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패륜이군요.”
“뭘 새삼스레. 혈공이 원래 그런 건지 몰랐어?”
“알고는 있습니다만.”
삼사도만 해도 초절정 고수를 무슨 보조배터리처럼 취급했으니까. 제 사부를 잡아먹는 것 정도야, 혁리악이라면 더한 짓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두 번째도 여기서 끝. 내 차례지?”
“예.”
베아트리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번에는 조금 진지한 얘기처럼 보였다.
“후배님이 익힌 무공, 천마신공 맞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굳이 내가 천마신공을 익힌 걸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의도를 파악하려 했으나, 단 하나도 짚이지 않았다. 대답을 거부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뭔가 질문에 대한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후배님이 쓰는 거. 지금 신교에서 내려오는 불완전한 거 말고. 좀 더 보완된 형태 같거든.”
“...일반적인 천마신공은 아니다. 여기까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차이점을 파악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디 가문 후예인지 안다며?”
“제갈세가는 멸문한 거 아니었습니까?”
“똑똑한 놈들은 원래 굴을 여기저기 파놓거든. 물론 아무리 똑똑해도 천재지변을 막지는 못했지만. 머리가 좋다는 건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활로를 찾는다는 얘기지. 이거 근데 막상 나만 대손해네. 후배님은 마음대로 막 질문하고.”
“...궁금한 게 많아져서 말입니다.”
“괜찮아. 내가 답하기로 결정한 거니까. 진짜 싫었으면 거절했겠지. 이젠 후배님 차례.”
나는 아까부터 쥐고 있던 흑룡검의 검파를 꽉 잡았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일 수도 있다.
“흡정, 하신 적 있습니까?”
베아트리체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올 게 왔다는 생각일까. 일그러진 표정이 연기인지 아닌지 판단이 어려웠다.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있어.”
“결국 부회장님도 무고한 자를 잡아먹고 힘을 불렸다는 얘기군요.”
“아냐.”
베아트리체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무고한 것들은 없었어. 애초에 선량한 자들은 필요 없으니까.”
“이해하기 어렵군요.”
“네가 봤던 이것. 살생석殺生石이 가장 좋아하는 건 혈공을 익힌 악귀들이야. 아이러니하지.”
“사악한 혈교 무인들만 잡아먹었다?”
“정확히는 강한 애들만 몇. 약한 애들은 의미 없거든. 그리고 내가 직접 잡아먹었다기보단....”
짝. 베아트리체가 다시 한번 손뼉을 치자, 진법 일부가 그림자에 물들었다. 아니, 단순 그림자가 아니었다. 악의惡意를 가진 덩어리. 검은 지네들이 뭉쳐서 꿈틀거리는 광경이 저러할까. 살갗을 저미는듯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베아트리체가 무슨 수단을 부린 건지, 벽에 막힌 것처럼 이쪽으로 넘어오진 못하는듯했지만.
“몸 안에 저런 게 있는 겁니까?”
“살생석 안에 들어있는 거지. 애초에 그런 물건이거든. 성향은 악 그 자체지만, 공물을 바치면 힘을 내려준다는 점에선 신과도 같아.”
“평범한 공물은 받지 않고?”
“정확해.”
“....”
베아트리체가 하는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미래의 정보로 판단해 보아도, 모호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베아트리체가 뒷짐을 지고 나와 눈동자를 마주했다.
“마지막 질문, 해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불그스름한 진법 하늘 아래서, 그녀가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후배님은, 날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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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저 말을 듣는 순간 손아귀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꽉 쥐었던 흑룡검의 검파를 천천히 놓았다. 나는 작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무림은 은원을 중시하지요. 받은 게 있으니 일단은 보류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의 말을 전부 믿기는 당연히 힘들다. 그래도, 무신제 테러에 관한 언질. 혁리악에 대한 얘기들. 검증은 필요하겠지만 천금을 주고도 못 얻는 정보들이었다.
‘죽이려면 지금이 가장 낫겠다만.’
나는 아직도 진법 한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불길한 덩어리를 힐긋 보며 생각했다. 내가 생명을 담보로 막대한 힘을 얻었던 것처럼, 베아트리체도 아마 비슷할 거다. 저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의 탄생을 보게 되겠지.
