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두두둑-
화구 중심에 있던 자들은 뼛가루조차 남기지 못하고 검은 재가 되어 흩날렸고, 충격파에 의해 산산이 분쇄된 근육 뭉치와 내장 파편 등의 육편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막대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불꽃은 더 퍼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의념을 이용한 기예였다.
“...이제 시작입니다.”
“너무 화려하게 저지른 거 아냐?”
“손속에 사정을 둘 여유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긴 해.”
베아트리체가 부드럽게 웃었다. 김무공이 눈가가 살짝 움찔했다.
‘내가 미쳤지.’
문득 저 미소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자각한 김무공이 자괴감에 휩싸여 있던 중.
“저기다!”
굉음을 들은 적들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몰려들었다. 대지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원형으로 파인 구덩이를 보며 적들이 움찔했다.
“도망가면 쫓지는 않겠다.”
차가운 목소리로 김무공이 선언했다. 평범하게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저 멀리까지 음성이 퍼져나갔다.
“저런 공격을 하고도 멀쩡할 리는 없다! 비원각주님의 명을 따르라!”
뒤쪽에서 누군가가 독촉했다. 조금 짙은 녹포를 입은 당문 무사였다.
“흐응, 그러면 안 돼.”
서걱. 핏물이 촤악 번졌다. 어느새 당문 무사의 뒤쪽으로 다가간 베아트리체가 손날로 상대의 목을 쳤다. 툭- 맥없이 잘려나간 목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사박. 베아트리체가 다시 김무공의 옆에 섰다. 산보마냥 느릿한 움직임으로 보였으나, 이 자리에서 김무공을 제외하고 베아트리체의 걸음을 인지한 자는 없었다.
삽시간에 백 명이 넘는 사람의 뒤쪽으로 이동하여 목을 쳐 버린 베아트리체의 행동에, 다들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또 죽을 사람?”
야산의 어둠 속에서, 베아트리체의 노란 눈동자가 요요히 빛났다. 고작 둘 대 수백. 허나, 기세에서 밀리는 쪽은 후자였다. 수백의 무인이, 두 사람이 내뿜는 기파에 짓눌려 뒷걸음질 쳤다.
물론 지금 이 순간도, 김무공의 적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 좁은 산을 가득 메울 기세로 적들은 몰려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지루한 대치가 이어지던 순간.
꽝-!
천공에서 사내 하나가 사선으로 하강했다. 녹색 장포를 펄럭이는 모습이 자못 화려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
뒤를 한번 힐긋 쳐다본 사내가 경멸 어린 어조로 뇌까렸다.
두근두근-
눈앞의 사내를 보며, 베아트리체의 심장이 거세게 맥동했다.
[선배님?]
이상을 인지한 김무공이 전음을 보내왔다. 베아트리체의 시선은 여전히 비원각주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가 여기 있는 거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알고 있던 사실이고, 진즉 각오도 마쳤으나 막상 이리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되니 베아트리체는 희열을 감추기 힘들었다. 화아아악-! 베아트리체의 몸에서 폭발적인 내력이 용솟음쳤다.
“음?”
김무공을 경계하던 비원각주가 그제야 베아트리체 쪽을 바라봤다. 서서히 그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너?”
베아트리체가 비원각주를 인지했듯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이어요, 비원각주님.”
정중하게, 베아트리체가 인사했다.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열과 성의를 다해.
“...제갈혜?”
얼굴은 많이 달라졌다. 눈동자 색도 저렇게 요사스러운 노란빛은 아니었다. 머리 역시, 원래는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저런 이질적인 분홍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게 ‘어린 시절’의 제갈혜였다.
외형만 보고는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으나.
어차피 비원각주는 실험체 하나하나의 외형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굳이 기억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금방 폐기될 물건 같은 것이었으니.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제갈혜의 외형이라 해봐야, 저런 특징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기운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폭발적인 기운. 확실했다. 살생석이 내뿜는 불길함은 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예, 저랍니다.”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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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항상 밝은 방이었다.
코를 찌르는 약향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기계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남들과 다른 은하수같이 아름다운 은발을 보며 신기한 듯 다가왔던 아이들은, 하나둘씩 보이지 않게 됐다.
수백에 달했던 아이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시 새로운 아이들이 채우고.
베아트리체는 그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육신의 고통은 버틸만했다. 순혈지체 특유의 재생능은 가혹한 실험 과정 중에도, 베아트리체가 죽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의 고통은 별개였다.
아이가 한 명 사라질 때마다, 베아트리체는 마음속 삼각형이 조금씩 깎여나가는 걸 느꼈다.
벽이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베아트리체는 아이들이 내뱉는 단말마의 비명을 들었다. 그 순간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처지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실험쥐.’
언젠가 봤던, 새하얀 실험용 쥐와 자신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의 목적에 의해 길러지고 손쉽게 폐기되는. 당시에는 ‘어딘가’가 무슨 집단인지도 인지하지 못했었다.
