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놀랍니다.”
“치, 재미없게.”
베아트리체가 툴툴거리며 김무공의 옆에 앉았다. 비원각주는 어떻게 되었냐, 무슨 일이 있었냐. 김무공은 굳이 묻지 않았다. 베아트리체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끝난 거야?”
“예. 끝났습니다.”
“허무하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니었으면 꽤 고생했을 겁니다.”
“말로만?”
몸을 살짝 틀면서 베아트리체가 김무공을 올려다봤다. 김무공도 지지 않고 물끄러미 눈을 마주쳤다.
“제가 뭐라도 해드립니까?”
“그럼 눈 감아.”
“...제가 예상하는 그거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김무공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후배님은 항상 말이 많아. 요놈의 주둥이가 문제야.”
베아트리체가 손가락으로 김무공의 입을 집었다. 입술이 삐죽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베아트리체는 그걸 보며 또 재밌다고 웃어댔다.
[하고 싶으신 게 이겁니까?]
강제로 입이 틀어막혔지만 전음은 가능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김무공의 입술을 한 번 매만졌다.
[아니.]
베아트리체 역시, 전음으로 화답하며 얼굴을 훅 내밀었다.
김무공의 입술에 부드러운 입술이 포개졌다. 키스라고 하기도 민망한 입맞춤. 입안을 감도는 씁쓸한 피맛을 느끼며, 둘은 서서히 몸을 떨어트렸다.
“...너무 예상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싫어?”
배시시 웃는 베아트리체를 보며, 김무공은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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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단 별거 없네.”
베아트리체가 음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 말입니까?”
“응. 어디서 막 구름다리를 건너는 느낌이라던데 딱히 그런 건 아니더라.”
“대체 뭘 본 건지 모르겠는데 말이지요. 제대로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난 처음인데 어떻게 제대로 하니? 알면서.”
입술을 샐쭉거리면서 베아트리체가 항변했다.
“그건 그렇긴 한데. 아무튼, 원래 키스는 좀 더....”
“좀 더?”
“질척질척합니다.”
“질척질척질척?”
“...굳이 강조는 안 해도 됩니다.”
“흐응, 후배님이라면 괜찮아. 경험자니까 리드해줘.”
“...애초에 말입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그런 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의도하지 않은 대학살을 벌여버린 탓에.
아직도 열기가 남아있는 육편 조각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당연히 끔찍한 악취를 풍겨댔다. 낭만적인 장소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뭐, 어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베아트리체가 앉은 채로 다리를 흔들었다. 하여간, 이 여자도 정상은 아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리고 나도 정상은 아니었다. 저 모습이 묘하게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일단 자리 좀 옮깁시다.”
내 뒤를 베아트리체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옷소매를 잡았다.
“후배님. 나 궁금한 거 있어.”
“네?”
“아까 그 사람들 안 도우러 가도 돼?”
“예, 그쪽은 최종병기 보냈습니다.”
“응?”
“그런 게 있습니다.”
“치, 비밀이 많아.”
툴툴거리는 베아트리체를 가볍게 무시했다. 매번 도움만 받는 것 같아 이번에는 피하려 했지만, 결국 부르고야 말았다. 일이 꼬이자마자 박수호 팀장 일행을 탈출시키고, 한여름을 통해 천하연을 호출했다.
그렇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 중이던 천하연이 탈출 루트를 따라 북상했으니. 지금쯤 아마 제천대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을 거다.
[제천대 확보 끝났어. 안전하게 무림맹 구출대한테 인계할게.]
아니나 다를까, 한여름에게 연락이 바로 왔다.
[고생했어. 매번 고맙다. 천하연한테도 감사하다 전해주고.]
[응. 그쪽은 어때?]
[이쪽도 처리 완료. 벗어나는 중이야.]
[그래도 조심해. 혹시 모르니까.]
[오냐.]
달빛 아래 소리 없이 등장한 천하연을 본 제천대의 심정이 어땠을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거나 싸움을 시도할까 조금은 걱정했는데 미리 경고했던 게 먹힌 모양이었다. 한여름과 얘기를 마치고 베아트리체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 확보 끝났답니다.”
“최종병기 성능이 좋나 봐?”
“...예. 탁월하지요.”
앞으로는 더 성능 좋아질 예정이고. 천마신공을 복구한 천하연의 고점이 어디까지일지는 나도 모르겠다. 스무 살 화경이라는 것부터, 후기지수의 영역은 아득히 벗어났다. 대문파의 문주들도 도달하기 힘든 영역이 화경인데 말이다.