그게 인류에게 있어서 득일지, 실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응. 고마워.”
베아트리체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저 얼굴을 보니까 살의가 사라졌다. 내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려면 나름의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안면이 있는 경우라면 더 그렇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마지막 질문을 그런 거로 때워도 괜찮습니까? 하나 더 물어봐도 됩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가 봐?”
“아쉽게도, 양심이 완전히 출타하진 않아서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하진 않을게. 잠시만.”
팔짱을 끼고 내 앞을 왔다 갔다 하던 베아트리체가 옆으로 와서 털썩 앉았다. 신기하게 모든 것들이 뒤바뀐 진법 안인데도, 내가 앉아있는 이 벤치만큼은 그곳 그대로였다.
‘기물 설정조차 가능하다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진정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으으음...!”
베아트리체가 어울리지 않게 잔뜩 신음성을 내뱉었다.
“무슨 질문이기에 그럽니까?”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일단 물어보시지요. 답하기 어렵다면 제가 거절하면 그만이니.”
“후배님은 그... 여자 경험 많아?”
“예?”
“아냐. 잊어줘.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네.”
반쯤 횡설수설하며 베아트리체가 손을 내저었다. 저런 걸 궁금해하는 건 보통 남자뿐인 줄 알았더니. 상당히 의외의 질문이 훅 들어왔다.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홱 돌리고 머리 끝단을 살살 꼬아댔다.
“있긴 합니다.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듣자마자 베아트리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역시. 난 없거든.”
“알고 있습니다.”
“응?”
“제가 익힌 무공에 그런 쪽 판별 기능이 달려있어서 말입니다.”
이 정도는 알려줘도 되겠지 싶다. 베아트리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듯했다.
“처녀 판별? 묘하게 기분 나쁜 능력이네.”
“정상은 아니지요.”
유니콘 신공이 제정신 박힌 무공은 아니긴 하지. 나는 동의의 고갯짓을 했다.
당하는 입장에서야 껄끄럽겠지만. 남자라면 바라마지 않는 능력이었다. 물론 이걸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긴 좀 그랬다.
“호오와 별개로 대단하긴 해. 한눈에 알 수 있는 거야?”
“...예.”
“무공이 아니라 술법... 아니, 신술神術에 가깝겠네. 만든 자가 고금제일에 근접했던 건 확실하겠어. 역시 마교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쓸데없이 그걸 분석하고 앉아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런 질문만 해도 됩니까?”
“나한텐 중대사야.”
“이유를 모르겠군요. 부회장님이랑 저는 그다지 큰 접점이 없을 텐데요. 굳이 그런 걸 궁금해할 만큼 말입니다.”
“나는.”
베아트리체가 차분하게 속삭였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주고받아야 한다 생각하거든.”
“저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후배님은 나한테 바라는 게 별로 없겠지만, 나는 있었어. 문제는 말야. 후배님은 내가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끝없이 달려나갈 사람이었다는 거. 살짝 느려질 뿐이지 별문제 없이.”
“너무 고평가하는 거 아닙니까?”
나야 베아트리체의 정체에 관해 알고 있었다 쳐도, 그녀는 나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베아트리체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는 조금 모호했는데, 지금은 아냐. 누구나 그리 생각할걸? 마교의 이공자인 줄은 몰랐지만.”
“...바라는 게 뭡니까?”
“나중에. 후배님이 좀 더 강해지면.”
“아직 부족합니까?”
조금 의외였다. 어디 가서 모자란다는 소리 들을만한 경지는 아니라 생각하는데 말이다.
“응.”
단호한 대답. 초절정으로도 부족하다면, 최소 화경이란 얘기였다.
“제가 정파 사람은 아닙니다만. 협의에 어긋나는 짓을 굳이 할 생각은 없습니다.”
“걱정 마.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그럼 지금 알려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좀... 그래. 나도 각오란 게 필요한 법이거든?”
“뭘 하기에 각오까지.”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에.”
얼버무리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움이라도 타는 것인가. 나름 이것저것 대화를 나눴지만, 여전히 이 여성에 관해선 잘 모르겠다.
읏샤- 나직한 기합성과 함께 베아트리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날 쳐다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처음부터 다 알려주면 다음에 후배님이 나 안 보려 할 거 같거든.”
