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온기를 느끼며, 베아트리체는 가슴에 양손을 꼭 모으고 위쪽을 바라봤다. 물끄러미 노란 눈동자만 빛내던 그녀는 이내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랐다.
또각. 또각. 또각.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혈공 진기가 꿈틀거렸다. 전대 혈교주가 그녀에게 직접 전수한 진마숭혈공珍魔崇血功은 경지가 상승할수록 광기를 품는 것 외에 그 어떠한 무공과 비교하여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체질인 순혈지체는 혈공 광기가 몸을 침식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으니, ‘약간의’ 감정 변화를 제외하면 사실상 부작용조차 없다 봐도 무방했다.
“하아....”
베아트리체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날숨이 새어 나왔다.
진마숭혈공의 특징은 동공動功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으니.
운기조식으로 한 줌 진기를 확보한 순간부터 회복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보보마다 기세가 확연히 돌변했다.
김무공은 혼자 벗어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당문이 얼마나 집요하고 표독스러운 집단인지 알고 있다.
‘설마 여기서 후배님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혹여나 김무공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혼자만 쥐새끼처럼 벗어나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김무공이 필요했다.
게다가, 자신이 그런 참사를 저지른 것을 보고도 그는 사정을 묻지 않았다. 탓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그녀를 대했을 뿐이다. 그것이 몹시도 기꺼워서, 그녀는 입가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피바다 한가운데서 웃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그녀도 알고 있었다. 너무 미친년으로 보이는 것도 좀 그러니까.
“응. 역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
나는 시설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건물에서 제천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아닌 거 같은데.’
제천대의 움직임은 습격자 처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시설을 철저히 조사하고자 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처참한 광경에 다소 충격을 받은 것도 같았다.
‘아직은 아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저것 자체가 습격자를 꾀어내려는 함정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 쪽은 대피 끝났어. 나오자마자 군이 모든 지역을 틀어막더라.]
한여름이었다. 박수호 팀장과 팀원들은 탈출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한시름 놓았다.
[다행이네.]
[넌?]
[일단 상황 좀 보고 가려고.]
[위험하지 않아?]
[혹시 모르니까 탈출 루트 좀 잡아줘. 천비각에게 말하면 될 거야.]
[그건 이미 몇 개 잡아놓긴 했는데. 혼자? 아니면 다수?]
[만일 대피할 일이 생긴다면 다수. 나 혼자 빠져나오는 건 그리 어렵진 않거든.]
[제천대 때문인가 보네. 전투는?]
[있을 거라 가정. 봉쇄한 병력 전부 돌파할 생각 하고.]
[쉽진 않을 거야. 무인들이랑 군 병력이 쫙 깔렸어. 주변을 떠다니는 드론만 이미 수백 대가 넘어. 제천대 규모면 이동하는 내내 감시받을 거야. 포격도 쏟아질 거고.]
이 세계에서 무인은 비대칭 전력이다. 문제는 그 비대칭 전력이 마음대로 움직이면서 크기가 고작 인간 사이즈라는 거다. 무인 단독 임무도 가능하지만, 무인과 군 병력이라는 일종의 제병합동 역시 가능하다는 점이 진정한 무서움이었다.
당장 마물들 잡을 때만 해도 잡것들은 현대 무기로 때려잡고, 그사이 힘을 아껴놨던 무인들이 나서서 강력한 마물들을 썰어버리는 식이었으니까. 사부처럼 규격 외가 아니라면 말이다.
[해봐야지. 그러니까 안내 잘 부탁해.]
[...알았어. 확정 나면 탈출 루트 좌표 보내줄게. 좀만 기다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몇 가지 탈출 루트가 날아왔다. 나는 손목에 찬 간이 디바이스에 경로를 업데이트하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쓸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근데 쓸 일이 없다는 건, 서문세가와 검왕이 당문과 한통속이라는 거니.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골치 아프긴 했다.
‘응?’
갑자기 제천대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모여들더니 시설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다가온 군 병력이랑 정면으로 마주치고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청력에 내력을 집중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먼 거리인데도, 귓가에 제천대와 ‘비원각주’라는 자의 대화가 낱낱이 들려왔다.
