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31)

인지하지도 못한 새에 주변 모두를 학살한 베아트리체가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김무공을 대할 때 보여줬던 환한 미소는 물론이고, 그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파견 나온 혈귀단 전원을 벌레처럼, 사뿐히 즈려밟아 죽였다.

‘어째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의문만 남긴 채, 사내의 의식이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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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교령이 끝난 이후.

부족한 부분을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 수업 커리큘럼은 빠르게 달려나갔다. 베아트리체와 그 이후에 따로 만나 관련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곧 회장 선거 때문에 학생회가 워낙 바빠서 서로 마주치면서 인사 정도야 했지만.

진지한 얘기를 나누기엔 여유가 없었다. 나도 전체적인 무공을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었고. 특별한 일은 따로 없었다. 그나마 청하 교수에게 감사를 표했더니, 언제 한 번 화산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정도?

그렇게, 다시금 주말이 다가왔다.

예전과 달리 내 일정은 뻔했다. 주중에는 학사, 주말에는 신교 지부. 거의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

신교 지부에 도착하자 류은채와 적룡대주 홍은주가 정중하게 맞이했다.

“별일은 없고?”

적룡대 수련 장소로 바로 가면서, 류은채에게 물었다. 그녀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 이후로 눈치 보는 집단이 많아져서 잠잠합니다. 신교의 분노를 사고 싶은 자들은 없는 법이고, 정파는 무림맹주가 집안 단속을 꽤 잘한 모양입니다.”

“우리 총장님도 화나면 꽤 무서우니까. 정파 쪽도 당분간 큰일은 안 벌이겠지.”

“예, 전신의 위명은 말로만 들었지만. 엄청나더군요. 분석이 불가능할 정도의 무력... 괜히 교주님과 비견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무력을 온전히 투사하기엔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지만. 이건 어디 가서 함부로 할 얘기는 아니었다.

쐐애애애액-!

또각거리는 류은채의 발소리를 따라 적룡대 연무장으로 다가가니, 거센 파공성이 연달아 울렸다. 드넓은 연무장에, 하늘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여성이 한 명 있었다.

“쟤만 있어?”

“예. 다른 대원들은 쉬는 시간이라. 적하는 거의 쉬지도 않고 저렇게 수련하는 편입니다.”

이번에는 묵묵히 내 뒤를 따르던 홍은주가 답했다.

‘정공 특성인가.’

아무래도 폭발적인 경력을 쏟아내는 마공 계열과 다르게, 정공은 대해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내력이 특징이었으니. 지구력 면에선 확실히 뛰어났다. 물론 적하가 익힌 청운적하검은 한 방의 위력도 마공 못지않았지만. 상승 무공으로 가면 갈수록 원래 팔방미인이 되는 법이었다. 내 천마신공만 해도 그랬으니까.

“어?”

내가 다가오는 걸 인지한 적하가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지냈냐?”

“그그, 대장.”

갑자기 적하가 손바닥을 쭉 내밀어서 내 접근을 저지했다.

“왜?”

“저 지금 좀 그런데.”

“뭘 새삼스레 그래.”

“아니이... 저도 여자거든요.”

적하가 조심스레 자신의 소매를 코에 대고 살짝 냄새를 맡았다.

“냄새 안 나니까 신경 쓰지 마라.”

“으읏...!”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되어버린 적하가 머리를 푹 숙였다.

“아, 아무튼! 저 씻고 올게요!”

호다닥 하면서 적하가 도망가버렸다. 세류표까지 써서 달리는지, 잔상이 남으면서 신형이 쭉쭉 늘어나 보였다.

“....”

류은채가 황망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적하가 원체 격의가 없어서....”

홍은주가 미간을 찡그리며 사과했다.

“아냐, 내 잘못이지. 다음부터는 미리 말해줘야겠다.”

그런 일도 있었으니, 예민할 수 있다는 건 알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마냥 이전처럼 보기는 힘들다는 얘기겠지. 내가 세심함이 부족했다.

적하가 사라진 이후, 나는 류은채의 안내를 받아 내 전용 접견실에 도착했다. 어차피 적하에게는 줄 것도 있었으니, 마침 잘 됐다.

류은채가 내준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적하가 쭈뼛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한 샴푸향이 확 밀려들었다.

수련에 적합하지 않은 새하얀 원피스에, 그새 화장까지 마쳤는지 아까보다 피부에 화색이 돌았다.

“그... 죄송해요.”