“...알겠습니다.”
쿵- 베아트리체가 발을 한 번 구르자, 진법 내부가 깨진 유리처럼 부서지며 현실로 서서히 돌아왔다. 그것이 노을이 내려앉은 현실 풍경과 결합하니,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간의 생기를 빨아먹는 불길한 내부와 별개로, 사뭇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혈화血花란 게 흩날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완전히 진법을 벗어난 이후에 잠시 뜸을 들인 베아트리체가 말을 꺼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후배님한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네. 낭만적이지 않아?”
“헛소리 마십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도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다음에 데이트 신청하면 받아줘야 해?”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뒤돌아서 발걸음을 옮기는 내 귓가로 베아트리체의 전음이 들려왔다.
[내 본명, 제갈혜야.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 없으니까. 비밀로 해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조금은 묵직하게 다가왔다.
***
쏴아아-
물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거셌다.
김무공과 헤어진 이후.
베아트리체는 기숙사로 들어와 샤워하며 상념을 계속했다. 학생회 부회장은 기숙사를 혼자 쓸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태양지체, 음양합일. 이쪽은 확실해.’
대상이 한여름인 것도 확실해졌다. 다만 이쪽이 모든 걸 말하진 않았듯이, 김무공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처녀 판별이 가능하다는 정신 나간 무공. 그게 문제였다.
‘뭘 숨기고 있는 걸까?’
박학다식이라는 말에 걸맞았던 제갈세가의 후예답게, 베아트리체는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김무공의 천마신공이 일부 구결이 소실된 현재의 천마신공과 다르다는 것 역시.
온갖 정보를 기록해놨던 제갈세가 덕에 깨달았다. 천마신교는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항상 정파의 대적이었으니까.
퐁- 샤워를 마치고 시원한 체리 음료를 마시던 도중.
위이잉-
베아트리체의 근처 폰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좌표 하나가 적혀있는 메시지였다.
확인을 마친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돌변했다. 김무공과 대화하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을 때와 반대로. 무생물에 가까운 서늘함이 가득했다.
곧장 베아트리체는 학사를 나와 좌표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이미 사위는 어둑어둑해진 지 오래였다. 달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산중 어둠 속에서 여러 명의 남성이 베아트리체를 둘러싸고 나타났다.
그중 하나. 드러난 팔뚝에 귀면와鬼面瓦 문신을 한 사내가 베아트리체를 보며 정중하게 포권했다. 베아트리체는 냉랭한 눈빛으로 사내를 깔아봤다.
“미천한 자가 십삼사도님을 뵙습니다.”
“용건.”
베아트리체가 짧게 내뱉었다.
팔뚝에 귀면와 문신을 하면서, 혈공을 익힌 자들은 혈교에서도 한 단체뿐이다. 혈귀단. 이전에 흡혈귀 사건을 일으켰던 살귀대의 상위 조직이었다.
마교에 흑풍단이 있다면 혈교에는 혈귀단이 있다. 그런 말이 혈교 내에서 암암리에 돌 정도로, 혈궁 직계로 있으면서 강대한 힘을 가진 핵심 집단이었다. 바꿔 말하면, 혈교의 온갖 악행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오늘부로 십삼사도님을 지원하라는 소교주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지원 목적.”
“교의 대적을 처단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에, 소교주님께서 우려가 크십니다. 그리하여 오늘부터 교의 대적 ‘김무공’을 십삼사도님과 함께 감시할 생각입니다.”
“함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어둠 속에서도 분홍빛 머리칼이 요요히 빛났다.
“그렇습니다. 함께 교의 대적을 감시하고, 기회가 될 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처단하라. 인질을 잡든, 독이든 암살이든 뭐든 허용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인 이상 빈틈은 존재할 테니 말입니다.”
마치 자랑스러운 일을 얘기하는 듯, 사내가 답했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 있었다.
“그래?”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비단 같은 머릿결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여전히 표정 변화는 없었다.
“예.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혈마궁 혈귀단....”
“이름은 됐어.”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말을 내뱉던 혈귀단 사내의 목소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끊겼다. 새빨간 혈화가 피어나며, 고요가 주변을 잠식했다. 흥건한 핏물이 아롱졌다.
기우뚱하는 시야 속에서, 사내는 베아트리체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