“쿨럭...!”
이후 묵묵히 내 한보 뒤에서 따라오던 베아트리체가 입을 가리고 기침했다. 입가에 핏물이 살짝 흘러내렸다. 비원각주와 싸움이 쉽지는 않았던 듯했다.
“선배님?”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베아트리체가 피를 닦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쉬었다 가죠.”
마침 근처에 넓은 바위도 있었다. 가볍게 바위를 쓸어내려 평평하게 하고 먼지를 정리한 뒤, 베아트리체와 나란히 걸터앉았다.
“나 걱정해주는 거야?”
“얘기나 좀 더 합시다.”
“또 공짜로 탈탈 털어가려고.”
“내키지 않으시면 굳이 말 안 하셔도 됩니다.”
“아냐. 뭐든 물어봐도 돼.”
“선배님은 당문 멸문을 노리는 겁니까?”
잠시 머리 끝단을 빙빙 돌리던 베아트리체가 찬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그런 건 아냐.”
“당문 시설 습격은....”
“화풀이 정도? 거슬리니까. 큰 의미는 없어.”
그녀가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혈교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습니까?”
“....”
베아트리체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후배님도 생각보다 마음이 약하네.”
“제 손으로 선배님을 죽이는 건 싫습니다.”
“우리 키스까지 한 사이잖아? 난 후배님 품에 안겨 죽는 것도 낭만적이라 좋아. 아니면 반대도 좋고. 아니다. 반대는 역시 좀 그래. 후배님은 살아야지.”
“...키스라기보단 입술 박치기에 가깝습니다만.”
“그 입술 박치기 좀 더 길게 할래?”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등을 살짝 훑고 지나갔다.
“됐습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이 밤중에 누가 본다고. 싫다는 건 아니네?”
“...아까 했던 질문의 답을 듣고 싶습니다.”
“모르겠는걸. 그리고 후배님은 무슨 혈교가 벗어나고 싶다고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신교로 오시면.”
“천마신교는... 장소가 문제는 아냐.”
“저주술 때문입니까? 그것도 신교라면.”
“아니.”
베아트리체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어버렸다. 다소 씁쓸한 표정이었다.
“작금의 천마신교는 저주술을 풀 수 없어. 백도 정파보다 더 정도를 추구하는 게 현재의 천마신교거든. 한 백여 년 전쯤이라면 모를까. 얻은 게 있으면 잃은 것도 있는 법이야.”
“저주 때문은 맞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
“난 말야.”
살짝 뜸을 들이며 망설이던 베아트리체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들어.”
“...갑자기 뭔 중2병 같은 소립니까. 사춘기도 아니고.”
“후배님도 대충 짐작했잖아? 비원각주와 당문,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
“내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지는 않았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프로젝트가 금방 폐기됐겠지.”
“당문의 비원인가 뭔가 하는 거 말입니까? 대체 그건 뭡니까?”
“천무지체天武之體조차 뛰어넘는 최강의 육신을 인위적으로 탄생시키고자 했던 광기. 외도外道의 힘을 빌려서라도 달성하고자 했던 당문의 비원悲願. 그 결과물이 나야. 물론 지금도 당문은 그걸 추구하고 있어. 나라는 성공 사례까지 있으니까.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거 같지만.”
외도外道.
흔히들 사마외도邪魔外道라 묶어 부르는 말이었다. 외도란 상리를 벗어난 길을 뜻했으니, 사공이나 마공도 어떤 면에선 외도의 틀에 속했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꽤 다르지만.
많이들 착각하곤 하지만, 사마외도가 전부 악惡은 아니었다. 당장 신교만 해도 악이라 볼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신교의 어둠이 혈교듯이.
상리를 벗어난 길은 언제고 타락할 위험이 너무 컸다. 인위적으로 뛰어난 육체를 만들고자 했던 당문의 비원. 처음은 분명 순수한 취지였을 거다.
‘취지만큼은’ 순수한 일들이 세상에는 꽤 많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처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었으니.
결국 당문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비인외도非人外道의 길로 들어섰다는 얘기겠지. 이런 사례는 생각보다 흔했다. 마치 숭고한 뜻을 지녔던 전쟁 영웅이 사악한 독재자가 되는 것처럼.
그래도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개소리 마십쇼.”
내 폭언에 베아트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인간 같지 않은 일들을 벌인 건, 선배님 잘못이 아닙니다. 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느니, 그런 말로 자책하고 그럽니까.”
