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31)

자연스럽게 미간이 찡그려졌다. 지독한 악취와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감시탑 안은 피바다나 다름없었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살점과 내장 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맹수가 압도적인 힘으로 시신을 찢어버린 느낌이다.

‘선달 블롱? 아니.’

아까 봤던 마물을 잠깐 생각해 봤지만, 그것들은 반드시 식인을 한다. 특히 내장을 파먹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데, 이 시신들에서 그런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강철 장벽 내부,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은은한 불빛이 감도는 당문제약 시설들이 보였다. 꽤 대규모의 건물들이 폐광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미 짐작한 대로, 당문제약은 폐쇄된 광산을 이용하여 실험시설로 개조했다.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처럼, 폐광은 증거를 은닉하기도 좋으니까. 하물며 침식지대 내부에 있는 폐광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살해당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은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나마 온전한 시신을 토대로 판단해 보면, 시반屍斑이 고정되지 않았고, 부패도 진행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법의학 지식을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아마도 반나절 이내.’

추측에 불과했지만, 어찌 됐든 내부에 무언가 일이 발생했음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시신이 이런 식으로 방치되진 않았을 테니까.

타닥-

아래로 내려와 조심스럽게 시설로 접근했다. 아릿한 혈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천천히, 외곽부터 시작해서 주변을 훑었다.

“....”

감시탑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연구 시설의 희미한 백광 아래에는, 온갖 형태로 산산이 조각 난 시신들만 가득했다.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혈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새하얀 외벽에 붉은 핏물이 아롱졌다.

나보다 먼저 습격한 사람이 있던 건지, 아니면 당문제약에서 증거를 인멸하려던 건지는 모르겠다.

고요한 시설 내부에는 죽음만이 가득했다.

[치직- 치직-]

통신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채팅 기능을 쓰면 한여름에게 연락이야 보낼 수 있겠지만, 일단은 조용히 내부로 잠입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사고가 붕 떴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어둑어둑한 방들이 나왔다. 지하와 연결되어 있는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내부에는 잠든 듯이 죽어있는 아이들의 시신이 가득했다. 많아야 열 서넛을 넘지 않는.

“....”

이건 습격자와는 별개였다. 습격자는 아이들의 시신은 건드리지 않았다. 투명한 관에 담겨있는 아이의 시신 일부에서 혈관이 푸르죽죽하게 돋아난 모습을 보아하니, 독이라도 주입한듯했다.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제약이 많을 뿐이지, 임상시험은 당연하게도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게 가장 좋다. 일반적인 약물이라면 환자들을 대상으로 모집하여 시행하면 된다.

허나, 독을 ‘자원해서’ 먹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게다가 이 시설은 단순히, 독만 연구하는 곳이 아니었다.

수술대와 정체 모를 약품과 도구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걸 보면, 마치 의료 시설 같기도 했다.

그런 방들만 수십 개가 넘었다. 기감으로 감지했으나 살아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누가...?’

나는 점점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피로 이어진 길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렇게, 반쯤 열린 철문까지 도달했을 때.

내부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끼이익- 조심스럽게 철문을 열어젖혔다.

복도의 밝은 조명이 어둑어둑한 내부를 비추면서, 분홍빛 머리칼이 반짝였다.

“....”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 뒷모습.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피바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던 여성이, 찬찬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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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천변만화술을 풀었다.

고양이처럼 가느다란 동공이 점점 확장됐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매와 살짝 벌어진 입. 내가 그녀의 존재를 예상 못 했듯이, 베아트리체도 마찬가지였다. 볼을 따라 흘러내린 핏자국이 마치 피눈물처럼 보였다.

“후배님이 왜...?”

멍한 목소리로 그녀가 읊조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전부 선배님이 한 겁니까? 아, 오해는 마시고. 딱히 탓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묻는 거니까.”

찰박- 찰박-

걸을 때마다 끈끈한 핏물이 신발 바닥에 달라붙었다. 붉은 비상등만 아스라이 감도는 내부 상황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마치 다진 고기처럼, 사방에 갈려 나간 살점들이 눌러 붙어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나를 보며 베아트리체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품에서 해킹 장치를 꺼냈다. 가장 처참한 주변 풍경에 걸맞게, 이곳은 시설 전체를 통제하는 장소인듯했다.

“뭘 그리 죄인처럼, 칙칙하게 거기서 그러고 있습니까.”

복도의 밝은 빛줄기에서 벗어나, 쭈뼛거리며 어둠 속으로 숨어든 베아트리체에게 말했다.

“...내가 한 건 맞아.”

뒤늦게 대답이 들려왔다. 베아트리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통제실 콘솔을 찾아 해킹 장치를 설치하고, 나는 뒤돌아서서 베아트리체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겠죠.”

“후배님은... 그, 괜찮아?”

“뭘 말입니까?”

“오면서 봤잖아.”

