘까 대체?”

베아트리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한 가지만 공짜로 알려드리자면, 신교 쪽 정보는 아닙니다.”

“그랬겠지. 혁리악은... 지금 혈마궁에 있어. 혈마궁 위치는 알아? 대만 쪽.”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 차례네. 후배님은 어떤 여자가 좋아?”

“...예?”

“진심이냐는 표정이네. 진심 맞아.”

“...조신하고 착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으, 고루하잖아.”

“부회장님이랑 반대 타입이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너무하네.”

풀이 죽은 표정으로 베아트리체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마치 강아지가 귀를 축 늘어뜨린 느낌이라 괜스레 안타까웠다. 물론, 저 모든 게 연기일 가능성이 매우 컸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더 할 말 없으면 두 번째 질문 하겠습니다. 혁리악이 혈마궁에서 대체 뭘 하는 겁니까? 본래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어야 할 텐데요?”

“흐음.”

눈을 가늘게 뜨고, 베아트리체가 팔짱을 꼈다.

“우리 소교주한테 관심이 많네?”

“살려둬서 하등 도움 될 게 없는 놈입니다.”

“동의해.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를 의인화하면 우리 소교주님이 되지 않을까. 온갖 개 같은 짓은 다 저지르고 다니면서도 잘 나가는 거 보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거든.”

“진심입니까?”

“그럼 거짓말일까? 언제더라. 올해 여름이었나? 뭔가 안 풀렸는지, 엄청나게 광분했던 적이 있었어.”

여름이면 내가 신교에 머물 때였다. 광분. 아마 무신의 비보를 찾았다고 기뻐했다가 그게 허사라는 걸 깨닫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짚이는 부분이라면 그뿐이다.

“그 이후 혈마궁으로 갔다?”

만일 그렇다면 최근 학교를 자퇴한 놈들 중 하나란 얘긴데....

어차피 유의미한 흔적을 남겼을 리는 없을 터. 의미 없는 얘기였다.

“후배님은 혈교 교주가 어떤 식으로 승계되는지, 알고 있어?”

“잘 모릅니다만. 별 관심도 없고요.”

나이에 비해 끔찍하게 강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미리 죽이려는 것이기도 했고.

“혈교 교주들은 대대로 자신의 원정을 내단처럼 만들어 후계자에게 물려주거든. 그걸 완벽히 취하고 혈천령의 권한을 획득하는 순간, 교주 등극. 이런 식이야.”

“전대 혈교주가 벌써 원정을 넘긴 겁니까?”

“예전에 모종의 사건 때문에 좀 골골거리긴 했는데. 아직 죽을 때는 아니었어. 아마 방심한 사이 기습해서 아예 끝장낸 다음, 강제로 흡정한 거 아닐까. 갈 때가 머지않았으니 어느 정도 내단은 만들어 놨을 거거든. 흡수를 끝내고 혈천령을 발동시키는 게 가능할 때까진 5년 정도는 더 걸릴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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