“아냐, 신경 쓰지 말고 앉아.”

“저요?”

“그래.”

“저는 나가 있으면 되겠습니까?”

의외로 류은채가 먼저 물어왔다. 나와 적하 사이에 있던 일을 알아차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은채는 들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적하를 배려하는 편이 낫겠지.

탁- 이윽고 류은채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혹시 모르니 기막을 쳤다. 적하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대장?”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선물.”

“네?”

“내공 소화는 다 했어?”

끄덕. 이전에 늘어난 내공을 갈무리하는 건 끝낸 모양이었다.

“왜 이리 부끄러움이 많아졌냐? 안 어울리게.”

“대장 얼굴 볼 때마다 자꾸 생각나잖아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게 꽤 귀엽다. 나는 조금 과장되게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 안아 보자.”

“싫어요.”

입으로는 싫다면서도 내 옆에 딱 붙어서 앉았다. 나는 상자를 열었다. 청량한 기운이 주변 가득 퍼졌다. 안에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환단이 들어있었다. 적하의 눈동자가 동글동글해졌다.

“영약?”

“오다 주웠다. 너 가져라.”

“...왜요? 오다 주웠다니. 언제 적 농담이에요.”

“네가 먹는 게 가장 효율이 높을 거 같으니까. 무신제 우승 보상으로 받긴 했는데, 계륵이야.”

일단 나나 한여름은 효과가 없다. 태양이나 월음지체 특성상 숨만 쉬어도 내공이 늘어나는 데다가, 한여름에게 물어봤더니 빙정 조각을 떼서 아예 흡수했다던가. 어쩐지 날이 가면 갈수록 내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심지어 조각이 아니라 아예 핵폭탄급의 화마정을 몸 안에 품고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이미 충분히 영약을 먹기도 했고. 천하연이야 화경에 이미 도달한 데다가, 어릴 적부터 밥 대신 영약을 먹은 수준이라 더더욱 의미가 없었다.

다른 적룡대 대원들은 원체 뒷배가 튼튼한 탓에 필요하면 알아서 구해 먹을 정도는 됐다.

결국, 내 사심을 제외하더라도 가장 적합한 복용 대상은 적하였다. 청성이 쫄딱 망해서 그런지, 이전에 확인했을 때 적하 내공은 그리 많진 않았다. 경지에 딱 맞는 정도.

“진짜 제가 먹어도 돼요?”

적하가 우물쭈물하며 받아들길 망설였다.

“고작 이런 거에 뭘 그러냐.”

“딱 봐도 보통은 아닌 거 같은데요.”

“멸문한 무당의 태청단이라던가. 같은 도가 계열이니 효과도 더 좋지 않을까?”

“태청단이요...?”

“어. 태청단.”

“...청성이 멀쩡할 때도 구하기 힘든 영약이라 들었는데.”

“잔말 말고 받아. 강제로 입에 넣기 전에. 아니다, 지금 먹어.”

“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마음의 준비는 무슨.”

나는 곧장 영단을 까서 적하의 입에 집어넣었다. 괜히 아끼다 똥 되느니 수하를 확실하게 강화시키는 편이 낫다. 이젠 혼자도 아니니.

내 우악스러운 손길을 이기지 못한 적하가 결국 영약을 꿀꺽 삼키고, 다급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확실히, 효과가 좋긴 하네.’

적하의 몸에서 일어난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영약으로 경지를 돌파하는 예도 있다더니. 괜히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아닌듯했다.

느긋하게 적하가 운기조식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던 중.

메시지 하나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공자님. 무림감찰부 박수호입니다.]

연락처를 주고받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상대였다.

***

영약 복용 이후 신나서 날뛰던 적하를 반쯤 쓰러질 때까지 받아주고.

나는 저녁 시간에 맞춰 조용히 지부를 빠져나왔다. 지부 인근, 목현천木峴川이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전에 봤던 남성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어, 오셨습니까.”

그가 나를 보며 반색했다. 조금은 떨떠름했다.

“예, 그리 오랜만... 까지는 아니군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이건 제가 사겠습니다.”

굳이 만류하진 않았다. 박수호 팀장이 커피를 가지고 내 쪽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집었다가 다급히 놓았다.

“앗뜨뜨,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일찍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동의합니다.”

“저번에 했던 제안은 유효합니다.”

“윽. 그건 됐습니다.”

박수호 팀장이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차피 나도 먹힐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 환기 차 내지른 거지.