‘그런 거였군.’
나는 흑룡검을 뽑아 들고 일어섰다. 대충 답은 나왔다.
***
제천대 부대주 서문원길.
검왕의 명을 받아 은밀히 조사하러 나왔던 그는, 눈 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검왕의 수족으로 있으면서 온갖 추악한 꼴은 다 봐왔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당문제약 시설이 확실합니다. 정보대로, 아이들을 공급받아 불법적인 실험을 해왔던 것도 명료합니다. 희생자의 숫자가 세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내부로 진입했던 수하가 다시 나와 서문원길에게 보고를 올렸다. 하늘을 억제한다는 오만한 명칭에 걸맞게, 제천대원은 하나하나가 일류에서 절정고수인 서문세가의 주축이었다.
“우리 전에 침입자가 있었던 모양이군.”
서문원길이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예. 시기가 공교롭습니다. 저희가 들이닥치기 직전에 습격자들이 빠져나간 듯합니다.”
“일단 증거 확보부터 확실히....”
갑자기 서문원길의 기감에 심상치 않은 것이 감지되었다.
쐐애애애애액-!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성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 접근했다. 서문원길은 즉시 발검한 뒤, 하늘 위쪽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향해 검기를 쏟아부었다.
콰과과과과광-!
호풍환우처럼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검기에 다가오던 것들이 폭발하며 잿빛 하늘을 밝혔다. 수백 개가 넘는 광원이 반짝이며 사라졌다.
“부대주님?”
“당장 대원들을 시설 밖으로. 증거 확보는 이후 상황에 따라 한다.”
“알겠습니다.”
수하가 절도있게 포권하고 시설 내부로 사라졌다. 날아오던 것들이 시설에 꽂혔으면 안에 있던 대원들이 위험했다. 명백한 군용 현대무기였다. 미사일이나 포탄 계열.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다.
‘군이 개입했다? 무슨 연유로?’
서문원길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무인이 아무리 초인이라 하나, 현대무기의 위력은 절대 얕볼 게 아니었다. 호신강기라 해서 무한한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이곳은 ‘당문제약’의 시설이다.
‘군이 개입했다면 당문도 개입했다는 말이다.’
짧은 순간 서문원길은 판단을 마쳤다. 증거를 확보한다고 시간을 지체했다간 득보다 실이 많을 거다. 자신은 부대주로서, 제천대 대원들을 살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내부 시설에 들어가 증거를 확보하던 제천대 대원들이 다시 밖으로 모여들었다. 전원 모여든 걸 확인하고, 서문원길은 검을 들어 올렸다.
“즉시 이곳을 벗어난다.”
여전히 발검한 채로, 서문원길은 앞장섰다. 그렇게 시설의 정문에 도달했을 때.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수십 대의 장갑차를 보았다. 마치 퇴로를 막는 것처럼, 장갑차들의 벽이 세워지고 내부에서 순식간에 병사들이 내렸다.
‘아니, 병사가 아니다.’
군 병력이라 생각했던 자들은 무인들이었다. 군용 장갑차에서 내리는 무인들의 기세가 자못 형형했다. 게다가 장갑차의 포탑은 명백히 제천대를 노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서문원길을 비롯한 제천대는 정면을 경계하며 멈춰섰다. 다짜고짜 공격하는 대신,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을 가르고 한 사내가 나타났다.
저벅. 저벅.
파리한 입술과 창백한 피부, 여성 못지않은 가느다란 신체. 기다란 녹색 코트를 걸친 남성은 어찌 보면 상당히 연약해 보였다. 마치 검 한번 휘두르면 격살할 수 있을 것처럼.
허나, 서문원길은 저 사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얼마나 위험한 자인지도. 서문원길이 짓씹듯이 내뱉었다.
“고매하신 당문의 비원각주祕苑閣主께서, 한낱 침식지대에는 무슨 일이시오?”
비원각주라 불린 사내가 눈을 반개하고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물을 말이군. 서문세가의 제천대가 당문제약의 시설은 왜 습격한 거지? 검왕의 의중인가? 아니면 서문세가가 당문과 전쟁을 하고자 함인가?”
“우리가 습격하지 않았소이다. 시간만 봐도 알지 않....”