그녀가 당문에 모종의 원한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추측한 바였다. 문제는 그 당문이 혈교와 한통속인 것 같다는 거지만, 사정이 있었겠지. 정파끼리도 안 맞으면 틀어지는 마당에.

“오면서 봤지요. 죄 없이 죽은 아이들의 시신을 말이죠.”

“그거 말고. 알면서.”

나는 해킹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걸 한 번 더 확인했다. 진행 상황을 뜻하는 초록색 눈금이 조금씩 늘어나는 걸 보며, 베아트리체에게 답했다.

“어차피 저도 전부 죽일 생각으로 들어온 겁니다. 살릴 놈들이 있었다면,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겠지요. 결과가 딱히 다를 건 없습니다. 근데 선배님도 이 정보 필요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증거는 굳이 필요 없다는 건가.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한 습격이 아니라, 순수하게 시설 파괴를 위한 행위였다는 뜻이겠지.

“그럼 이건 제가 가져갑니다?”

어느새 해킹과 정보 추출까지 끝난 장치를 다시 빼내 베아트리체 눈앞에서 흔들었다.

“응.”

보아하니 여기가 시설의 끝이었다. 내부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화면들을 살펴봐도, 시설 내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듯했다. 베아트리체가 날뛴 덕에, 생각보다 일이 허무하게 끝났다.

“더 할 일 없으면 나갑시다.”

찰박찰박-

내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베아트리체가 조금 뒤쪽에서 따라왔다. 걸음걸이에서부터 혼란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이 시설에 비교적 평범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허나, 굳이 그녀를 탓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정파의 대협도 아니고. 손속이 잔혹하긴 했지만, 어차피 나도 남 탓할 처지는 아니었다. 이제 와선 잔인한 시신 따위는 별 감흥도 없었고.

[들려?]

그렇게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한여름에게서 채팅이 왔다. 통신은 여전히 먹통이었지만, 상태창 기능만큼은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가만 보면 이것도 사기긴 사기다.

[들려. 이제 나가려고.]

[벌써?]

[먼저 온 손님이 있더라고.]

[적 말고 손님?]

[베아트리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한바탕 시원하게 날뛴 거 같더라.]

[어쩐지.]

[어쩐지?]

한여름의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묘했다.

[문제가 생겼어. 최대한 빨리 그 지역에서 벗어나.]

[경로는 왔던 그대로?]

[응. 가면서 설명해 줄게.]

[잠시.]

나는 베아트리체를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경공은 가능합니까? 힘 꽤 쓰신 거 같은데.”

표정에서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와 다르게 음색에 힘도 없었다. 이 거대한 시설을 혼자 휘젓고 다녔으니, 쉽진 않았을 거다. 보아하니 은신술도 꽤 쓴 모양이고. 살생석인가 하는 에너지원이 있긴 해도, 무한히 기운을 공급해줄 리는 없었다.

“얼마나 달려야 하는데?”

“좀 걸립니다. 이 지역을 확실히 벗어나야 해요.”

“그럼 운기조식 필요할 거 같은데....”

느긋하게 운기조식할 시간은 없었다. 한여름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업히실 겁니까? 아니면 제가 안고 갑니까?”

“나를?”

“예.”

“후배님은 날 믿어? 만약 뒤에서 공격하면 큰일이잖아.”

“믿으니까 선택하시면 됩니다. 앞? 뒤?”

“...뒤에 업힐게.”

등판에 푹신하고 따스한 감각이 느껴졌다. 베아트리체가 내 목에 자신의 팔을 두른 걸 확인하고, 나는 그녀를 업은 채로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무슨 일인데?]

[근처 군부대가 대규모로 움직였어. 훈련 명목이라는데, 천비각 추정대로라면 태백시 침식지대 전체를 봉쇄하려는 움직임에 가까워.]

[군부대 정도면 문제 될 거 없지 않나?]

일반인으로 구성된 군인들이 아무리 많아 봐야, 무인들이 벗어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나나 베아트리체 정도 되면 그런 법이다.

[군부대뿐만 아냐. 방금 침식지대로 들어간 자들. 서문세가 제천대制天隊야. 숫자는 대략 오십여 명. 이들보다 뒤쪽이 문제야. 제천대 진입 이후, 녹포 무인들이 이끄는 무인들이 모여드는 게 확인됐어. 숫자가... 수천 단위더라.]

[녹포 무인이면 당문?]

[천비각 말대로라면 당문일 가능성이 구할 이상. 천라지망이라도 펼칠 기세야.]

[일단 적룡대는 박수호 팀장이랑 팀원들 대피부터 도와줘. 외곽 구석진 곳에 있긴 한데 혹시 모르니. 이쪽은 알아서 빠져나갈게.]

[알았어. 국정원 요원들 대피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 조심해.]

[너도 조심해. 싸움은 최대한 피하고.]