“용건을 알고 싶군요. 국정원에서 무슨 지령이 떨어진 겁니까?”

박수호 팀장이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페 내에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 무인들은 기막이라는 걸 칠 수 있다던데. 가능하십니까?”

“이미 쳤습니다.”

기막이야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쳐버렸다.

“역시. 혹시, 개성에서 있던 일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합니다.”

그곳의 풍경은 아마 잊기 힘들 거다. 이 세계가 얼마나 시궁창인지 처음 제대로 실감한 장소였으니까. 고깃덩이처럼 걸려있던 수백 구의 시체들, 끔찍한 시귀들의 몰골과 악취는 아직도 생생했다.

“먼저 말도 없이 공자님의 행적을 조사한 데 관해, 사죄드리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나에 관해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았다면 훨씬 실망했을 거다. 무능하다는 얘기니까. 물론 그가 무능할 리는 없었으니, 당연히 나에 관해선 철저하게 조사하려 했을 거다.

“안태준 원사 기억하십니까?”

“예. 로미오 원이라는 콜사인을 쓰던 분이셨죠. 무슨 일 있습니까?”

안태준 원사. 원래라면 죽었어야 할 사람을 내가 파일로 살린 적이 있었다. 개성 시설의 뒷수습을 담당하기도 했었고.

“아뇨. 신변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활발하게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다만, 지하시설에 관련된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이후 일에 관해 전혀 관심 가지지 않았었다. 당시에는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했다.

“문제라면 어떤 부분에서?”

“안태준 원사의 보고 이후, 윗선에서 직접 나와 수습을 마쳤습니다. 안태준 원사가 함구했는지 보고 내용에 공자님에 관한 내용은 빠져있더군요. 문제는 이후입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한, 대규모 시설이 발견됐음에도 윗선에서는 조용히 묻었습니다. 압박이 있던 겁니다.”

“윗선이면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는 겁니까?”

“개성을 담당하는 제4작전사령부 사령관까지입니다.”

“4작사 사령관이면 중장일 텐데요. 압박에 쉬이 굴복할 계급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배중명 중장입니다. 압박을 넣은 자는 4선 국회의원 당재섭입니다. 지역구는....”

“사천?”

“...예. 사천에서만 4선을 내리 연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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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이 기반인 4선 국회의원. 당씨 성인 걸로 보아 당문 출신. 이런 세상에선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자에 가까웠다. 본인들 딴에는 일이 퍼져나가는 걸 숨기려고 묻은 것 같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당문이 관여되었다는 심증에 확신을 더해주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이켰다. 입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본인은 뜨거운 커피를 시켰으면서 나는 따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망설임 없이 권한 건, 박수호가 내 취향까지 파악했다는 얘기로 봐야 할지. 아니면 그저 운에 불과했을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니까. 컵을 내려놓고 물었다.

“단순히 그 일에 대하여 확인차 오신 건 아닐 텐데요?”

박수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개성에 이어 남해에서 발견된 대규모 생체 실험 시설. 그것을 처리하고 무림맹에 직접 고발한 분이 공자님이라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아쉽지만, 정파 내부 결론은 대충 나온 모양입니다. 명확한 혐의는 없음. 사교의 소행으로 추정됨.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당문에 대한 공식적인 처벌은 불가능할 거라 이미 예상했으니. 증거를 쉽게 남길 리도 없었다. 신교의 정보집단들도 하나같이 그리 결론을 내린 지 오래다.

그저, 당문과 혈교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정도면 족했다. 다른 자라면 몰라도 독고패 총장이나 무림맹주 같은 몇몇 원로들은 분명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거다. 당장은 그거면 됐다.

박수호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을 시작했다.

“천마신교에서 어떻게 결론을 내렸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내린 답은 하나입니다. 둘은 관계가 있으며, 둘 다 당문. 그것도 당문제약이 관련되어 있을 거다. 명백한 증거는 잡지 못했지만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교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습니다만... 팀장님이 관여하기엔 너무 위험한 일 아닙니까? 윗선에서 허가가 나질 않았을 텐데.”

“...제가 여기 온 것부터 일단은 비밀입니다.”

여전히 박수호가 무얼 위해 날 찾은 건지는 모호했다. 당문 관련된 일은 일개 국정원 팀장이 건드리기엔 덩치가 너무 컸다. 일반인 기준에서는 쳐다도 보기 힘든 4선 국회의원조차 작은 가지에 불과할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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