“아니. 습격은 너희가 한 것이다.”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섬찟한 감각이 서문원길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서문원길은 물었다.
“정녕 이래야 하겠소? 나와 제천대는 맹주님의 명을 받아 여기 온 것이오. 후환이 두렵지도 않소?”
“우리가 고작 서문세가와 검왕 따위를 두려워해야 하나? 감히 당문을 건드린 죄, 너희들을 모두 참살하고 서문세가와 검왕에게 물으면 그만이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지극히 오만한 소리였으나, 여기서 제천대가 모두 죽는다면 비원각주의 뜻대로 될 게 분명했다. 서문원길은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꽉 주면서, 제천대에게 신호를 보냈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살아서 이 소식을 전해야 했다.
각오를 마친 서문원길의 검에 푸른빛 기운이 아롱지기 시작했다.
비원각주가 무료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전력 차이는 현격했다. 제천대가 여기서 몇 벗어난다 해도, 군이 협조한 천라지망을 뚫고 살아 나가는 건 요원했다. 오직 제천대의 시신만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비원각주의 입꼬리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전부 죽여라.”
그렇게,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깨고 비원각주가 손을 내린 순간.
꽝-!
천공에서부터 칠흑의 검 하나가 내리꽂히며 제천대를 가로막던 수백의 무인을 찍어눌렀다. 검을 중심으로 강풍과 함께 휘몰아친 경파에, 수십 대의 장갑차 포탑이 찌그러진 캔처럼 망가졌다. 기세를 끌어올렸던 무인들은 관절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거나 두개골이 으스러지고 박살 나면서 대부분 즉사했다.
“크윽...!”
강대한 내력을 지닌 비원각주조차,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무슨...?”
서문원길이 눈을 부릅뜨고 정면의 참상을 응시했다. 고작 한 번의 기습에, 살아남은 자들은 몇 남지도 않았다.
공격과 동시에 일어난 엄청난 분진과 흙먼지 사이를 가르고, 한 사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땅에 꽂혀있던 검을 뽑아 든 사내가 무심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찰나지간刹那之間.
고요한 침묵을 뚫고, 사내의 발치에서 일렁이는 불길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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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불꽃이 대지에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비원각주 앞으로 다가간 김무공이 검을 든 반대편 손바닥을 내질렀다. 업화가 깃든 천마수의 일격이었다.
“크윽...!”
뒤로 사정없이 튕겨나며 피를 울컥 뿜어낸 비원각주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퍼버버벙- 굉음이 울리며 유형화된 진기가 폭발했다.
‘얕았다.’
비록 위력을 제한했다 하나 봉마검형이었다. 거기에 천마수까지 때려 박았는데도, 비원각주는 방어초를 펼칠 여력이 있었다. 이전에 싸웠던 혈교 삼사도와 비교해도 경지가 절대 모자라지 않았다. 내공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탓에 잠시간 숨 고를 틈이 필요했다.
다만, 저번과 다른 점이 있었으니.
“누군지는 모르나 고맙소!”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서문원길이 곧장 비원각주에게 검을 휘둘렀다. 선공은 비원각주 쪽에서 했고, 생사를 결해야 하는 사이가 됐으니 서문원길의 검에 망설임 따윈 없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철선鐵扇을 휘두르며 서문원길의 검을 막은 비원각주가 품에서 동그란 구체를 꺼내 사방에 투척했다.
꽝-!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흐린 먼지가 일어났다. 수증기처럼 퍼진 뿌연 안개 속에서, 녹포를 입은 사내들이 나타나 비원각주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들,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마라!”
크게 소리친 비원각주가 빠르게 뒤쪽으로 후퇴했다.
정면을 가로막은 녹포 사내들과 싸우던 김무공이 침음을 흘렸다. 녹포 사내들은 마치 적혈귀처럼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었다.
죽어가면서도 비명 한 자락 내지르지 않았다.
단순 무력도 무력이지만, 녹포 사내들은 사망 즉시 광범위한 폭발을 일으켰다. 건곤대나이로 폭발의 여파를 최대한 줄이고 있었으나, 이 넓은 범위를 전부 틀어막는 건 무리였다. 막대한 화력과 목숨이 오로지 비원각주의 이탈을 위해서 소모되었다.