한여름과 대화하는 사이에 벌써 시설 부지는 벗어났다. 나는 왔던 대로, 짙은 운무에 휩싸인 선달 블롱 출몰 지역으로 향한 후. 근처 고층 건물에 들어갔다. 당장 벗어날 수도 있었지만 확인할 게 좀 있었다. 중간층에서 일단 멈추고, 베아트리체를 조심히 내려놓으며 기막을 쳤다.

“잠시 얘기 좀 하죠.”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덕에 여기라면 적어도 당장 발각될 위험은 적었다.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시설에 대한 정보, 어디서 얻은 겁니까?”

메마른 콘크리트 먼지가 흩날리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녀의 노란 눈동자가 빛났다.

“국정원이랑 끈이 닿아 있는 정보 길드를 하나 알거든. 최근 무림감찰부 팀장 하나가 밝혀낸 걸 정보 길드 쪽에서 잡아챘어.”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박수호 팀장도 아마 이런 걸 예상하진 않았을 거다. 그래도 국정원이라는 놈들이, 설마 다른 정보집단에 넙죽 정보를 가져다 바쳤을 줄이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썩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길드가 잡아챌 정도면, 다른 곳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였다.

“선배님이 시설을 아작낸 걸 다른 곳에서도 파악한 모양입니다. 아니면 단순 우연일 수도 있지만, 상황이 꽤 난잡하게 흘러가는 중입니다.”

“우연은 아닐 거야. 보통 이런 시설들은 일정 주기 이상 연락이 끊기면 문제가 생긴 거로 간주해. 아니면 내가 놓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경험이 좀 있으신가 봅니다?”

“...이런 대규모 시설은 나도 처음이야.”

작은 시설은 몇 번 박살 낸 적이 있다는 얘기군.

베아트리체가 곁눈질로 슬쩍 내 기색을 살펴댔다.

수백 명을 학살한 사람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순둥순둥한 얼굴이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행동만 보면 은근 귀엽다. 나도 미쳐가는 건지 원.

“서문세가의 제천대가 곧 이쪽 시설 근처로 들이닥칠 겁니다. 길어야 20분 이내. 그 뒤에는 당문 소속으로 보이는 무인이 수천 단위. 그 뒤에는 군부대가 봉쇄 중이라더군요. 당문도 꽤 급한가 봅니다. 시설을 아예 삭제할 기세인 걸 보면.”

“이상한데.”

내 말을 듣던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의합니다. 서문세가의 제천대는 명백히 이질적이지요.”

서문세가의 ‘대隊’급은 다른 세가로 따지면 단이나 당급에 가까웠다. 규모도 클뿐더러, 정파에서 손꼽히는 무력대에 속했다. 게다가 제천대는 무림맹주인 검왕 직속. 절대 쉬이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었다.

제천대가 움직였다는 얘기는, 검왕의 의중이 함께한다는 뜻도 됐다.

가능성은 둘이다.

검왕이 당문과 협조했을 경우.

만일 그렇다면 빠르게 시설의 이상을 파악하고 습격자를 처단하기 위해 제천대가 돌입한 걸 거다.

검왕이 당문과 무관계할 경우.

그렇다면 검왕 역시 베아트리체처럼 어디선가 정보를 얻어 진상 규명을 위해 제천대를 파견했다는 얘기였다.

후자라면 제천대는 살아 돌아가기 힘들 거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으니, 여기서 제천대가 몰살당해도 마물의 소행으로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후배님은 어쩌게?”

“저는 상황 좀 보고 벗어날 생각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선배님 혼자 가셔야 할 거 같은데... 운기조식부터 하시지요. 호법서겠습니다.”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베아트리체가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상당히 무방비한 태도였다. 만일 내가 여기서 베아트리체를 공격한다면 닭목 비트는 것보다 쉽게 죽일 수 있을 텐데.

짧은 운기조식 이후, 베아트리체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이제 괜찮아.”

아까와는 목소리부터 달라졌다. 고작 이 짧은 시간 만에. 회복력이 남다른듯했다. 나는 천변만화술로 다시 얼굴을 바꿨다.

“아까 잘못 본 게 아니었네.”

“예. 저는 그럼 상황을 좀 살피다 이탈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

입술을 살짝 깨문 베아트리체와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 나는 건물 옥상으로 내달렸다. 슬슬 제천대가 시설 인근에 도착할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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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교血敎 십삼사도十三使徒 베아트리체.

그녀는 제갈세가 직계인 아버지와 유럽의 오래된 명문가, 바토리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바토리 가문에서 수백 년에 한 번꼴로 태어난다는 순혈지체純血之體.

그리고 제갈세가 특유의 영민한 두뇌를 타고난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크나큰 불행이었다. 일찍이 그녀의 체질을 알아본 수많은 무림 집단이 어린 시절부터 노려온 데다가, 혼란스러운 제갈세가의 비사까지 얽혀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수많은 일을 홀로 겪으면서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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