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도 아니고 후방 일개 분타 병력에, 무림맹 대주급 하나로는 부족했다. 다만 여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맹의 병력은 대부분 임무를 나가 있어 사사로이 차출하는 게 불가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었다.
서문정천이 직접 나선다 해도, 거기까지 도달하면 이미 늦었을 거다. 서문정천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백도 정파라는 작자들이, 설마 이 정도까지 할 줄은 예상 못 했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로 제천대가 위험에 처했다.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최대한 안전하게 구출해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군부대라도 물려야겠소. 당장 관할 사령부에 본 맹주의 이름으로 전언을 보내시오. ‘훈련 같은 개소리 집어치우고 지금 즉시 군을 물리라’고 말이오.”
윤현이 눈가를 흠칫 떨며 서문정천을 응시했다. 서문정천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진정 그리 보내면 되겠습니까?”
“토씨 하나 바꾸지 말고 그대로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윤현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천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조차 쉽지 않을 거다. 무림맹주인 자신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따라 맹주직의 자리가 유독 족쇄처럼 느껴지는 서문정천이었다.
***
“허억...! 허억...!”
제천대 부대주, 서문원길은 격한 숨을 토해냈다.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엄폐물이 많은 도심지를 벗어난 순간부터는 더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험한 산세를 따라 탈출했지만, 그걸 인지한 적들은 경로마다 온갖 방식의 공격을 해왔다.
그중에서 가장 끔찍한 형태의 무기는, 당문의 독이 섞인 화학탄이었다. 이젠 아예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마구 난사해댄 탓에.
서문원길을 포함한 제천대 대부분이 한계에 가까웠다. 그나마 사망자가 없는 게 기적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부상자가 생기는 순간, 그를 부축하기 위해 한 명의 무인이 더 전투 불능이 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평소라면 한달음에 돌파했을 거리조차 지금은 천릿길 같았다.
‘...저분이 아니었다면 진즉 끝났다.’
서문원길이 정면에서 길을 뚫는 김무공을 응시했다. 당문의 화학탄은 김무공에게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좀 더 팔팔해진 느낌까지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한동안 이어진 포화와 저지선을 뚫고 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포격이 멈추기 시작했다. 지축을 울리던 굉음이 사라지면서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5분만 휴식하겠습니다.”
제천대 상태를 힐긋 쳐다본 김무공이 멈춰 서서 말했다. 털썩. 죄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포격이 멈췄군요.”
서문원길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재개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예. 군부대의 협조는 여기서 끝일 겁니다.”
김무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무림맹에서도 사태를 인지했을 거니, 맹주가 가만있을 리는 없었다.
허나, 연맹 체제 특성상 무림맹주라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그러니 가장 먼저, 군부대에게 협박을 해서라도 당문에 협조하는 걸 멈추게 했을 거다.
‘군부대도 이 정도면 됐다 생각할 테고.’
실제로도 군부대 개입의 효과는 탁월했다. 김무공 자신이라는 변수만 없었다면, 비원각주는 진작 목표를 달성했겠지. 김무공이 긴 숨을 흘렸다.
내력을 이 정도로 끊임없이 운용해본 것도 나름의 경험이었다. 천마신공과 태양지체의 막대한 공능 덕에 아직도 내공 자체는 충분했다. 오히려 비원각주를 기습한 직후보다도 지금이 더 나았다.
‘나는 그렇다만.’
김무공 자신만 살아서 빠져나가는 건 승리 조건이 아니었다. 그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했다. 제천대의 생사가 중요했는데, 이제부터 다가올 추격을 제대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군부대의 협조가 끝나고 포격이 멈춰서 좋긴 하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이쪽의 발을 묶고 체력을 깎는 모루의 역할에 불과했다. 진심으로 이쪽을 타격할 망치는 따로 준비되어 있을 거다.
‘지금쯤 신나게 달려오고 있겠지.’
김무공이 제천대원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싸우는 건 불가하다.’
독이란 게 이래서 무섭다.
무인이면 내력으로 독기를 억누를 수 있어서 쉬이 죽진 않지만.
그렇다고 팔팔하게 날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문원길을 포함해서 다섯.’
오십 중에, 내력을 실어 칼이라도 휘두를 수 있는 인원을 추린 결과였다.
‘전혀 쓸모가 없다.’
다섯 가지곤 나머지 일행을 지키느라 방해만 될 거다. 이쯤 했으면 서로 갈라져서 운명에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증거는 이쪽에도 있다. 제천대를 살리면 확실하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게 자신이 무리해야 하는 이유까지 되진 않았다.