당문은 시설 내 비밀을 철저하게 지켰으니.
그렇게 천이 넘는 아이들의 얼굴을 가슴에 묻고, 마음속 삼각형이 모두 닳아서 동글동글한 형상이 되었을 때.
번들거리는 가면 사내들 사이로, 창백한 인상의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당당히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무심한 눈으로 베아트리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군.”
수많은 아이들이 실험 하나만을 위해 희생됐다. 베아트리체는, 그 중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죽어 나간 아이들은, 베아트리체를 완성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을 거라고.
어린 나이임에도, 베아트리체는 초점 없는 눈으로 생각했다.
창백한 사내, 비원각주의 결정에 따라 실험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천이 훌쩍 넘는 아이들의 원혼을 담은.
일본에 강림했던 최악의 S급 마수이자 타락한 영물인, ‘타마모노마에’의 코어 살생석殺生石이 베아트리체에게 이식됐다.
인간에게 마수의 코어를 심는다는 광기 어린 실험은 결국 단 하나의 실증 사례만을 남기고 성공했다.
실험은 성공했다. 허나, 당문으로서는 베아트리체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강제로 베아트리체를 구속할 수 있는 ‘협력자’에게 떠넘겼다. ‘협력자’의 존재는 비원각주를 비롯한 극소수만 아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충분한 데이터가 쌓였고 성공 사례가 나왔으니 이후 또 가능할 거란 오만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비슷한 실험이 계속됐지만, 살생석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하찮은 C급, D급 코어조차 인간의 나약한 육신은 버티지 못했다.
베아트리체의 성공은, 그야말로 기적이라 불릴만했다.
‘기적.’
지금의 만남 역시 기적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베아트리체는 비원각주의 입매가 움직이는 걸 보았다. 느려졌던 시간이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협정을 어길 셈인가?”
그답지 않게 살짝 감정이 실린 어조였다.
“제가 맺은 협정은 아니잖아요?”
분홍빛 머리 끝단을 살살 꼬며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은발이었던 머리는 진마숭혈공의 ‘사소한’ 부작용 때문에 독특한 분홍빛으로 변해버렸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했다. 그리하여 난 폐기를 주장했지.”
“예, 살기 넘치던 비원각주님의 시선을 제가 몰랐을까 봐요? 혜안 넘치셔서 좋겠네요.”
“...네 존재야말로 당문의 실수다. 전대 가주의 명을 어겨서라도 너를 폐기해야 했거늘.”
“아뇨. 제 존재야말로 당문 비원悲願의 총화나 다름없지요.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요?”
베아트리체가 가슴에 손 하나를 올리고 미소지었다. 김무공은 묵묵히 주변에 기막을 깔고 소리를 차단했다. 비원각주의 명령이 없는 한, 저들은 달려들지 않을 거라 예상했고 그건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니, 김무공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헛소리.”
단칼에 비원각주가 베아트리체의 말을 잘랐다. 베아트리체가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아직도 모를 거 같아요? 우리 비원각주님도 참. 외도外道의 힘을 빌려서라도 당문 비원悲願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 비원각이란 그런 곳이잖아요? 비원祕苑? 금지로 지정하여 사람들의 눈을 가린다고 그게 가려지겠어요?”
“혈교의 주구 따위가, 지금 나에게 정도를 논하는가?”
“아뇨. 그냥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알려드리려고요. 당신들의 집착이 무슨 괴물을 만들어냈는지는 깨닫고 가셔야 할 거 아니에요?”
“...잡것이 건방지구나.”
비원각주의 발밑에서 동심원의 파동이 일어났다.
주인 잃은 병장기 파편들과 비원각주의 품 안에서 반짝이는 조각들이 빠져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김무공은 이전에 이와 비슷한 걸 겪은 적이 있었다. 나서려던 김무공을 베아트리체가 제지했다.
[후배님은 가만히 있어.]
한 발짝 앞장선 베아트리체가 차분하게 전음을 보내왔다. 공격보다는 건곤대나이를 이용한 방어초 정도만 준비하며, 김무공은 비원각주를 응시했다.
이윽고, 철로 된 꽃잎들이 만개했다.
찬연한 빛줄기들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당문비기唐門祕技 만천화우滿天花雨.
피아 식별도 없이 마구 쏟아내는 공격에 다들 혼비백산하며 도망가기 바쁜 와중.
베아트리체가 소매를 펄럭이며 사뿐히 만천화우의 중심에 섰다. 이전에도 쓴 적 있는 신묘한 보법이었다.
화아아악-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붉은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줄기줄기 내리꽂히던 만천화우의 꽃잎들이 힘을 잃고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베아트리체가 내뿜었던 기파가 만천화우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비틀었다. 완벽한 상쇄였다.
비원각주가 눈을 부릅떴다. 이런 식으로 만천화우가 파해되는 사례는 들어도 본 적 없었다. 힘으로 파훼破毁하는 경우야 흔했지만.