겉보기로는 마공이나 혈공과 비슷했지만, 비원각주도 그렇고 이들이 익힌 무공은 명백한 정공에 속했다.
‘까다롭다.’
정종 무공에는 만마를 제압하는 천마신공의 공능도 기대할 수 없었다. 천마군림보 역시 위력이 반감됐다.
상황이 문제였다.
비원각주를 쫓으려면 쫓을 수 있었으나, 김무공의 현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천대를 살려 보내는 것에 있었다.
검왕과 당문이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이상, 차후를 위해서도 그게 훨씬 중요했다. 이윽고 앞을 가로막던 녹포 사내들이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비원각주는 이미 저 멀리 달아난 채였다.
“...도움 고맙소이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서문원길이 김무공을 보며 포권했다. 미미한 경계가 서려 있었다. 김무공이 작은 카드 하나를 휙 날렸다.
“이것은 설마...?”
카드를 낚아챈 서문원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전대 맹주님의 신물 아닙니까?”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제천대원 중 하나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이리저리 검증해보던 서문원길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독고패 전 맹주님의 명으로 오신 겁니까?”
서문원길이 정중하게 카드를 다시 건네며 물었다. 한순간에 경계심이 풀어지며 말투부터 훨씬 공손하게 변했다.
“그저 인연이 조금 있었습니다. 신뢰의 상징으로는 부족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독고패 전 맹주님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도움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여유가 많지는 않습니다.”
김무공이 무거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제천대 중에 사망자는 없었지만, 폭발을 막아내느라 지친 사람은 허다했다. 문제는, 느긋하게 운기조식하며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동한다!”
서문원길이 소리쳤다.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서라도 지금은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탈출 루트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김무공이 먼저 앞장섰다. 원래라면 안전했던 길이야말로 사로死路였다. 지금은 마물 출몰지역 인근이 오히려 안전했다. 독고패 총장의 신물 덕에 제천대도 반발 없이 김무공을 따랐다.
꽈과과과광-!
일순 지축이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일행이 자리를 벗어난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근처에 광범위한 포격이 떨어졌다.
날아오는 포탄을 미리 감지하고 탄착지점에서 피하는 게 가능한 무인들을 상대하는데 최적화된, TOT(Time On Target) 방식의 포격이었다.
수백 발의 포탄이 정교하게 계산되어 일시에 떨어지는 광경을 보며 서문원길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일 별생각 없이, 평소에 다니던 길로 다녔다면 경로 전체가 포격에 노출됐을 거다.
‘대체 누구지?’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김무공은 콘크리트 빌딩을 엄폐물로 삼아서 제천대를 안내했다. 저 정도로 고절한 무인이면 이름이 없을 리가 없는데, 서문원길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근처 군부대가 당문과 결탁했습니다. 천라지망을 뚫어야 할 겁니다.”
김무공의 말에, 서문원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날아왔던 병기들도 그렇고, 방금만 해도 최소 연대 단위로 실시된 포격이었다. 그렇다면 천라지망에 동원된 건 사단급이라는 얘기일 터. 사단 다수일 가능성도 있었다.
저 사내나 서문원길은 어찌어찌 버틴다 치더라도, 제천대 다른 대원들이 문제였다. 군인들이 제천대를 죽이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힘을 깎는 건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거기에 당문이 추가된다면....’
호기롭게 부대주 자신과 5개 조만 이끌고 왔던 게 실수였다. 설마 당문이 이 정도로 막 나갈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했다.
‘명색이 정파란 놈들이.’
서문원길의 가슴에 이글거리는 분노가 깃들었다. 어린아이들을 실험에 이용한 것도 그렇고, 증거를 인멸하려고 군과 결탁한 것도 그렇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서문원길의 머릿속에서 시설 습격자의 정체에 관한 궁금증은 사라져갔다.
쾅!
앞장서서 달리던 김무공이 하늘을 향해 연신 지풍을 날렸다. 폭발음과 함께 하늘 높이 떠 있던 드론의 잔해가 추락했다.
“발각됐습니다. 지금부터는 속도를 좀 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