‘...아니.’
문득 든 생각을, 김무공은 지워냈다.
말이 운명에 맡긴다지, 자신이 돕지 않는다면 이들은 무조건 죽는다.
여기서 ‘조금만’ 더 벗어나면 생로가 열리지만, 그 조금을 못 벗어나고 따라잡힐 거다. 그럼 끝이었다.
5분. 짧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비척비척 제천대가 일어섰다. 서문원길이 무거운 낯빛으로 김무공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미 이 일행의 생사가 그에게 달려있음은 서문원길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갈라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김무공이 나직하게 말했다. 서문원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떨리는 입매에 감출 수 없는 절망이 깃들었다. 허나, 그는 최대한 담담한 기색을 가장했다.
“알겠습니다. 도움에 감사....”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중간에 김무공이 말을 잘랐다.
“예?”
“추격대는 제가 막겠습니다. 슬슬 따라잡힐 시간이 됐습니다.”
“안 됩니다. 은인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적당히 막다 빠질 겁니다. 냉정하게, 여러분들은 방해만 됩니다.”
서문원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만. 같이 싸우면 그 조금조차 못 가고 여러분들은 몰살당할 겁니다.”
“저라도....”
“혹시 모를 기동타격대의 습격을 막으려면 제천대에도 멀쩡한 사람은 몇 필요합니다.”
김무공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김무공이 동료일 경우에나 해당하는 얘기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김무공과 제천대는 생면부지의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울 이유 하나 없는.
‘아.’
무언가를 깨달은 서문원길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순간, 서문원길은 김무공에게서 찬연한 빛을 보았다.
‘말세에도 협사俠士는 있는 법인가.’
서문원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중하게 포권했다. 김무공을 중심으로 선 제천대 모두가 서문원길을 따라 했다.
“제천대를 대표하여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혹, 은인의 존성대명이라도....”
조심스럽게 서문원길이 여쭸다. 찰나의 고민 끝에 김무공이 전음을 보냈다.
[천마신교 김무공입니다. 당분간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서문원길이 눈을 부릅떴다. 무신제 우승자, 적룡대를 이끄는 신교 이공자에 관한 소문은 맹에서도 유명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능선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그리하면 활로가 열릴 터이니, 너무 당황하진 마시길.”
“...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무운을.”
제천대가 김무공의 뒤를 지나쳐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답한 김무공이 기파를 넓게 퍼트렸다.
저쪽에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쪽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예측했을 거다.
멀어지는 제천대의 기척. 그리고 제천대의 반대편.
김무공이 바라보는 정면 수km 밖에서부터 서서히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기파를 퍼트리면 퍼트릴수록, 그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선두에 일부러 기운을 쏘아내어 도발하자,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작정했군.’
마음을 다잡고 호흡을 고르던 순간.
하늘 높은 곳에서 급속도로 하강하는,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아니, 익숙한 기운이다.’
사박- 피에 젖어있는 옷자락이 펄럭였다. 분홍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사뿐한 몸놀림으로 착지한 여성이 김무공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초승달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눈매가 사뭇 아름다웠다. 여성이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안녕, 후배님. 도움 필요해?”
그녀의 숨결에는, 이전과 달리 강렬한 기파가 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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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좌하고 앉은 사내의 몸을 중심으로 녹색 회오리가 솟구쳤다. 한동안 이어지던 폭풍은 이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사내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원래부터 창백했던 사내의 인상이 더욱 새하얘진 탓에, 마치 전설상의 흡혈귀를 보는듯했다.
‘지독하군.’
핏기없는 사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김무공이 가했던 봉마검형과 천마수의 일격은, 비원각주에게 심대한 내상을 선사했다.
다급히 후퇴하여 당문의 영약까지 먹어가며 운기조식을 했지만, 악화되는 걸 틀어막는 게 고작이었다.
‘대체 무슨 무공이지?’
비원각주가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몸으로 스며든 검은 불꽃은 전신 세맥 곳곳에 퍼져나가 틈을 노렸다. 타격 부위에 내공을 집중적으로 때려 박아 호신강기를 형성했는데도 이 모양이다. 방어초를 펼치지 못했다면 즉사였다. 여전히 가슴 한편은 욱신거렸다.
지금은 침투한 적의 경력을 가두는 정도가 한계였다. 이걸 전부 제거하려면 온종일 운기조식만 해도 모자랄 터. 허나,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좋지 않군.’