“지겹지도 않아요? 그놈의 만천화우, 만천화우. 개선해 봐야 근본이 어디 가겠어요?”
“...혈교가 비수를 키우고 있었구나.”
베아트리체를 경계하며 비원각주가 철선을 뽑아 들었다.
“좀 다르긴 한데 결과는 비슷하네요. 혈교도 당문을 내칠 생각이야 심심하면 하는 거 같거든요. 제 알 바는 아니지만요.”
“달라지는 건 없다.”
차갑게 내뱉으며 비원각주가 손짓했다. 뒤로 물러나 있던 무인들이 주춤거리면서도 둘을 둘러쌌다. 여전히 머릿수 차이는 절망적이었다.
“후배님, 부탁해.”
베아트리체가 흐릿하게 웃었다. 김무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그녀 스스로 매듭지어야 할 일로 보였다.
사악-
한순간에 비원각주와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사라졌다. 김무공 자신도 겪어본 적 있던, 진법 공능이었다.
‘마법이나 다름없군.’
비원각주조차 베아트리체의 진법에 관해선 잘 모르는 듯. 그대로 끌려 들어갔다. 화경 고수조차 제대로 저항 못 하는 진법. 확실히 베아트리체는 적으로 만나면 위험한 상대였다.
‘이겨야 의미가 있겠지만.’
아마 이길 자신이 있으니 일대일 상황으로 끌고 간 거겠지. 김무공은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베아트리체를 믿을 때였다.
“이게 무슨...?”
“당황하지 마라! 비원각주님의 명을 따르라!”
“고작 한 놈이다!”
한순간에 사라진 비원각주 때문에 당황하면서도, 일부 무인들의 주도하에 김무공에게 짓쳐 들었다.
실소를 흘리면서 김무공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만천화우라.’
비록 베아트리체에게 완벽히 파해되긴 했지만, 비원각주가 직접 시전한 만천화우는 명불허전이었다. 그것이 온전한 위력을 발휘했다면, 주변은 초토화됐을 게 분명했다.
저번에 봤던 만천화우비환과 비원각주의 만천화우. 베아트리체의 파해식. 재료는 주어졌다. 김무공의 백회혈이 타오를 듯 백열했다.
천마수는 정해진 초식이 없는 무공이다. 그저 구분만 있을 뿐. 즉흥적인 감각에 엄청나게 의존하는 탓에, 누구에게 전수하기도 힘들었다. 그건 이미 천하연을 통해 증명된 바였다.
정해진 초식이 없다는 건, 바꿔 말하면 무슨 초식이든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구결은 천마신공으로 대체한다. 발동원리만 따온다. 형形과 식式은 직관으로 갈음한다.
무신의 깨달음이 녹아있는 무혼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김무공의 오른손 위에 검게 빛나는 구체가 형성됐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사방을 밝혔다.
쿵-
용천혈을 중심으로 경파가 뻗어 나갔다. 비원각주와 비슷했지만, 훨씬 패도적인 진기였다.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던 자들이 순간 움찔거렸다.
고작 호흡 한 번도 지나지 않았을 만큼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쿠구구궁-
검게 뭉쳐있던 구체가 맹렬히 타올랐다. 베아트리체가 보여줬던 파해식을 조금 더 응용했다. 맹렬한 불꽃이 하늘로 회오리치며 쏘아졌다.
천마수天魔手 업화業火.
철로 된 꽃잎 대신, 불길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완벽하진 않았다. 허나, 상관없었다.
‘만천화우식滿天花雨式.’
의념을 실어, 속으로 읊조렸다. 꽃비 대신 화우火雨가 줄기줄기 쏟아져 내렸다. 광범위한 업화의 불길은 주변에 몰려든 무인들만 골라서 불태웠다. 듣기 힘들 만큼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김무공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능할까 해서 즉흥적으로 시도해본 것치곤, 효과가 너무 강렬했다. 살이 타오르면서 나는 매캐한 누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한참을 이어진 처절한 비명을 끝으로, 장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수백에 달하는 탄화된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 하고 저 멀리 도망가기 바빴다.
굳이 쫓지 않았다. 상단전을 너무 혹사시킨 탓에, 피로가 몰려왔다.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어도 할 말 없겠군.’
남의 무공을 이런 식으로 복제하여 쓰는 건 금기에 가까웠다.
‘눈치챈 사람은 없는 거 같다만.’
앞으로는 조금 주의해야 할 부분이긴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김무공이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았다. 베아트리체의 합류 덕에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비원각주에 그 많은 인원을 혼자 상대하는 건 본래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었다.
김무공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덧 해가 지고 컴컴한 밤이 찾아왔다. 도심의 불빛이 없는 장소라 그런지, 별빛은 밝기만 했다.
사박.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김무공의 시야에 노란 눈동자가 보였다. 처연한 미소도 함께였다.
“뭐 하십니까?”
뚱한 음색으로 김무공이 말했다.
“안 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