“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나라고 다른 생각 안 해본 줄 알아?”
베아트리체의 언성이 조금은 높아졌다. 그녀가 입을 다시 열기 전에 먼저 선수쳤다.
“사실은 하납니다. 선배님은 그저, 휘말린 것뿐입니다. 선배님이 없었다면 오히려 잘 안 풀린다 생각하여 더 많은 아이들을 희생시켰을지, 대체 어떻게 압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말야. 살생석 안에서 날뛰는 원혼들을 보면서, 그게 어디 쉽겠니? 그리고 너 말야. 내가 어디 쪽 사람인지 잊었어?”
“혈교의 위대한 십삼사도 님이시죠. 혈교에 안 좋은 일만 골라서 하시는. 선배님이 확실한 악인이었다면 이런 말도 안 했습니다.”
그녀는 ‘조금’ 특이할 뿐이지 악인은 아니었다. 진정 악인이었다면 저런 것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겠지. 그녀의 저런 생각은 PTSD의 일종이라 봐도 무방했다.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s Guilt) 또는 생존자 증후군(Survivor’s Syndrome)이라 불리는.
유년기에 벌어진 참혹한 실험의 피해자.
‘어쩌면 모든 게 나 때문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끔찍한 재난 생존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양상이기도 했다.
거기에 혈교라는 비정상적인 생활 환경. 정신이 말짱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오히려 저 정도에서 그친 건, 그녀가 태생적인 선인이라는 것을 방증했다.
“나 악인 맞아. 내가 저지른 광경 봤잖아?”
“기준은 제가 정합니다.”
“좋아. 내가 그 기준 넘으면 망설이지 말고 죽여줘야 한다?”
베아트리체의 눈매가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여느 때처럼,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기 어려운 어조였다.
“우중충한 얘기는 됐습니다. 그래서, 그 저주부터 해결하면 된다는 얘깁니까?”
“...아마도?”
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베아트리체가 손을 내저었다.
“이건 진심이야. 저주가 풀리면 혈천령에서 해방이야 되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
“제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저주 때문 아니었습니까?”
“기억하고 있었네. 맞아. 후배님이 익힌 천마신공. 그리고 태양지체.”
“천마신공?”
“...의외로 모르는구나. 만사萬邪와 만마萬魔의 종주. 어떤 면에서 외도의 총화인, 천마신공의 공능은 좌도방문左道房門의 술법에도 적용되거든. 천마신교 교주가 과거 제갈세가의 술법을 힘으로 파훼한 기록이 꽤 많아. 다만... 천마신공의 일부 구결이 소실되면서 그게 불완전해진 거 같긴 했는데.”
“제가 나타났다는 겁니까?”
“응. 사실 천마신공을 익힌 건 나중에 알았지만.”
“천마신공은 그렇다 치고, 태양지체는 뭡니까?”
이런 쪽 얘기는 나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베아트리체의 말대로라면, 천마신공으로 저주술을 깨부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살생석의 원주인. 타마모노마에가 뭔지는 알아?”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긴 합니다만.”
“항간에서 달리 부르는 말로 백면금모구미호白面金毛九尾狐. 구미의 몸은 본래 음기 덩어리야. 당연히, 그것의 정수인 살생석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빙정과 비견될 만큼 음기가 강해.”
“만일 폭주했을 때 억누르려면 태양지체의 양기 정도는 필요하다?”
“...몰라. 내 몸 자체가 이적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도, 후배님만이 유일한 가능성이야.”
“좀 더 강해져야 한다는 이유가 그래서였군요.”
“응. 나야 상관없지만 후배님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나는 속으로 침음을 흘리며, 양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왜 이리 내게 집착하나 싶었는데,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근데 오해하진 마. 딱히 그런 것 때문에 후배님이 좋은 건 아니니까.”
“....”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베아트리체가 뾰로통한 말투로 내뱉었다.
“그냥. 아냐.”
“왜 말을 하다 맙니까.”
“눈치껏 좀 알아주면 안 돼?”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베아트리체가 쏘아봤다. 나는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자제했다. 아무튼, 사정은 알았다. 그렇다면 다음 해야 할 일도 정해졌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죠. 푹 쉬시고, 도움 감사했습니다.”
“응.”
“시간 날 때 연락 주시고.”
“응?”
“그놈의 저주가 뭔지 좀 제대로 봅시다.”
다음화는 11월 01일 22시 업데이트 됩니다.