냉정히 현상을 파악한 비원각주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운기조식의 여파를 피하느라 멀찍이 떨어져 있던 수하가 다급히 달려왔다. 비원각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제천대는 처리했나?”
“그, 그게... 아직입니다.”
냉랭한 비원각주의 얼굴을 보며, 수하가 흠칫 몸을 떨어댔다.
“그놈이로군.”
“예, 협력자가 생각보다 유능하여....”
“군대는 물러난 거 같고.”
“...예. 맹에서 압박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랬겠지. 아귀 같은 것들.”
군이라 해봐야 제 잇속이 우선인 자들이었다. 당문이 건네줄 당근이 매력적이라 협조한 거지, 수족처럼 부리기는 당연히 어려웠다. 계산이 틀어지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것 정도야, 진즉 예상했다.
“그리고... 무광도괴가 독단적인 판단을 내려 비무를 통해 적을 보냈습니다.”
“...그 아둔한 것이 기어코.”
“추격하는 아군까지 막아선 탓에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만, 곧 결판이 날 겁니다.”
“후우....”
비원각주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곧 결판이 날 거라?”
“그, 그렇습니다.”
“그 말에 네 목숨을 걸 수 있나?”
“죄송합니다!”
수하가 이마를 쿵 찍으며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놈들의 위치나 불도록. 내가 직접 나서겠다.”
비원각주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까와 같은 방심 따위는 이제 없을 것이다.
***
발밑의 단풍 무더기가 흩날렸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붉고 노란 단풍 사이에 서서 미소짓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은 사뭇 장관이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걸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도 시설에서 봤을 때와 달리 피부는 말끔했다. 전혀 예상 못 한 사람이라 조금 당황스러운 심정을 느끼며, 김무공이 입을 열었다.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응.”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거절할 만큼 상황이 여유롭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김무공이 어색하게 감사를 표했다. 언젠가 적으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받는 기분이란 꽤 생경했다. 베아트리체가 그런 김무공을 보며 입꼬리를 살살 올렸다.
“뭘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 사입니까?”
김무공이 뚱하게 되물었다.
“친한 선후배?”
“일단은 그런 거로 하지요.”
“귀여워.”
“...예?”
“저기 온다.”
베아트리체가 말을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내달리는 적의 선두가 보였다. 기척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대놓고 도발까지 해댄 덕에 우르르 몰려왔다.
“쳐라!”
문답무용. 선두에서 적을 이끌던 자가 소리쳤다.
사박. 낙엽을 즈려밟으며, 베아트리체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푸학-!
붉은 핏물이 아롱졌다. 베아트리체의 손짓 한 번에, 달려오던 자들의 몸이 반으로 잘려 나뒹굴었다. 반월형의 충격파가 뒤늦게 사방을 휩쓸었다.
‘...강하다.’
그녀가 제대로 힘을 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김무공의 앞에서는 무공을 펼치지 않았으니까. 핏빛 아지랑이에 휩싸인 베아트리체의 기세는 김무공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온갖 버프를 받은 김무공 자신의 능력치를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달려오던 자들이 일수에 격살당했음에도, 적들은 다시 부나방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조심하십시오.”
베아트리체에게 나직하게 말하면서, 김무공이 힘을 끌어모았다.
쿵-
묵직한 기파가 용천혈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베아트리체를 제외한 자들이 움찔하며 멈춰섰다. 경공술을 이용하여 달려오던 중이었기에, 그대로 발이 꼬여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신기하네.’
베아트리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바로 옆에서 느낀 천마군림보의 경파는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짐작조차 어려울 만큼 고절한 수법이 분명했다.
그렇게 멈춰선 자들을 향해, 김무공이 장심 노궁혈勞宮穴 인근에 모아놨던 진기를 그대로 발출했다. 즉흥적인 감각에 따라 순간적으로 쏘아낸 공격이었다.
꽈아아앙-!
거세게 휘도는 진기가 적 무리의 한가운데 떨어지며 굉음을 뿜어냈다. 태양이 강림한 것 같은 화구가 일어나며 사방이 휩쓸렸다.
“후배님, 진짜 괴물이구나.”
살아남은 자들이 있으면 따로 마무리하려고 준비 중이던 베아트리체가 감탄했다. 후끈한 열기가 살갗을 간질였다. 김무공과 베아트리체. 단둘이 손 한 번씩 뻗었을 뿐인데 나타난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